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을 받은 뒤 결과지를 들여다보면 종종 ‘헬리코박터 파일로리(Helicobacter pylori) 양성’이라는 문구를 마주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위염이나 위궤양이 생기기 쉽다던데…”라며 일단 걱정을 시작하지만, 치료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는 고민에 빠진다. 그런데 최근 이 세균이 단지 위장질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뼈 건강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특히 50세 이상 여성의 경우, 헬리코박터균을 없애면 골다공증 위험이 29%나 줄어들 수 있다는 장기 연구 결과는 적잖은 주목을 받고 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는 나선형 모양의 그람음성 세균으로, 위 점막 속에 파고들어 살아간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감염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도 성인 감염률이 40%를 넘는다. 이 세균은 위산을 견디기 위해 암모니아를 자체 생성해 주변 환경을 중화하고, 위 점막을 훼손해 염증, 궤양, 심지어 위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위장질환을 유발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연구자들은 헬리코박터 감염이 위장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전신적인 만성 염증 상태를 유도하여 각종 대사 질환, 심혈관계 질환, 그리고 뼈 건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런 가능성에 과학적 근거를 더한 연구가 등장했다.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의 지원으로 분당서울대병원 연구팀이 지난 20년간 846명의 성인을 추적한 장기 관찰 연구 결과, 헬리코박터균을 성공적으로 제균한 사람들에서 골다공증 발생 위험이 평균 29% 낮아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연구는 2003년부터 2023년까지 이뤄졌으며, 연구 대상은 헬리코박터 감염 여부를 확인한 후 골다공증 병력이 없던 성인들이다. 이들을 제균 치료받은 군(730명)과 치료받지 않은 군(116명)으로 나누고, 추적 관찰하면서 골다공증 발생률을 비교했다. 그 결과, 제균군에서는 24.5%가 골다공증에 걸렸지만, 비제균군에서는 무려 34.5%가 해당 질환을 겪었다.
통계적으로도 헬리코박터 제균 치료가 골다공증을 예방하는 데 유의미한 효과를 보인다(p=0.008)는 해석이 가능하다. 특히 주목할 점은 50세 이상 여성에서 제균 치료의 효과가 더욱 뚜렷했다는 사실이다. 해당 연령대 여성에서는 제균 치료를 받지 않은 경우, 치료받은 군에 비해 골다공증 발생 위험이 1.53배 높았다는 분석 결과도 함께 발표됐다.
왜 남성보다 여성에서, 특히 중년 이후 여성에서 효과가 두드러졌을까? 가장 큰 이유는 폐경 이후 여성에서 에스트로겐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뼈의 손실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에스트로겐은 뼈의 생성을 촉진하고 골 흡수를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데, 폐경기 이후 이 보호막이 사라지면서 골다공증 위험이 크게 증가한다.
이 상태에서 헬리코박터 감염으로 인한 염증, 영양 흡수장애 등이 겹치면 골밀도가 빠르게 감소할 가능성이 커진다. 반대로 말하면, 제균 치료를 통해 위 건강을 회복하고 전신 염증을 줄이면 여성의 뼈 건강을 더 효과적으로 지킬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을 발견하면 무조건 제균 치료받아야 할까?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현재 국내 기준에 따르면, 헬리코박터 제균 치료는 위염이나 궤양, 위암 병력, 위축 위염, 장상피화생, 가족력 등의 고위험군에서 먼저 권고된다. 그 외 일반적인 감염자의 경우, 증상과 검사 결과에 따라 의료진과 상의해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이번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폐경기 전후의 중장년 여성이라면, 감염 여부를 확인하고 예방 차원에서 제균 치료를 고려할 필요는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골다공증 위험이 크거나, 이미 뼈 건강이 나빠진 여성이라면 더욱 그렇다.
물론 헬리코박터 제균만으로 골다공증을 완벽히 막을 수는 없다. 뼈 건강은 칼슘 섭취, 규칙적인 운동, 체중 관리, 금연, 절주, 햇빛 노출을 통한 비타민 D 합성 등 다면적 관리가 필요한 영역이다. 50세 이상 여성이라면 연 1회 이상의 골밀도 검사(DXA)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체크하고, 필요 시 칼슘과 비타민 D 보충제를 먹어야 한다. 동시에 근육 강화 운동과 체중 부하 운동(걷기, 등산, 가벼운 근력 운동 등)을 꾸준히 병행하면 뼈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헬리코박터균 감염률은 예전보다는 많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방심할 수는 없다. 1998년만 해도 국내 성인 감염률은 66.9%에 달했으나, 2017년에는 43.9%로 감소했다. 이는 위생 환경 개선과 함께 건강검진에서의 조기 발견, 제균 치료가 효과를 본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감염되더라도 아무런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아 조기 발견이 어렵고, 제균 치료 후에도 재감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주기적인 검사와 관리가 중요하다.
박현영 국립보건연구원 원장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감염 관리가 위장관질환뿐 아니라 골다공증과 같은 만성질환 예방에까지 이바지한다는 중요한 근거가 마련됐다”라며, “특히 폐경기를 맞아 골밀도가 낮아진 여성은 헬리코박터 감염 여부를 확인하고 적극적인 제균 치료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