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SK하이닉스 임직원들의 성과급이 지급되자 직원들의 급여통장 뿐 아니라 증권사와 은행의 퇴직연금계좌에도 큰돈이 움직였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 직원 약 3만 명이 근속연수에 따라 성과급의 10~50%를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계좌에 적립했고, 이렇게 이동한 자금이 1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세밀하게 살펴보면 기존 퇴직급여를 모두 확정기여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기본 퇴직급여는 확정급여형의 틀을 유지하면서 경영 성과급 일부만 DC 계좌에 넣을 수 있도록 한 혼합 구조다.
확정급여형(DB)은 퇴직할 때 받을 금액이 임금과 근속기간을 바탕으로 정해지고 회사가 운용 책임을 지는 제도다. 반면 확정기여형은 회사가 부담금을 넣은 뒤 근로자가 직접 상품을 선택하며 운용 결과도 가입자에게 돌아간다.
임금상승률이 높고 장기근속 가능성이 큰 직장인은 DB의 장점을 쉽게 포기하기 어렵다. 기본 퇴직급여는 DB에 남기고 성과급만 DC로 돌리는 방식은 이런 직장인에게 안전판과 운용 자율성을 동시에 제공한다.
기업의 보상 경쟁도 달라질 수 있다. 과거에는 성과급을 얼마나 지급하느냐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현금, 주식 보상, 퇴직연금 가운데 어떤 선택지를 제공하고 어느 금융회사의 상품과 상담 서비스를 붙이느냐까지 보상제도의 일부가 된다. 금융회사에는 더 큰 기회다. 한 번 유입된 성과급은 수십 년 동안 계좌에 남을 수 있고, 고액 성과급을 받는 직원을 장기 고객으로 확보하는 효과도 있다. 은행·보험사 중심이던 기업 퇴직연금 시장에 증권사들이 ETF와 모바일 운용 편의성을 앞세워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배경이다. 다만 모든 직원에게 같은 선택이 유리한 것은 아니다. 주택 구입이나 교육비처럼 가까운 시기에 큰돈을 써야 하는 직원, 비상자금이 부족한 직원에게는 세제 효과보다 현금 유동성이 중요할 수 있다. 성과급 DC는 무조건 선택해야 하는 복지제도가 아니라 세금, 근속기간, 투자 경험과 생활 계획을 함께 따져야 하는 선택지다.
회사의 퇴직연금 규약에 따라 성과급이 DC 부담금으로 적립되면 일반 근로소득으로 현금을 지급받는 시점의 과세를 퇴직 시점까지 미루는 구조가 가능하다. 나중에 돈을 받을 때는 근속연수 등을 반영하는 퇴직소득 과세체계가 적용될 수 있다.
혜택의 본질은 면세가 아니라 과세이연이다. 지금 낼 세금을 나중으로 미루고 그 금액까지 장기간 투자할 시간을 얻는 것이다. 반면 성과급을 이미 현금으로 받은 뒤 개인형퇴직연금에 넣는 경우는 구조가 다르다.
현금으로 받는 순간 발생한 근로소득세가 취소되지는 않는다. 개인이 연금저축과 IRP 등에 납입한 금액 가운데 일정 한도가 연말정산 세액공제 대상이 되는 별도의 혜택을 활용하는 것이다.
연금계좌에는 원칙적으로 연간 1800만원까지 납입할 수 있고, 연금저축과 IRP 등을 합친 세액공제 대상 한도는 최대 900만원이다. 따라서 회사가 성과급을 DC 부담금으로 넣는 것과 개인이 세후 성과급을 IRP에 넣는 것을 같은 절세 방법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주식 수익금도 마찬가지다. 일반 증권계좌에서 주식을 매도해 얻은 현금을 연금계좌로 옮길 수는 있지만, 이미 발생한 배당이나 매매차익 관련 세금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연금계좌에 들어간 뒤 새로 발생하는 이자·배당·운용수익의 과세 시점을 늦추는 효과가 생긴다. 주식 수익금을 연금으로 활용하는 전략은 과거의 세금을 지우는 방법이 아니라 이미 확보한 현금을 장기 노후자산으로 재배치하는 방식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절세 효과만 보고 돈을 모두 연금계좌에 묶는 것도 위험하다”고 조언한다. 연금계좌는 생활비 통장이나 비상금 계좌가 아니며 중도 인출 사유가 제한된다. 세액공제를 받은 돈을 연금 외 방식으로 꺼내면 추가 세금이 발생할 수도 있다.
