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온난화를 머리가 아닌 피부로 경험했던 지난 여름이었다. 폭염으로 냉방기구들의 판매량은 급속히 늘었고, 아예 이상기후를 대놓고 즐기는 ‘폭염 페스티벌’도 열렸다. 지구가 더워진다고 하니 겨울 추위는 좀 나아지려나 싶었다. 그러나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한번 내렸다 하면 그치지 않는 눈발과 전에 없던 추위가 한반도를 꽁꽁 얼려버렸다. 기상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 1월 서울의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선 날은 단 이틀에 불과했다. 기상 전문가들은 이런 한파와 폭설 역시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라고 설명한다. 북극이 뜨거워지면서 밀려난 차가운 공기가 북반구 중위도에 위치한 한반도로 밀려왔다는 것. 고맙게도 강추위가 설 연휴동안 물러나긴 했지만 남은 겨울을 호락호락하게 보내기는 어려울 듯하다.
Scene 1. 추위에 울상 짓는 노점들
설을 앞둔 재래시장이 썰렁하다.
얼어붙은 날씨만큼 소비자들의 발길이 얼어붙은 곳은 역시 재래시장이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 1월 말, 서울의 한 재래시장의 풍경은 냉랭했다. 영하를 밑도는 추운 날씨에 상인들은 물건을 내놓기도 어렵다고 했다. 차례상에 올려야 하기 때문에 더 까다롭게 품질을 따지는 식품들이 얼면 상품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명절을 앞두고 항상 재래시장에서 물건을 구매한다는 주부 조모씨는 “젊은 사람들이 워낙 대형마트들을 많이 가기 때문에 매번 재래시장에 손님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지만 오늘은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유난히 사람이 적은 것 같다”며 “명절만 아니면 굳이 시장까지 나오고 싶지 않을 만큼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날씨뿐 아니라 구제역과 AI에 대한 우려까지 겹쳐 재래시장의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0%가량 줄었다는 것이 상인들의 설명이다. 물론 재래시장의 현대화와 소비자 이용편의를 위해 지붕을 설치하는 시장도 늘고 있지만 아직 설치하지 못한 시장도 절반이나 된다.
연휴 동안 날씨가 풀렸다 해도 재래시장들의 표정은 그리 밝아진 것 같지 않다. 이불 소매상을 운영한다는 허모씨는 “물건을 받아가기 위해 연휴가 끝나고 동대문 시장에 나왔다. 긴 연휴 후라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발길이 뜸하다”며 “계속되는 한파로 소비자들의 지갑도 얼어버린 것만 같다. 사람들이 길에 나오지를 않으니 동네에서 소매로 장사를 하는 우리 같은 자영업자들의 주머니 사정도 어렵게 됐다”고 전했다.
반면 대형마트는 따뜻한 실내에서 물건을 둘러볼 수 있고, 주차가 편리하다는 장점 때문에 오히려 추운 날씨가 고맙다. 대기업의 경기 회복세도 매출 상승에 보탬이 됐다. 지난 1월30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이마트의 경우 1월17일부터 27일까지 설 선물세트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0.6%늘었고, 롯데마트는 1월20일부터 6일간 74%, 홈플러스는 1월19일부터 9일 간 82.2%의 신장률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Scene 2. 백화점, 기온 떨어져도 매출은 쑥
겨울철 골프장 / 롯데백화점 모피의류 매장 / 신세계 백화점 본점 식품매장
한파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은 대형마트뿐만이 아니다. 백화점들은 지난 1월 30%에 달하는 매출신장률을 기록했다. 날씨뿐 아니라 설 연휴가 지난해에 비해 앞당겨진 것도 1월 매출 상승의 1등 공신. 업체별로 보면 롯데백화점은 기존 점포 기준 24%의 매출신장을 보였고, 중동, 구리 등 신규점 매출까지 합치면 이보다 늘어난 31.6%의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현대백화점의 전국 12개 점포 매출 역시 32.5%나 증가했고, 신세계백화점은 29.8%, 갤러리아백화점은 27% 신장했다.
