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여행·부동산시장서 큰손 된 日 실버세대, 체력 감안한 여행 상품에 맞춤형 주택도
정욱 기자
입력 : 2019.05.13 10:57:36
수정 : 2019.05.13 10:57:51
일본 최대 여행사인 JTB는 지난 3월부터 ‘로열로드 프리미엄’ 버스 투어를 시작했다. 상품명에 로열과 프리미엄이란 단어가 붙은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고가의 호화 여행이다.
회사가 현재 홈페이지에서 모집 중인 여행 프로그램들만 봐도 가격을 재차 확인하게 될 정도다.
일본 전통 과자인 ‘와가시’ 노포 방문을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은 1박 2일에 1인당 17만8000엔(약 178만원)이 최저가다. 2인 1실 기준이다. 성수기, 1인 1실 기준이면 금액이 최고 27만8000엔까지 높아진다. 일본 중북부 식도락 투어는 5일간 1인당 48만~65만엔에 달한다. 이 정도 가격으로도 놀라울 뿐이지만 이는 그나마 저렴한 편이다.
홋카이도 해안을 도는 투어는 5박 6일에 110만엔이다. 하루에 대략 200만원인 셈이다. 저렴한 상품이라 생각하기 쉬운 버스 투어가 이처럼 비싸진 것은 버스부터 숙소까지 모두 최고급만 활용하기 때문이다.
버스는 통상 45인승으로 사용되는 것을 10인승으로 개조했다. 좌석수가 줄어든 만큼 넓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 뒷좌석에 사람이 있더라도 140도까지 좌석을 젖힐 수 있다. 좌석 위쪽에 있는 화물 보관 공간도 없앴다. 대신 통유리를 쓴 창문을 대폭 넓혔다. 버스 내부 사진을 보면 비행기 비즈니스석이나 퍼스트클래스석 못지않다. 기존에도 고급 버스 투어는 있었지만 도쿄 등 수도권에 위치한 간토지방 중심이었다. 4월부터는 오사카 등 간사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상품을 크게 늘렸다. 덕분에 JTB의 호화버스 투어 상품의 종류는 기존에 비해 3배 이상 많아졌다.
JTB뿐만 아니다. 한큐교통 역시 4월부터 ‘크리스털크루즈 스미레’라는 호화버스를 도입했다. 도쿄와 오사카를 거점으로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좌석이 18석인 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테리어는 JTB가 도입한 버스와 비슷하다. 한큐교통에서는 이 버스를 활용한 일본 일주 프로그램을 상품으로 내놨다. 11박 12일에 최저 98만엔이다. 1인 1실이면 여기에 20만엔을 더해 118만엔이 된다. 하루에 약 100만원이다. 이들 회사 외에도 클럽투어리즘 등 대형 업체들이 속속 호화 버스 투어를 내놓고 있다. 초호화 버스투어 상품이 빠르게 늘고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른바 ‘파워시니어’ 세대의 고령화 때문이다. 대표적인 세대가 일본의 베이비부머인 단카이 세대(1947~1949년생)다. 이들 대부분이 70대로 접어들었다. JTB종합연구소에 따르면 70대에 접어들면 대부분 해외 여행보다는 국내 여행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국내에서도 체력적으로 부담이 가는 여행은 쉽지 않다.
JTB의 ‘로열로드 프리미엄’ 버스 내부
▶호황 버스, 크루즈 여행 인기
다만 이들 세대의 여행에 대한 의욕은 여전히 높다. JTB종합연구소가 단카이 세대를 대상으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묻는 조사에서 ‘가족과의 여행’은 상위권에 올라있다. 여행은 가고 싶지만 체력이 부담스러운 사람이 늘어나다보니 호화 버스 여행 등이 늘었다는 분석이다. 마쓰다 세이지 한큐교통 사장은 “크루즈나 철도도 인기지만 버스 투어는 목적지 바로 앞까지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고령층을 중심으로 인기가 높다”고 설명했다. 젊은 층에서 저렴한 여행을 찾는 수요가 뚜렷해지면서 여행사들 입장에선 큰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이 때문에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고령층을 대상으로 한 상품이 급증하고 있다. 여행만이 아니다. 부동산 시장에서도 ‘파워시니어’의 위력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미쓰비시지쇼 레지던스는 올 1월 도쿄 남쪽의 가나가와현 아쓰기시에서 ‘더 파크하우스 혼아쓰기타워’를 분양했다. 22층에 총 164세대다. 1차 분양분 120세대 중 90%가량이 계약을 마쳤다. 눈길을 끄는 것은 최상층에 위치한 프리미엄세대다. 우리로 치면 펜트하우스에 해당한다. 천장 높이도 타 세대에 비해 5㎝ 이상 높였고 면적도 100㎡ 이상이다. 일본에서 아파트 면적 100㎡ 이상이면 넓은 축에 속한다. 고급 내장재 등을 썼다고는 하지만 3.2㎡(1평)당 450만엔이라는 가격을 붙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아쓰기시에서는 최고가임에도 프리미엄세대(총 6세대)가 가장 먼저 계약이 성사됐다. 프리미엄세대 외의 일반 세대도 전체적으로 비싼 분양가였지만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회사 측에서는 계약자 중 60세 이상의 비율이 25%에 달했다고 소개했다. 아쓰기시의 단독주택에 살던 고령자들이 기존 주택을 팔거나 자녀에게 증여한 뒤에 이곳으로 옮겨오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통상 고령자가 되면 이사를 하지 않는다는 상식을 뒤집는 결과다.
기존에 비해서 건강한 노령자들이 늘면서 부동산 시장에 새로운 실수요자로 등장했다는 것이 관련업계의 분석이다. 일례로 후생노동성이 3년 단위로 발표하는 건강에 특별한 문제없이 생활이 가능한 ‘건강수명’은 가장 최근 조사인 2016년 기준으로 남성이 72.14세, 여성이 74.79세다. 직전 조사였던 2013년에 비해 남은 0.95세, 여성은 0.58세가 높아졌다. 미쓰비시지쇼 레지던스 측에서는 “하코네와 가깝고 공항에서도 멀지않은 데다 지하철역까지 도보 1분 정도 거리라 고령자들의 선호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하코네는 도쿄 인근의 유명 온천지역이다.
최근 분양한 곳에서는 대부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난다. 특히 단카이 세대가 젊은 시절 살던 곳이 주로 교외인 탓에 인근 지역에서 신규 분양하는 좋은 물건은 고령층의 비율이 높다.
도큐부동산이 지난해 12월 요코하마시에서 판매한 ‘브란즈타워 오오후네’도 고령자들이 주 고객이었다. 항구인 요코하마의 특성에 맞춰 건물 모양을 대형 선박 모양으로 만든 빌딩이다. 총 253세대 중 1차 분양분 113세대는 모두 계약을 마쳤다. 회사 측도 놀란 것은 모델하우스 내방객의 연령대다. 60세 이상이 30%, 50대도 20%를 넘었다. 고령자들이 몰린 것은 입지 영향이 컸다. 총 6개 열차·지하철 노선이 겹치는 오오후네역과 바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회사 측에서는 “고령자 고객들로부터 주변에 편의시설이 많고 교통이 편해 자녀들이나 손자,손녀가 오기 쉬울 것 같아 사기로 했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전했다.
스미토모부동산이 도쿄 서부의 고쿠분지에서 분양한 ‘시타타워 고쿠분지 더 트윈’ 역시 전체 583세대 중 분양받은 사람의 33%가 60세 이상이다. 고쿠분지역과 연결되는 건물이란 점이 인기 비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