초보자는 성과급을 받자마자 연금계좌부터 채울 것이 아니라 최소 수개월 치 생활비와 가까운 시기의 목돈 수요를 먼저 떼어두는 편이 안전하다. 남은 돈 가운데 장기간 사용하지 않을 수 있는 금액만 연금계좌로 옮겨야 세제 혜택이 유동성 부족이라는 비용으로 되돌아오는 일을 피할 수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의 ‘2025년 우리나라 퇴직연금 투자백서’에 따르면 2025년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4000억원으로 처음 500조원을 넘어섰다. 이 가운데 DB형은 228조9000억원, DC형과 기업형 IRP는 141조6000억원, 개인형 IRP는 130조9000억원이었다. DC와 IRP를 합치면 전체의 54.3%다. 퇴직연금의 절반 이상이 회사가 책임지고 굴리는 자금에서 근로자가 상품을 선택하고 결과를 부담하는 자금으로 바뀌었다는 의미다.
ETF는 이 변화의 가장 눈에 띄는 상징이다. 퇴직연금 계좌에서 ETF에 투자된 금액은 48조7000억원으로, 실적배당형 적립금의 약 40%를 차지했다. 국내외 주식과 채권에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분산투자할 수 있고 보유 자산과 가격을 확인하기 쉽다는 점이 직장인들의 선택을 끌어냈다.
그러나 퇴직연금 500조원이 모두 투자시장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다. 전체 적립금의 75.4%는 여전히 예금과 보험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시장이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예금형 퇴직연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회사에서 같은 수준의 퇴직급여를 받은 사람 사이에서도 운용 방식과 금융 지식에 따른 격차가 커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백서에서 DC·IRP 수익률 상위 10% 가입자는 평균 19.5%의 수익률을 기록했고, 이들의 실적배당형 비중은 84%였다. 반면 하위 10% 수익률은 0.5%였고 원리금보장형 비중은 74%였다. 다만 이 결과를 ETF를 많이 사면 높은 수익률이 보장된다는 의미로 읽기는 어렵다. 2025년의 주식시장 환경과 투자 시점, 국내외자산 비중의 차이가 반영된 1년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은 한 해의 수익률 경쟁이 아니라 은퇴까지 남은 기간 동안 자산의 구매력을 유지하는 장기 운용 문제다. 고액 성과급을 받은 직장인에게도 중요한 것은 한 번에 가장 많이 오른 ETF를 찾는 일이 아니다. 성과급과 퇴직급여, 개인 추가납입금을 한 계좌 안에서 어떤 비율로 주식·채권·현금성 자산에 나누고, 시장이 급락해도 그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퇴직연금 운용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은 직장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예금 아니면 주식 ETF라는 양자택일이다. 자산을 직접 고르고 비중을 관리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ETF는 유용한 도구다. 비용이 낮고 투자 대상이 투명하며 국내외 자산을 조합하기 쉽다. 그러나 ETF를 매수할 수 있다는 것과 장기간 포트폴리오를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홍원구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와 타깃 데이트 펀드(TDF)의 역할’ 보고서에서 “단순히 원리금보장형 비중을 낮추고 실적배당형을 늘리는 것만으로 퇴직연금의 수익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진단했다.