상품군 별로 살펴보면 모피, 패딩 등 겨울철 방한의류와 워머, 장갑, 머플러 등 방한에 효과적인 겨울잡화의 판매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롯데백화점의 경우 패션잡화의 매출신장률은 50.5%였고, 현대백화점은 장갑 등 겨울 잡화류 판매가 74%로 크게 늘었다. 신세계백화점은 모피가 56.2%늘었고, 여성 및 남성 캐주얼의 매출도 각각 31.4%, 35%씩 올랐다.
Scene 3. 온라인 쇼핑몰, 주말 클릭 족 늘어
추운 길거리에서 발품 팔기보다 실내에서 클릭 한번에 물건을 받아보길 좋아하는 ‘핑거쇼핑족’들의 바쁜 움직임에 온라인 쇼핑몰도 연일 싱글벙글이다. ‘까페24’를 운영하는 심플렉스인터넷은 최근 높은 트래픽을 기록하고 있는 인터넷 쇼핑몰 50곳을 분석했다. 그 결과 한파가 불어 닥친 주말 트래픽이 평년 기온을 유지하는 주말과 비교할 때 매출이 20~40%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평일에 비해 30% 이상 낮은 패턴을 보이는 주말 트래픽 량이 늘어 평일과 비슷한 수준을 기록했다.
특히 영하 17도를 기록했던 지난 1월16일 일요일은 쇼핑몰들의 최대 트래픽이 다른 주말 대비 평균 40% 가량 증가했다. 한방식품 전문몰 백장생의 송상혁 대표는 “다른 주말과 비교해 한파가 몰아닥친 주말의 경우 방문자 수가 20% 가량 증가했다”며 “추위 때문에 직접 매장에 나가기보다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택배를 통해 상품을 받아보려는 고객들이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남성의류 전문몰 레드옴므의 강경호 대표 역시 “평일 방문자가 주말보다 20% 가량 많은 게 보통이다. 그러나 올 들어 가장 추웠던 주말은 특이하게도 평일 방문자 수와 큰 차이가 없었다”며 “야외 활동을 많이 하는 주말에는 온라인 쇼핑몰 접속이 뜸해지는 편인데 한파로 인해 주말을 집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늘자 자연히 쇼핑몰 접속자도 증가한 것 같다”고 전했다.
심플렉스인터넷 이재석 대표는 “온라인 쇼핑은 실외 기온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물건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한파 기간에 오히려 트래픽이 높아진다. 앞으로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 쇼핑몰 접속 수단이 늘어나면서 추위를 피해 언제 어디에서나 온라인 쇼핑을 즐기는 소비자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고 분석했다.
대형마트 외출마저 부담스러운 고객들은 옥션, G마켓, 11번가 등 오픈마켓의 생필품 코너들을 적극 이용하고 있다. 옥션측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월 라면, 쌀, 생수 등 마트 상품군 매출은 지난해 대비 32%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강추위에 오프라인 대신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하는 고객이 늘면서 마트 상품군을 한눈에 찾아볼 수 있는 ‘마트대신옥션’ 코너의 방문객 수 역시 전년 대비 2배 이상 늘어났다.
Scene 4. 겨울 간식, 방한제품 등 매출 올린 효자상품
매출상승을 견인한 제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역시 전통적인 ‘겨울상품’의 인기가 눈에 띈다. 옥션에서는 겨울철 대표 간식거리인 샤니 밤맛만쥬나 고창 햇호박고구마 등 추운 날 집에서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간편조리식품의 판매량이 크게 증가했다.
패션카테고리에서는 강추위로 인해 때 아닌 복고바람이 불었다. 소위 ‘군밤모자’라 불리는 일명 ‘귀달이 모자’는 지난 1월 옥션에서만 하루 평균 200여개씩 팔려나가기도 했다. 또한 옥션에서는 수도관 등이 동파되는 사고가 이어지면서 수도배관을 녹이거나 동파를 방지해 주는 제품들도 지난 1월 하루 평균 300여개씩 판매됐으며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울 수 있는 눈삽, 넉가래, 빗자루 등 제설용품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20%가량 증가했다. 스노우체인, 부동액, 온열시트, 김서림방지제 등 겨울철 차량 관리 용품의 수요 역시 전년 동기(1월) 대비 33% 이상 높아졌다.
