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새’에 대한 비유를 즐겨한다. 1997년 서성환 선대회장의 뒤를 이어 아모레퍼시픽 대표에 취임할 때, 그는 자신의 심정과 비전을 솔개에 비유했다. 40년을 살아온 솔개가 다시 날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무거워진 깃털과 발톱을 제거하듯이 회사도 낡고 고질화된 관행을 버리고 새로운 비상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 새로운 각오로 20년을 비상해온 아모레퍼시픽은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화장품 기업으로 우뚝 섰다.
성공 신화를 일군 서경배 회장은 최근 놀라운 소식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본인의 사재 출연금 3000억원을 들여 순수과학을 지원하는 서경배 과학재단을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아모레퍼시픽을 위한 연구개발과는 무관하게 자비로 젊은 기초과학자와 생명과학 분야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재단설립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서 회장은 또 한 번 ‘새’를 언급했다. 그는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듯이 긴 안목을 가진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했습니다. 높이 나는 새와 빨리 나는 새, 그 모든 새들이 다 함께 바다도 건너고 세상도 건너 훌륭한 사회와 나라를 만들어가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생명과학 분야 신진과학자 장기 지원
서경배 과학재단은 ‘혁신적 과학자의 위대한 발견을 지원하여 인류에 공헌한다’는 미션을 갖고 있으며, 창의적인 신진 기초과학자를 육성하고 생명과학의 발전을 도모하여 인류 발전의 토대를 마련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과학자 중심의 연구 지원’이라는 재단운영 원칙 아래 임팩트가 큰 혁신적인 연구를 선발하고, 자유롭고 도전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며, 긴 안목을 갖고 장기적으로 꾸준하게 지원할 계획이다.
2015 메이크업 유어 라이프 캠페인 현장
연구 지원 사업의 선발 대상은 ‘생명과학’ 분야의 기초연구에서 새로운 연구활동을 개척하고자 하는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국내외 한국인 신진연구자다. 재단은 매년 공개 모집을 통해 3~5명을 선발하고, 각 과제당 5년 기준 최대 2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할 예정이다. 특히 우수 연구자에 대해서는 중간 심사를 통해 보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지원도 계획하고 있다. 선발 프로세스는 1차 서류 심사, 2차 연구계획서(Full Proposal) 서류 심사 및 토론 심사 등으로 진행되며, 연구 과제의 독창성, 파급력, 연구 역량 등을 중점적으로 심사할 예정이다.
서경배 과학재단은 전문성 및 공정성 기반의 사업 운영을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로 과학자문단과 심사위원단을 구성할 계획이다. 과학자문단은 재단의 전반적인 운영사항 및 해외 연구 지원 사업(해외에서 연구하는 한국인 신진연구자 선발 및 해외 연구자 네트워크 등)의 자문을 맡으며, 심사위원단은 분과별 전문가들로 이루어져 연구 지원 사업의 심사를 맡을 예정이다. 연구 지원 사업의 1차년도 과제는 2016년 11월에 공고할 예정이며, 2017년 1월부터 2월까지 과제 접수 후 1차 심사(3~4월)와 2차 심사(5월)를 거쳐 6월에 최종 선정자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번에 공익재단을 설립하면서 기초과학, 특히 생명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서성환 선대회장님이 기술과 과학에 대한 관심이 많으셔서 자랄 때 항상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1970년대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과학 기술의 발전 없이는 사회를 발전시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회사 일을 하다 보니 과학의 힘이라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회사가 어려울 때도 많이 있었지만, 과학의 힘을 통해 다시 일어나게 되고, 그로 인해 과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또 제가 어렸을 때는 아톰 만화를 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습니다. 생물을 다른 과학보다 훨씬 좋아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끝까지 책임감 있게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아 생명 과학 분야를 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아모레퍼시픽은 여러 공익 재단을 운영해왔는데 사재를 출연하겠다고 밝힌 것은 처음 입니다. 계기가 무엇인지요.
사실 성공이라는 것은 자신이 노력을 해서 얻는 부분도 있지만,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이루기 어렵습니다. 제가 20여 년 정도 보유하고 있던 주식이 현재 가치를 갖게 되었고, 그런 가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개인적인 방식으로 재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번 재단 설립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꿈이 무엇인지.
저희 회사가 1991년도에 총파업으로 인해 거의 망할 뻔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저희가 첫 번째로 했던 작업은 태평양 종합기술연구소를 신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했었던 일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의 발전은 미래를 향한 희망입니다. 과학을 포기하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으로 삶의 질을 풍요롭게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2014 서울빛초롱축제 아모레퍼시픽 조형물 전체
▷사업과 연계된 부분은 없다고 하셨는데 혹시 나중에 화장품 사업 등 다른 분야로 사업을 확장해서 시너지를 낼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3000억원 출연 이후의 계획은.
본 재단은 사업에 대해서는 관계가 없습니다. 저희 회사는 연 예산의 3% 가까운 규모로 연구비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회사 스스로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연구를 합니다. 과학재단은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했습니다.
과학재단의 시작은 3000억원 규모로 출연합니다. 하지만 제 꿈은 1조원 정도는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재단이 100년 이상 지속되어서 과학 연구가 계속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10년, 20년 뒤에 제 뜻과 함께 해주실 분들이 계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재단 연구과제나 결과물이 아모레퍼시픽의 기업과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지요.
연구과제에 과학과 기술이 있습니다.
