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류시장에 지각 변동이 일고 있다. 기존과는 성분이 다른 새로운 종류의 술이 등장해 소비자들로부터 열광적인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열풍의 중심에는 알코올 도수가 낮은 이른바 ‘저도주’가 자리 잡고 있다.
주류업체들이 조금이라도 더 순하고 부드러운 술을 내세워 젊은층이나 여성 등 기존에 술과 다소 거리를 두던 소비자들까지 대거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새콤달콤 과일, 소주시장 점령
저도주 열풍은 크게 소주와 양주 부문에서 나뉘어 나타나고 있다. 소주의 알코올 도수가 낮아지기 시작한 건 이미 2~3년 전부터 일어난 일이지만 올해 들어서는 이 저도주 시장에 완전히 색다른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리큐르’라는 이색 주류가 등장한 것이다. 일명 칵테일소주로도 불리는 이 리큐르는 엄밀히 말해 소주가 아니다. 주세법상 소주 원액을 100% 쓰지 않으면 기타주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리큐르는 소주 원액에 과즙을 넣어 새콤달콤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알코올 도수는 더욱 낮아 13~14도까지 내려간다.
그 포문은 롯데주류가 열었다. 올해 3월 ‘순하리 처음처럼 유자맛’을 내놓은 것이다. 이후 경쟁 소주업체들마다 잇따라 과일맛 리큐르를 내놓으면서 대한민국 음주문화마저 뒤바꿔 놨다.
유자, 석류, 블루베리, 자몽, 복숭아 등 여러 과일이 내는 맛은 여성과 젊은층에게 크게 어필했다. 평소 술이 약하던 이들도 그 같은 과일맛 칵테일 소주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 이젠 회식 자리에서도 이들 술은 누구나 다 마실 수 있는 최고의 ‘단합용 술’로 떠올랐다. 또 예전과 달리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라는 강력한 전파수단을 통해 이들 제품이 ‘없어서 못 사는 술’, ‘특이한 술’로 인식되면서 품귀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일맛 칵테일 소주의 알코올 도수 13~14도는 와인(15~16도)보다도 더 낮다. 이 도수에서 과일맛이 가장 좋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롯데주류는 부산을 중심으로 올해 3월 순하리를 출시한 뒤 2개월 만에 1000만병, 100일 만에 4000만병을 판매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게 된다.
비록 2006년 두산주류가 내놓은 ‘처음처럼’의 100일간 6300만병 판매엔 못 미치지만 처음 두 달 판매가 부산·경남 지역에서만 이뤄진 걸 감안하면 예사롭지 않은 기록이다. 롯데는 2013년 하반기부터 4000명이 넘는 소비자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여 기존 소주 제품의 단점을 파악한 뒤 순하리를 개발해 냈다.
롯데주류 내부에서도 애초 이 제품에 큰 기대를 걸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예상 외로 20~30대 젊은 소비자들이 기존과 다른 맛의 소주가 같은 소주병에 담겨 과하지 않은 가격에 나온 데 열광했다. 롯데주류 관계자는 “과일맛 칵테일 소주 시장이 기존에 없던 건 아니다”고 전제하면서 “순하리 성공 뒤에는 ‘기존 소주병’을 그대로 적용해 거부감을 줄였고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출시한 전략도 먹혀들었다”고 말했다.
특히 롯데는 7월 중순에 신제품 ‘순하리 처음처럼 복숭아’까지 들고 나왔다. 기존 유자맛은 병이 아닌 파우치에 담아 들고 다니면서 마실 수 있도록 한 신제품 ‘순하리 처음처럼 파우치’로도 출시됐다.
부산 소주시장 1위인 무학도 리큐르에 가세했다. ‘좋은데이 컬러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레드(석류)’, ‘스칼렛(자몽)’, ‘옐로(유자)’, ‘블루(블루베리)’에 이어 지난 7월 초에는 여름과일 복숭아 맛의 ‘핑크’까지 내놨다. 무학은 부산·경남 소주시장의 65%, 전국 시장의 12%가량을 점유했지만 수도권에서는 점유율이 1%에도 못 미칠 정도로 고전했다. 하지만 이번 컬러시리즈를 바탕으로 수도권 진입 확대를 위한 교두보도 마련했다.
