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일대를 다니다 보면 유난히 빨간 간판을 한 은행 지점이 눈에 자주 띈다. 말레이시아계 금융그룹인 CIMB(Commerce International Merchant Bankers Bhd)의 점포다. CIMB는 올해 초 한국에서 증권 업무를 시작하며 진출했다.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전 세계 뱅커들은 CIMB 그룹을 주목하고 있다. 놀라운 성장세 때문이다.
CIMB의 지난해 순이익은 1조6095억원(1링깃=370원 기준)으로 우리금융(1조5836억원), 하나금융(1조6024억원)보다 많았다. 국내 금융지주사들의 순이익이 ‘저금리 저성장’ 기조에 계속 감소하고 있지만 아시아 신흥국 은행들은 두 자릿수로 성장하고 있어 이런 역전 현상은 올해 더 커질 전망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CIMB의 자산 대비 이익이다. CIMB그룹의 지난해 말 기준 자산은 124조7270억원. 국내 4대 금융그룹의 3분의 1 사이즈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익 규모는 비슷하다. 3배 이상 효율적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 이야기다. 해외 수익 숫자를 보면 입이 더 벌어진다. 인도네시아 등 금융시장이 급격히 커지고 있는 국가에 일찍이 진출했기 때문이다.
CIMB는 지난해 말레이시아가 아닌 국가에서 6599억원을 벌었다. 전년대비 22.9% 늘어난 규모다. CIMB는 해외수익 비중이 같은 기간 36%에서 41%로 커졌다. 국내 은행들은 이 비중이 한 자리수대에 그치고 있다.
최동수 전 조흥은행장은 “국내 은행들은 해외 지점에 한국인 지점장을 보내고 본사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 한글만 쓰는 경우가 많다”며 “이렇게 해서 어떻게 글로벌화가 이뤄지겠냐”고 말했다. 최 전 행장은 “과감하게 해외지점장을 현지인으로 채용하고 영어 문서를 공용화 해야 한다”며 “이렇게 해야 현지에 우수한 인재들이 꿈을 갖고 한국계 금융사에 취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CIMB그룹은 명문가 집안 출신인 나지르 라작이 이끌고 있다. 그는 5월 치러진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승리해 정권을 이어가게 된 나집 라작 총리의 막내 동생이다. 이들의 아버지는 말레이시아 건국 지도자 중 한 명이자 제2대 총리를 지낸 압둘 라작 후세인이다. 국가 차원에서 힘이 실리는 금융그룹임을 알 수 있다. 4만2000여명을 고용하고 있는 CIMB그룹은 머지않아 씨티, HSBC와 같은 세계적인 금융그룹으로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다.
특히 CIMB는 세계 최대 규모 이슬람금융 업체다. 이슬람금융 규모가 급성장 중임을 고려하면 성장은 시간의 문제다.국내 금융그룹과 수준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질 것 같다.
CIMB와 함께 눈여겨봐야 할 아시아 신흥국 금융그룹이 하나 더 있다. 역시 말레이시아계인 메이뱅크라는 은행이다.
창피한 사실이 또 하나 있다. 우리나라 11개 은행들이 지난해 해외에서 벌어들인 총 수익이 메이뱅크 1개 은행의 해외 수익보다도 적다는 점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은행 국외 점포의 당기순이익이 6억3620만달러(7125억원)로 전년 대비 11.8% 감소했다. 유가증권 이익 감소 등으로 비이자 이익이 5180만달러 감소하는 등 수익성이 악화됐다. 지난해 가장 많은 이익을 낸 신한금융의 순이익은 2조3227억원으로 메이뱅크(2조9193억원)에 뒤졌다. 메이뱅크는 지난해 해외에서 전년보다 44% 늘어난 8816억원을 벌어들였다. 2011년에는 전체 순이익의 24%가 해외에서 나왔지만 2012년에는 30.2%로 올라갔다. 이렇게 일찍이 아시아 신흥시장에 진출한 아시아계 은행들은 과실을 차곡차곡 챙겨가고 있다.
이들 금융그룹들이 승부를 걸고 있는 시장은 인도네시아다. 자카르타의 중심 상업지구인 수디르만 CBD(Central Business District)는 인도네시아 증권거래소(IDX)를 비롯해 세계적인 금융사들이 밀집한 곳이다.
이곳에서 글로벌 은행들의 진출 경쟁은 시간이 갈수록 더 격해지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120개 은행 중에 외국계 은행은 46개에 달한다.
지난 2년간 인도네시아 총 은행 지점 수는 20% 증가해서 1만6625개(2012년 말 기준)에 달한다. 외국계 은행이 경쟁적으로 숫자를 늘린 영향이다. 외국계의 점포 수 기준 점유율은 2010년 30%(6814개)에서 지난해 32%(7840개)로 늘어났다. 2년간 1024개의 지점을 늘린 셈이다.
CIMB의 인도네시아 합작법인인 CIMB-니아가(Niaga)는 지난해 전년대비 24%나 늘어난 12조8800억루피(약 1조50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전년대비 24%나 늘었다. 전체 영업이익의 약 30%를 인도네시아에서 벌어들였다.
CIMB-니아가은행은 1955년 설립된 니아가은행이 모태다. 아시아 금융위기가 닥치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 은행의 대주주가 됐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은행 구조조정과 유사한 수순이다. 단 차이가 하나 있다. 조기에 외국계 자본에 매각됐다는 점이다. 2002년 CIMB그룹은 IBRA(인도네시아은행 구조조정청)로부터 경영권을 사들였다. CIMB는 황금의 땅에서 강력한 지역기반을 가진 은행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세계 4위, 인구 2억5000만명을 가진 인도네시아가 견실하게 성장하며 금융산업도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급격한 성장에는 성장통이 따르지만 아직 그런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CIMB-니아가는 급격한 성장을 했지만 부실채권비율이 2011년 2.64%에서 2012년 2.29%로 오히려 떨어졌다.
CIMB그룹의 해외 진출은 국내 금융사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래를 내다본 과감한 해외 진출, M&A를 통한 철저한 현지화 등에서 국내 금융사보다 한참 앞서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CIMB는 지난해 영국계 RBS의 아시아 사업부문, 필리핀 커머셜뱅크를 사들였다. 이미 투자은행업 분야에서는 동아시아 1위 자리에 올랐다. 토니 프라세티안토노 인도네시아 가자마다대(UGM) 교수는 매일경제와 인터뷰에서 “인도네시아 금융산업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 과정을 거쳐 성장 궤도에 올랐다”며 “인도네시아에서 금융, 광업, 통신은 3대 고소득 직종으로 인재들이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현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국내에서 전당포 같은 영업만 하고 있을 것인지. 따뜻하게 안방 시장에 안주했던 대가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시아 신흥국 시장 진출에 대한 새로운 전략 수립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