과학은 기업에 직접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기술이나 공학으로 변화할 때는 다릅니다만, 저희가 하려는 것은 과학입니다. 저희 재단에 이사로 오신 분들은 모두 과학을 연구하신 국가 과학자 분들입니다.
기업차원에서는 연구 투자를 위해 연간 수천억원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기업차원의 연구투자와는 별개로 이번 재단설립은 과학에 대한 접근입니다. 저희 임원들과 이사회를 선정, 운영하는 과정에서 기업과 재단의 영역은 분리될 것입니다.
▷벤치마킹 혹은 롤모델로 삼고자 하는 과학재단이 있는지요.
벤치마킹 대상은 미국 등에 좋은 연구소들입니다. 소란스럽지 않게, 장기적으로 뚜벅뚜벅 과학 연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HHMI(하워드 휴즈 의학 연구소)로, 아마 우리나라의 많은 과학자 분들께도 익숙한 연구소일 것입니다.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한국 순수 생명과학 분야가 많이 뒤처져 있다는 비판들이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한 문제의식도 재단 설립의 한 이유였는지.
우리나라가 이제껏 했던 많은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가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이제는 특이성이 있는 과학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하나의 새로운 길을 가보고자 합니다.
희망가게 50호점 기념행사
▷재단설립을 통해 한국 과학자들을 돕겠다고 하였는데, 향후 외국 과학자까지 확대할 계획도 있는지요.
시작은 한국 과학자 중심으로 하겠지만 아시아에도 훌륭한 과학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과학자들에게도 기회를 확대할 계획입니다.
▷회사가 어려울 때마다 과학의 힘을 통해 일어났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인 사례가 있는지요.
1990년대에 회사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자금을 빌리는 것도 힘들고 물건이 팔리지 않아 거래처에서 야단을 맞는 것도 지겨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순수 비타민 A인 ‘레티놀’을 화장품으로 바꿔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약의 용도로 쓰이는 성분을 안정적으로 캡슐화하는 기술과 피부에 효과적인 함량을 파악하는 기술, 성분이 공기와 닿아서 산화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기술 등을 수백 번의 실험을 통하여 1997년도에 ‘아이오페 레티놀 2500’이라는 제품으로 탄생시켰습니다. 이 제품의 판매 호조로 산적해 있던 문제들을 해결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이 약 20년 전 일입니다. 그때 ‘과학 기술의 힘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순수 과학 재단 설립을 통해 향후 한국 최초로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까지도 기대를 안 하실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우리 재단이 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결과물을 산출해내길 기원합니다. 큰 꿈을 꾸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젊은 신진 과학자를 지원하느냐고 묻는다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을 때가 30세 즈음이었습니다. 서른 전후에 그 이론을 내어 상을 받은 40대까지는 이론을 증명하는 과정이었습니다. DNA 이중나선구조를 밝힘으로써 지금 생명과학의 문을 열어준 왓슨과 크릭도 다 30대의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이론을 내고 증명하는 데에 10~20년이 걸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 같은 세계적인 상을 수상하는 분이 등장할 거라 믿습니다. 계속 독창적인, 특이성(singular) 있는 연구들을 지속하다 보면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과학에 문외한이고, 개인적인 능력은 부족하지만 많은 분들과 재단의 도움으로 영광의 순간에 함께하기를 기대합니다.
▷본인의 이름으로 재단명을 정한 이유는 무엇이며, 재단 설립의 롤모델이 된 국내나 해외의 기업인이 있는지요.
자신의 이름을 거는 것보다 더 확실한 약속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빌게이츠 재단, 록펠러 재단 등 모든 것들이 본인의 이름을 걸고 하고 있습니다. 재단을 통해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참여를 독려하고 용기를 주겠다는 의미에서, 제 이름을 거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정한 한 사람을 롤모델로 삼진 않았지만, 미국에 이런 재단이 참 많습니다. 우리말에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처럼, 힘들게 번 돈을 멋있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롤모델이었습니다.
▷올해 200억원 정도 투입할 생각이라 하셨는데, 더 확대해 나갈 생각이 있습니까.
3000억이면 대략 20년을 쓰면 전부 소진하게 됩니다. 제 꿈은 열심히 해서 1조를 채워 나가다 보면, 세상이 변해 10~20년 뒤에 뜻이 같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연구소를 20여 년 운영해 보니, 세상사는 돈에 쫓기게 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에는 장기와 단기가 존재하므로 항상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장기적으로 가야 할 것들은 장기적으로, 단기적으로 가야 할 것들은 단기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제가 재단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은 단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과학의 발전을 고민하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전후세대 아톰을 보고 자란 세대들이 로봇을 개발하고 있는데, 국내에서 과학에 대한 아쉬운 점이나 희망, 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얼마 전 <과학과 기술>이라는 잡지를 읽어 보니, 이성규 오하이오대학 석좌 교수님이 셰일가스 추출 아이디어를 내어 특허를 낸 것은 1980년대였지만 상용화되기까지 30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동안 밀어준 학교와 사람들이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주변의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저희 회사는 30년짜리 연구를 하지 않습니다. 회사는 중단기적인 연구를 하는 곳이다 보니 길어야 3~5년에 불과할 뿐, 회사에서 30여 년의 장기간의 연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새가 높이 날아야 멀리 보는 것처럼 긴 안목을 가진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높이 나는 새도 있고, 빨리 나는 새도 있습니다. 그 모든 새들이 모여 거대한 기러기 편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다 함께 바다를 건너고 세상을 건너 훌륭한 사회와 나라를 만들어가는 데에 일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