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기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이제 반도체를 넘어 모델 수출을 통제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클로드’를 개발하는 앤트로픽은 지난 6월 당시 기준 역대 최고 성능의 모델인 ‘클로드 페이블5’와 ‘클로드 미토스5’를 공개했다.
보안 연구용 모델인 미토스5는 승인된 기관에만 공개됐지만 페이블5는 일반 사용자에게도 제공됐다. 일반 사용자들은 ‘차원이 다른 성능’이라고 입을 모으며 페이블5 사용을 시작했지만, 사용자들의 감탄은 72시간 만에 멈췄다. 초유의 AI 모델 셧다운 사태다.
배경에는 미국 정부가 있었다. 미국 상무부가 두 모델에 대해 “미국 안팎의 모든 외국인 접근을 차단하라”는 수출 통제 명령을 내린 것이다.
기존에도 미국은 중국의 첨단 AI 개발을 막기 위해 엔비디아의 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 수출을 금지해왔는데, 이제는 AI 모델 또한 수출 통제 대상에 오른 것이다. 미국 정부는 해외 이용자들이 첨단 AI 모델의 안전장치를 우회해 정보를 빼가거나 사이버 공격에 악용하는 것을 우려했다.
앤트로픽이 지난 6월 9일 공개한 페이블5 모델과 미토스5 모델은 전 세계 최고 성능으로 꼽히는 모델이다.
사이버 보안 영역에서 활용이 가능한 ‘미토스5’는 처음부터 앤트로픽이 지정한 소수의 파트너인 ‘프로젝트 글래스윙’ 참여사에만 공개됐으며, 페이블5는 미토스5급의 성능을 제공하면서도 안전장치를 강화해 일반 사용자에게 배포된 모델이다.
미국 정부가 외국인 대상으로 접속을 금지하는 초강수를 던진 것은 중국, 러시아 등 다른 국가들이 해당 모델들을 군사적인 목적으로 악용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CEO)에게 보낸 서한에 서 우려 국가들의 군사정보 관계자들이 모델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지적하며 전 세계 모든 나라와 장소의 모든 외국인에게 모델 접속 금지를 명령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번 조치의 발단이 된 것은 페이블5에서 발견된 모델 악용 취약점이다. 아마존 연구진은 특정 프롬프트를 입력함으로써 모델을 탈옥해 취약점 관련 정보를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취약점은 이후 백악관 고위 당국자들에게 전달됐고, 이후 미 당국은 수출 통제를 대응책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 같은 통제는 일회성 해프닝이 아닌, AI 패권 경쟁 시대의 새로운 뉴노멀로 자리 잡는 모양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간 기업들이 첨단 모델을 출시하기 전 정부와 기술을 공유해 역량을 평가받도록 하고, 정부가 선별한 파트너에게 우선 제공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모델 선검토 조치의 첫 적용 대상은 앤트로픽의 라이벌로 꼽히는 오픈AI다. 백악관은 오픈AI의 차세대 모델인 GPT-5.6 공개를 앞두고 오픈AI에 제한 출시를 직접 요청했다.
이에 따라 오픈AI는 6월 26일 GPT-5.6 모델 3종을 발표하면서 정부 승인을 받은 약 20개 미국 기업에만 해당모델의 응용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 접근을 허용했다. 승인된 기업들은 모두 미국 기반 기업으로, 첨단 모델인 만큼 일반 공개 이전에 악용 가능성을 승인된 기업 중심으로 점검하겠다는 취지다.
이후 오픈AI는 이 같은 검증 절차를 거쳐 7월 9일 GPT-5.6 모델을 정식 출시했다. 일부 기관 대상 선공개 이후 약 두 주 만이다.
오픈AI는 앞서 정부의 선공개 조치에 대해 “정부 승인 절차가 장기적인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반대하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지만, 샘 올트먼 오픈AI CEO는 이후 “그 과정이 이해하기 쉽고 공정하며 신속하기만 하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며 “다음 모델을 개발할 때는 훨씬 더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며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앞서 기업들은 민간의 소프트웨어 출시를 정부가 검열하는 것에 반발해왔지만, 정부의 강력한 조치로 인해 ‘선 정부 검토, 후 출시’ 절차가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서는 미국 정부의 강력한 모델 통제는 미국 AI 모델의 성능을 바짝 쫓고 있는 중국의 추격을 의식한 행위라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이 같은 조치가 실질적으로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는 효과가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중국 기업들은 미국의 수출 통제 조치에 정반대의 행보로 대응했다. AI 모델들을 누구나 내려받아 사용할 수 있도록 오픈소스 플랫폼에 공개한 것이다.
대표적인 기업이 ‘제2의 딥시크’로 꼽히는 중국의 즈푸AI(Z.ai)다. 앤트로픽 모델 수출이 금지된 다음 날 즈푸AI는 “지능은 개방되어야 하며 누구나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자사의 최신 모델 ‘GLM-5.2’를 발표했다. 또한 해당 모델을 상업적인 이용까지 가능한 MIT 라이선스를 적용해 개방했다.