개인이 투자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구조에서는 장기 자산배분 전략을 수립하고 시장 변화에도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투자 경험은 있지만 매달 계좌를 관리할 시간이 부족하다면 은퇴 예상 연도에 맞춰 주식 비중을 점차 낮추는 TDF가 대안이 될 수 있다.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은 자금이 장기간 방치되는 일을 막는 디폴트옵션도 있다. 2025년 TDF 평균 수익률은 13.7%, 디폴트옵션 전체 평균은 3.7% 수준이었다. 수익률의 차이는 명확하다. 디폴트옵션 자금의 85.4%가 안정형에 몰려 있었고 중립투자형 디폴트옵션의 수익률은 10.8%였다. 상품 이름보다 실제 주식과 채권 비중, 위험등급, 보수와 환노출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이유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에 대해 “국내 퇴직연금이 주식 비중 4.4%의 과도하게 보수적인 자산 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원리금 보장형 편중과 비효율적인 실적배당형 구성이 장기 수익률을 낮추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 진단은 위험 자산을 무조건 늘리라는 뜻이라기보다 연금의 긴 투자 기간에 맞는 분산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에 가깝다. 직접 운용자는 주식 ETF 한두 종목에 성과급을 몰아넣기보다 국내외 주식, 채권과 현금성 자산을 나누고 정기적으로 원래 비중으로 되돌리는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직접 관리가 어렵다면 TDF나 자동운용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지만 자동이라는 말이 원금보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국 좋은 상품은 가장 높은 최근 수익률을 기록한 상품이 아니라 가입자가 시장의 급락과 상승을 모두 지나며 은퇴 시점까지 유지할 수 있는 상품이다.
최근 퇴직연금 제도는 가입자가 금융회사와 운용 방식을 바꾸기 쉽게 만드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2024년 10월 시작된 실물이전 서비스는 일정 요건을 충족한 예금·펀드·ETF를 해지하지 않고 다른 퇴직연금 사업자로 옮길 수 있도록 했다. 금융회사에서 제공하는 상품, 수수료와 모바일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계좌를 통째로 현금화하지 않고 사업자를 바꿀 길이 넓어진 것이다. 2025년 3월에는 IRP를 중심으로 로보어드바이저 일임서비스가 시작됐다. 검증된 알고리즘이 가입자의 투자 성향에 맞춰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운용 지시를 대신하는 방식이다. 제도와 상품이 다양해질수록 초보자는 새 상품을 찾기 전에 자신의 계좌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회사의 퇴직연금이 DB인지 DC인지, 이직 과정에서 만들어진 IRP가 몇 개인지, 개인 연금저축과 추가납입금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급여통장은 생활비와 비상자금, 일반 증권계좌는 중기 목표와 자유로운 투자, 연금저축과 IRP는 세액공제를 활용한 장기 적립, 회사 DC 계좌는 퇴직급여와 성과급의 장기 운용이라는 역할을 나누면 이해하기 쉽다. 성과급을 받은 직후 한꺼번에 ETF를 매수하기보다 목표 자산 비중을 먼저 정하고 필요하면 시기를 나눠 편입하는 접근도 초보자에게 현실적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굴릴지가 아니라 어떻게 받을지다. 2025년 퇴직연금 수급을 시작한 사람 60만1000명 가운데 83.5%는 일시금을 택했고 연금 방식으로 받은 사람은 16.5%에 그쳤다. 계좌 이름은 퇴직연금이지만 실제 행동은 여전히 퇴직금을 한꺼번에 받던 시대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500조원의 적립금과 높은 투자수익률도 퇴직 직후 모두 인출하면 장기간 이어지는 노후 소득이 되기 어렵다. 성과급 1조원이 퇴직연금 계좌로 이동한 사건은 월급쟁이 부자가 많아졌다는 이야기인 동시에, 많은 근로자가 자신의 노후자산 운용자가 됐다는 의미다. 퇴직연금 500조 시대의 진짜 부자는 가장 공격적인 ETF를 고른 사람이 아니라 세금과 유동성, 위험을 나눠 관리하고 월급이 끊긴 뒤에도 자산을 매달의 소득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에 가까워졌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