옥션 마트사업실 유수경 이사는 “올 겨울 이례적인 한파와 폭설로 인해 실내족이 늘어남에 따라 e몰이 덩달아 쇼핑 수혜를 입기도 했다”며 “특히 날씨와 관련된 상품들이 히트 상품에 대거 진입하는 등 날씨에 따라 상품별 매출 희비가 교차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Scene 5. 골프장&스키장, 동장군 이제 그만
전국의 골프장과 스키장은 동장군이 원망스럽다. 골프장의 경우 한파에 폭설까지 겹쳐 정상적인 영업이 어렵다. 대부분의 골프장은 휴장에 들어갔다. 일부 골프장은 제설작업을 하는 등 주말 정상 영업에 신경을 쓰기도 하지만 내장객들의 발길이 뜸하다. 따뜻한 남쪽도 예외는 아니다. 1월 내내 휴장하고 있는 골프장도 많다. 제주도의 경우 28개 골프장 중 절반이 넘는 골프장이 한 달 넘도록 문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다. 역으로 날씨를 이용하는 골프장들도 있다. ‘겨울온도 그린피’제도를 통해 날씨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 대표적인 곳이 인천 스카이 72골프클럽이다. 2월 중순까지 그린피 2만~3만원이 자동 할인되면서 영하 3도~0도는 1만원, 영하 6도~영하 3도는 3만원, 영하 6도 미만은 5만원을 더 할인해 주고 있다.
제철을 맞은 스키장도 의외로 썰렁하다. 이상한파로 개장일을 예전보다 앞당기며 대박을 기대했지만 올라갈 줄 모르는 수은주 때문에 이용객들이 발길이 뜸한 탓이다. 폭설로 내린 눈이 제대로 녹지 않아 코스 자체가 미끄러워 날이 풀린 후를 기약하는 이용객들도 적지 않다. 업계 추정 이용객 감소율은 6% 내외. 특히 주말은 가족 이용객이 줄어 타격이 크다. 그나마 오랜 추위로 폐장일이 늦춰지고, 지난해처럼 3~4월까지 눈이 내린다면 손실을 만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Scene 6. 따뜻한 곳으로 떠나자, 하나투어 최대 모객 기록
연이은 한파에 ‘방콕족’이 되기 싫은 ‘활동형’ 소비자들은 아예 해외로 떠나는 방향을 택했다. 하나투어는 지난 1월 창사 이래 최대 모객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그 동안의 기록은 2008년 1월 13만5000여 명이었다. 그러나 올 1월 역대 최대 모객 수보다 11.4%증가한 15만 명이 하나투어를 통해 해외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한동안 금융위기와 환율, 신종플루 등 해외여행을 꺼리게 하는 요소들이 해소된 덕도 있지만 낮은 기온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지역별 비중을 보더라도 동남아 지역이 34.7%, 일본이 30.9%, 중국이 21.9%, 유럽이 5%, 미주가 1.8%인 것을 보면 추운날씨를 피하고자 하는 고객들의 심리가 일부 반영됐을 가능성이 높다.
Scene 7. 때아닌 여름 음료 인기
전통적으로 맥주는 여름용 주류였다. 일반적으로 날씨가 추워지면 맥주보다는 소주와 같이 도수가 높은 주류를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근 GS25는 맥주, 이온음료와 같은 ‘여름 음료’의 판매가 늘었다고 발표했다. 지난1월, 전년 동기대비 맥주 매출은 17.1%가 늘었는데 이는 소주 매출 증가율인 11.1%를 앞지르는 수치였다. 특히 캔 맥주 매출이 26.3%증가했고 대표적인 여름 음료인 이온음료는 62.6%, 탄산음료는 39.3%로 늘었다. 따뜻하게 보관된 제품을 선호하는 두유의 매출증가율이 28%인 것에 비하면 높은 매출 상승이다. 심지어 아이스크림 매출도 34.1%상승했다. 이유가 뭘까. 업계는 오히려 한파가 이런 매출 상승을 이끌었다고 보고 있다. 강추위로 인해 바깥 활동을 피하려는 소비자들의 실내 활동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것. 대신 집안이나 사무실 등 따뜻한 곳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까운 편의점에서 간식을 구입했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