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제품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자동차 회사들도 개발을 끝낸 신차에 이름을 붙이는 데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 개발 단계에서 붙인 ‘프로젝트명’은 마치 아기들의 ‘태명’ 같은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태명을 털어내고 심사숙고해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자동차 회사들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이름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어떤 차의 이름은 고유명사처럼 단어로 붙어 있고, 또 어떤 차의 이름은 그냥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으로만 돼 있다. 현대차의 쏘나타와 그랜저, 폭스바겐의 골프와 비틀, 토요타의 프리우스와 캠리 등이 전자의 경우고 기아차의 K시리즈, 메르세데스-벤츠의 S시리즈와 E시리즈, BMW의 3시리즈와 5시리즈 등이 후자의 경우다.
고급차일수록 알파벳과 고유넘버?
제품의 이름 하면 명사로 붙이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왜 영문 이니셜과 숫자 조합으로 이름을 붙이는 회사가 있을까. 얼핏 단어로 붙이는 회사보다 무척 성의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앞의 분류를 대략 살펴보면 고급 브랜드로 알려져 있는 회사들이 주로 영문 이니셜과 숫자 조합으로 이름을 붙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아차는 고급 브랜드라고 하기 어렵고, 볼보의 경우 1995년에서야 지금처럼 영문 이니셜과 숫자 조합으로 간단명료하게 바꾸었기 때문이다.
영문 이니셜과 숫자 조합으로 모델명을 붙이는 데는 전략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물론 고급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것도 한 이유다. 또 브랜드를 기억하기 쉬우며 자동차의 급과 이름을 서로 연상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것도 큰 이유다.
영문 이니셜과 숫자 조합이라고 해서 결코 허투루 지은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기아차의 K시리즈에서 K는 ‘기아(KIA)’, ‘대한민국(KOREA)’, ‘강함, 지배, 통치’를 뜻하는 그리스어 ‘Kratos’, ‘다이내믹한 역동성’을 의미하는 영어 ‘Kinetic’ 등에서 따온 것이다. 뒤에 붙은 5, 7 등은 차급을 표시한다. 즉 5는 중형, 7은 준대형이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알파벳과 숫자 조합이 의미하는 바는 꽤 간단하다. 벤츠의 시리즈는 C, E, S로 구성돼 있다. C는 Compact(소형), E는 Executive(중형), S는 Super Salon(대형)을 가리킨다. 뒤에 붙은 숫자는 배기량을 뜻한다. 가령 C200은 소형 2000㏄, S500은 대형 5000㏄인 것이다.
BMW는 특이하게도 숫자로 차급을 표시한다. 또 숫자를 먼저 쓰고 뒤에 영문을 붙이는 것도 특징이다. 예를 들면 320i, 520d와 같은 식이다. 숫자 뒤에 붙는 i(ingection)는 가솔린 엔진을, d는 디젤 엔진을 탑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320i는 2000㏄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BMW의 소형 세단을, 520d는 2000㏄ 디젤 엔진을 탑재한 BMW의 중형 세단을 가리킨다. BMW 측은 “이 같은 네이밍 방식은 1916년 BMW 설립 때부터 해온 전통”이라고 말했다.
볼보 1995년에서야 영문 이니셜로 변경
모델명이 정립돼 있지 않았던 볼보는 1995년에 와서야 지금처럼 간단하게 알 수 있도록 모델명을 정리했다. 차량의 성격에 따라 라인업을 네 개로 나누고 그에 맞게 S, C, XC, V라는 영문 이니셜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볼보 측은 “사람들이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용이한 모델명이 필요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바꿔 말하면 그전까지는 일반인들이 다른 회사 모델들에 비해 볼보의 모델명을 부르기 어렵고 기억하기 쉽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셈이다.
푸조의 모델명은 독특하다. 푸조는 크기에 따라 1·2·3·4·6·8, 6개의 숫자를 매기고 바로 뒤에 숫자 0을 꼭 붙인다. 중간에 5와 7이 빠진 게 눈에 띈다. 푸조를 공식 수입하고 있는 한불모터스 측은 “5의 경우 예전에 단종이 됐다가 최근 다시 나오고 있다”며 “그러나 7은 왜 빠졌는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푸조의 모델명은 대개 세 자리로 구성돼 있는데 맨 뒤에 붙은 숫자는 이른바 ‘세대’를 뜻한다. 이를테면 모델명이 207이라면 소형차의 7세대 모델을 가리킨다.
렉서스는 모델명을 LS, GS, ES처럼 두 글자의 영문 이니셜로 구성하는 게 특징이다. LS는 Luxury Sedan을, GS는 Grand Touring Sedan을, ES는 Elegance Sedan을 의미한다. 뒤에 붙은 숫자는 배기량을 뜻한다. 이따금 영문 h가 붙는데, 이는 하이브리드를 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LS460h는 배기량 4600㏄ 하이브리드 럭셔리 세단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