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ar My Walking] 신라 별빛 품은 경주 | 한여름, 다시 걷는 수학여행

    입력 : 2026.08.03 11: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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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복 차림으로 줄지어 걸었던 그 길, 한때 수련회와 단체 사진의 배경이었던 장면들이 지금은 전혀 다른 얼굴로 객을 반긴다. 같은 좌표지만 달라진 풍경, 경주는 그렇게 다시 쓰이고 있다.

    1000년의 입구, 불국사와 석굴암
    불국사
    불국사

    경주 여행의 출발점은 변함없이 ‘불국사’다. 신라 법흥왕 15년, 어머니의 발원으로 창건돼 경덕왕 10년인 751년 재상 김대성에 의해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된 이 사찰은 다보탑과 석가탑, 청운교와 백운교 등 7점의 국보를 품고 있다. 임진왜란의 화염은 피하지 못했지만 복원을 거쳐 오늘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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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국사에서 토함산 중턱으로 3㎞를 더 오르면 ‘석굴암’이 눈에 들어온다. 동해 바다를 향해 정좌한 본존불을 중심으로 39체의 불상이 인공 석굴 안에 배치된 이 공간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와 예술이 하나로 응축된 통일신라 불교 건축의 정점이다. 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좁은 통로를 지나면 궁륭 천장 아래 본존불과 십대제자상이 대칭을 이루며 자리한다. 사실 학창 시절의 석굴암은 버스에서 내려 가파른 길을 한참이나 올라야 했던 고난의 길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찾은 토함산 굽잇길은 모든 게 다르다. 아니 다르게 느껴진다. 숲 사이로 비치는 볕, 산 중턱에서 내려다보이는 동해의 윤곽, 마침내 마주한 본존불의 표정까지, 무엇 하나 같은 기억이 없다. 1000년 전 신라인이 석굴을 조성하며 연구한 정교한 계산과 무한한 신앙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본존불을 마주한 이들의 표정은 아늑하고 고요하다. 학창 시절엔 그저 외워야 할 명칭이었던 곳이 이젠 의미를 되새기는 고유명사가 됐다.

    석굴암에서 내려다보이는 동해 바다.
    석굴암에서 내려다보이는 동해 바다.

    흥미로운 점은 세대별로 갈리는 경주의 첫인상이다. 경주시가 티맵 모빌리티 내비게이션 검색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한 ‘한국관광데이터랩’ 자료를 보면 2024년과 2025년 1~10월 누적 데이터에서 불국사는 각각 20.2%, 19.9%의 검색 비율로 전 세대에서 변함없는 1위를 지켰다. 그런데 그 뒤를 잇는 풍경은 세대마다 다르다. 20대와 30대는 ‘경주월드’, 40대 이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게 갈렸다. 특히 40대의 국립경주박물관 선호도는 12.4%에서 14.6%로 올라 문화·전시 중심의 관광 수요가 확대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도시 안에 역사 탐방과 체험형 콘텐츠가 공존하며 관광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어쩌면 이러한 세대 간 선호도 차이는 역설적이지만 경주의 저력이지 않을까.

    능과 별, 그리고 달… 신라의 심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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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국사와 석굴암이 산속의 신앙 공간이라면, ‘대릉원’과 ‘첨성대’ ‘동궁과 월지’는 평지에 펼쳐진 신라 왕경 그 자체다. 세 곳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의 핵심을 이루는 월성지구에 속해 있다. 당연히 한 걸음에 돌아볼 수 있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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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릉원은 신라 초기 왕과 왕비, 귀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는 고분군이다. 경사가 거의 없는 평지에 조성돼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고, 봉분의 완만한 곡선과 잔디의 초록이 계절에 따라 다른 빛깔로 물든다. 미추왕릉 인근의 나무 그늘은 이미 사진 명소로 입소문이 났고, 해가 진 뒤 인적이 드문 시간대의 산책로는 한적함을 원하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추천 코스다. 능과 능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신라의 왕족들이 묻힌 이 자리가 도심 한복판의 평온한 공원처럼 느껴지는, 묘한 시간의 중첩을 경험하게 된다. 대릉원에서 길 하나 건너면 만나게 되는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다. 신라인의 천문 관측 지혜가 담긴 이 단순하고도 우아한 곡선의 건축물은 낮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밤에는 경관 조명을 받아 전혀 다른 인상을 남긴다. 최근에는 첨성대 주변에서 미디어아트 콘텐츠가 함께 운영되며 전통 유적과 디지털 기술이 한 공간에서 만나는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혹 첨성대의 미디어아트를 경험했다면 걸어서 10여 분이면 도착하는 동궁과 월지로 가자. 이 코스의 정점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폐허였던 자리에 기러기와 오리가 모여들어 ‘안압지’라 불렸지만 본래는 신라 태자가 거처하던 별궁 터였다. 복원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춘 동궁과 월지는 밤이면 조명 아래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경주 야경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손꼽힌다. 특히 연못 수면에 그대로 비치는 누각과 숲은 꼭 한 번 직접 경험해야 할 운치다. 덕분에 사진 한 장을 위해 줄 서는 일이 익숙한 풍경이 됐다. 대릉원, 첨성대, 동궁과 월지 모두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개방한다.

    동궁과 월지
    동궁과 월지

    야경이 만든 새로운 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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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지면 경주는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대릉원과 첨성대, 동궁과 월지 등 신라역사문화 탐방에 더해 핫플레이스가 된 황리단길이 곁에 있어 야간 여행 코스를 완성한다. 실제로 SNS에서 떠오른 1박 2일 코스도 대릉원에서 시작해 첨성대와 황리단길을 거쳐 동궁과 월지로 마무리되는 수순이다. 어둠이 내린 월성지구와 대릉원지구의 고분들이 달빛과 조명 아래 한층 부드러운 곡선을 드러내고, 1000년 고도의 유적들이 경관 조명 아래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풍경은 낮 동안 역사 교과서처럼 다가왔던 공간들을 한밤의 무대로 바꿔놓는다. 야간 동선의 묘미는 걷는 속도에 있다. 낮 동안 분주하게 이동했던 발걸음이 해가 진 뒤에는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조명이 켜진 첨성대 앞에서 유려한 곡선을 올려다보고, 동궁과 월지의 연못가를 따라 걸으며 물 위에 흔들리는 누각을 바라보는 시간은 오랜만의 여유로 다가온다. 물론 황리단길 골목에 자리한 자그마한 맛집들도 빼놓을 수 없는 산책 코스 중 하나. 경주빵과 십원빵의 과한 유혹이 아쉽지만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식도락이 그 모든 걸 상쇄한다.

    [안재형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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