금복주도 지난 5월 말 유자·자몽·블루베리 농축액을 첨가한 ‘상콤달콤 순한참’ 시리즈를 출시했다. 대선주조는 6월 초 자몽맛의 ‘시원블루 자몽’과 마테잎차·벌꿀을 넣은 ‘시원블루 로즈’를 내놨다. 여기에 국내 소주시장 1위 업체이자 전통 소주 명가인 하이트진로도 뛰어들었다. 6월 중순에 ‘자몽에 이슬’을 내놓은 것이다. 처음엔 하이트진로도 리큐르 인기가 한때 지나가는 열풍 정도로 여겼지만 그동안 꾸준히 있어왔던 저도주 경쟁이 과일맛 리큐르로 옮겨 붙는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후속 제품을 개발·출시했다. 자몽에 이슬은 출시 단 3일 만에 160만병을 팔아치웠다. 경쟁자인 순하리가 워낙 강력했던 점을 감안하면 성공적인 론칭이라고 볼 수 있다.
하이트진로 측은 “자몽에 이슬이 자사 주력 상품은 아니어서 생산량으로만 따지면 순하리의 절반에도 못 미칠 것”이라면서도 “소비자 평가는 자몽에 이슬이 순하리보다 더 좋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이에 대해 롯데주류 관계자는 “하이트진로 측이 SNS를 통해 소비자 반응을 자체 조사했다고 하는데 그런 통계는 낼 방법도 없다”며 “나온 지 얼마 안 된 자몽에 이슬이 현재 순하리의 비교대상이라고는 보지 않고 있다”고 반박했다. 업계 선두그룹 내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잘 알 수 있다.
다만 순하리 처음처럼이 선발주자인 만큼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고른 호평을 얻고 있는 반면 자몽에 이슬은 여성 소비자들의 지지가 더 높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아무래도 알코올 도수 14도인 순하리보다는 나중에 출시된 자몽에 이슬이 13도로 도수가 낮고 단맛이 덜해 젊은 여성들 선호도가 높다는 분석이다. 하이트진로 측은 자몽에 이슬의 인기에 현재까지 서울과 수도권 음식점·주점에만 공급하던 이 술을 가정용으로 점차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그러나 소주 업계에서도 과일맛 소주 열풍을 보는 시각은 미묘하게 엇갈리고 있다. 소비자들 소주 입맛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마케팅 효과에 의한 일시적 인기일 수 있다는 신중론도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는 업체가 바로 보해다. 이 회사는 미투(모방) 제품 대신 깔끔한 정통 소주를 고수하고 있다. 다만 보해도 저도수가 대세인 점을 고려해 17.5도 제품을 주력으로 내세웠다.
주피터 마일드블루 17, 골든블루 20 더서미트
▶40도 벽 잇따라 무너뜨린 양주
소주 못지않게 점입가경으로 경쟁을 펼치고 있는 곳이 바로 양주업계다. 국내 위스키업계 2위로서 그동안 다른 업체와 달리 알코올 도수 40도 이상 스카치 위스키만 고집해 왔던 페르노리카코리아는 7월 중순 저도 양주 신제품을 전격 출시하며 경쟁 대열에 합류했다. 특히 페르노리카는 기존 저도 양주보다 더욱 낮은 도수 제품을 내세워 국내 첫 ‘여성용 양주’를 표방하고 나섰다.
페르노리카코리아 신제품은 자사 대표 위스키 ‘임페리얼’ 원액을 사용해 만든 ‘에끌라 바이 임페리얼’이다. 이 제품은 스코틀랜드산 임페리얼 위스키 원액 99.88%에 석류향 0.12%를 섞어 만든 것으로 역시나 현행 주세법상 위스키가 아닌 기타주류(주정드링크)에 속한다. 국내 위스키업계 1위 디아지오코리아가 올해 3월 윈저 원액에 솔잎·대추·무화과 추출액 등을 넣어 만든 35도짜리 주정드링크 ‘윈저 더블유 아이스’처럼 페르노리카도 자사 대표 원액에 과일향을 첨가해 신제품을 내놓은 것이다.