특히 GLM-5.2가 주목받은 것은 단순히 누구나 내려받을 수 있는 모델이어서만은 아니다.
해당 모델은 주요 벤치마크 테스트에서 앤트로픽, 오픈AI에 견주는 성능을 기록하면서도, 비용은 5분의 1 수준이어서 실리콘밸리로부터 ‘제2의 딥시크 모멘트’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CNBC는 당시 이에 대해 “앤트로픽과 오픈AI가 붙잡혀 있는 사이, 즈푸AI가 미국 최상위 모델을 추격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GLM-5.2 공개 이전에도 중국 기업들은 폐쇄형 모델 전략을 추진하는 미국 기업들과 대비적으로 오픈소스 전략을 적극 추진해왔다.
자사 모델을 다른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개방하면, 해당 모델을 활용하려는 수요 확보와 함께 개발 생태계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 이미 방대한 사용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미국 기업과 경쟁하기 위해, 중국 기업들은 ‘누구나 모델을 써보게 하는’ 전략으로 빠르게 생태계를 구축해온 것이다.
중국 알리바바가 개발하는 ‘큐원(Qwen)’ 모델은 전 세계 오픈소스 AI 생태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모델로 자리 잡았으며, 지난해 저비용 고성능 모델로 이름을 알렸던 딥시크는 올해 4월 새로운 모델인 ‘딥시크 V4 프리뷰’를 오픈소스로 공개하기도 했다.
이미 중국은 오픈소스 모델 생태계에서는 미국을 넘어섰다. 글로벌 AI 플랫폼 허깅페이스에 따르면 지난 2025년 2월부터 올해 2월까지 전체 오픈소스 AI 모델 다운로드 비중에서 중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41%로, 미국(36.5%)을 앞질렀다.
수출 통제가 중국의 추격을 늦출 수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도 나온다. 이미 미국 모델에 근접한 성능의 중국산 모델이 오픈소스로 전 세계에 침투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모델을 묶어두는 것이 오히려 자국 기업들의 시장점유율 확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미국 정부에 의해 차단될 수 있는 모델을 이용하기보다, 내려받아 쓸 수 있는 중국의 공개 모델을 이용하는 시나리오가 대표적이다.
마틴 초르젬파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공개 기준이나 동맹국에 대한 예외가 없는 미국의 급작스러운 통제는 오픈웨이트로 공개되는 중국 모델들의 국제적인 활용을 오히려 촉진할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통제의 기술적인 한계도 지적됐다. 엔비디아 GPU 수출 규제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딥시크와 즈푸AI가 미국 빅테크 모델에 견주는 기술을 개발해낸 것처럼, 소프트웨어 접근을 막는다고 해서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 라는 판단은 허점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중국의 움직임이다.
개방 전략으로 AI 생태계를 키워온 중국도 최근 당국에서 첨단 모델 통제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중국 상무부는 알리바바, 바이트댄스, 즈푸AI 등과 만나 자국 최첨단 AI 모델의 해외 접근을 제한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중국 역시 자국의 첨단 AI 기술이 국가 안보 위협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을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중국은 오픈소스 규제 관련 회의에서도 기본적인 오픈소스 기술은 간단한 신고를 거쳐 공개하되, 고급 기술은 보안 심사를 거치고, 가장 민감한 프런티어 모델은 아예 공개를 금지하거나 국내용으로 묶어두는 3단계 체계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출 통제 사태에서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로젝트 글래스윙에 합류해 미토스 접근권을 부여받았던 한국 기업들도 수출 통제와 함께 접근권을 회수당했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삼성전자, SK하이닉스, SK텔레콤 등이 대표적이다. 동맹국의 신뢰받는 파트너 조차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 과정에서 국내에서는 AI 주권을 강조하는 ‘소버린 AI’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불붙고 있다. AI 접근이 언제든지 끊길 수 있는 상황에서, 해외 AI에만 의존하는 것은 리스크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국산 모델들은 오픈AI, 앤트로픽과 큰 성능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체 모델 개발을 포기할 수 없다는 주장도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김성훈 업스테이지 대표는 간담회에서 “AI가 단순한 서비스나 도구가 아니라 국가 전략 자산이 된 시대”라며 “기술을 보유한 나라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공급을 끊을 수 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정부가 ‘AI 3대 강국’을 목표로 추진 중인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에도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LG AI연구원, SK텔레콤, 업스테이지, 모티프테크놀로지스 등이 참여해 토종 모델을 개발하고 있으며 8월 중 2차 평가가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장기적으로 소버린 AI 전략은 단순히 자체 모델 확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센터 등 AI 가치사슬 전반을 고려해 설계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AI 활용 범위가 단순 챗봇을 넘어 에이전트, 피지컬 AI로 확장되는 만큼, 국가 차원에서 AI 기술 확보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는 모양새다.
[정호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