특히 에끌라 바이 임페리얼의 알코올 도수는 무려 31도로 기존 저도 양주(35~36.5도)보다도 훨씬 낮다. 이 제품을 잔에 따르면 석류향이 물씬 풍겨날 뿐 아니라 맛도 달콤하다.
무엇보다 이 술이 국내 첫 여성용 제품으로 나왔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낮은 알코올 도수와 달콤한 맛 외에도 제품을 담은 병이 유선형으로 디자인돼 있어 흡사 커다란 화장품이나 향수 병을 연상시킨다. 페르노리카코리아는 지난 2009년부터 여성 전용 제품 개발 계획을 수립한 뒤 다양한 시장조사를 펼치는 등 지난 5년간 연구·개발을 거쳤다고 밝혔다. 장 마누엘 스프리에 페르노리카코리아 대표는 “그동안 저도 양주 신제품이 많이 나왔고 한국 시장에서 이들 제품 인기가 급격히 상승했지만 정작 부드러운 양주를 좋아하는 여성 전용 제품은 개발되지 않았다”며 “여성들이 좋아하는 과일인 석류를 이용하고 병 모양에도 차별화를 시도한 건 바로 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페르노리카코리아는 저도 위스키 열풍 속에서도 40도 이상 정통 스카치 위스키만 고수해 왔지만 역시 저도주 바람을 무시할 수 없었다. 지난 2009년 말 국내 최초 40도 미만(36.5도) 위스키로 나온 ‘골든블루’ 이후 국내 저도 양주 시장은 급격히 성장했다. 젊은층과 여성 소비자를 중심으로 더욱 순하고 부드러운 위스키가 선호되면서 저도 양주는 독보적인 매출 상승세를 기록해 왔다.
실제로 국내 위스키 전체 출고량은 지난해까지 6년 연속 감소세를 걸을 정도로 불황을 겪었지만 저도 위스키는 승승장구했다. 올해 1분기 위스키 출고량이 지난해 1분기 때보다 늘어난 제품은 골든블루가 유일했다.
올해 3월 부산·영남 지방에서 출시된 디아지오코리아의 윈저 더블유 아이스도 첫 3개월간 판매량이 디아지오코리아 측 예상보다 2배가량 더 높게 나오자 이달 초부터 제주지역으로도 판매지가 확대됐다. 이를 바탕으로 이르면 내년 초 서울·경기권에도 윈저 더블유 아이스가 본격 출시될 전망이다. 특히 디아지오코리아는 이번 윈저 더블유 아이스 판매 확대를 계기로 종합 주류회사로 커갈 방침도 밝혔다.
조길수 디아지오코리아 사장은 “현재 수입하고 있는 보드카·진 등 각종 증류주를 비롯해 기네스 등 수입맥주 판매도 늘려 2018년까지 윈저뿐 아니라 다른 주류 분야에서도 업계를 장악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3월 롯데주류도 ‘주피터 마일드블루’를 주정드링크 형태로 새롭게 개편한 35도짜리 ‘주피터 마일드블루 17’을 출시했다. 이후 이번에 페르노리카까지 가세하면서 국내 양주업계 저도주는 디아지오·페르노리카·롯데·골든블루의 4파전 양상으로 펼쳐지게 됐다. 여기에 기존 싱글몰트(보리맥아 100%) 위스키 업계도 저도주 경쟁에 뛰어들고 있어 주목된다.
국내 싱글몰트 1위 ‘맥캘란’은 43도짜리 ‘셰리오크’ 18·25·30년산에 이어 지난 4월 이보다 3도 낮은 40도짜리 12년산을 한국 시장에 출시했다. 세계 싱글몰트 1위 ‘글렌피딕’을 내놓고 있는 윌리엄그랜트앤선즈코리아도 글렌피딕과 완전히 다른 브랜드를 통해 오는 11월 40도 미만 위스키 또는 주정드링크를 한국 시장 전용 제품으로 출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