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은 지금 표준화 전쟁 중, 충전기술 놓고 테슬라-애플 엇갈린 행보

    입력 : 2023.10.26 13:43:02

  • 정부 및 규제기관의 독과점 기업에 대한 제재가 강화되는 가운데 표준화 기술을 선점하기 위한 기업들의 눈치싸움도 치열해지고 있다. 특히 새롭게 떠오르는 산업 분야의 경우 제각각 가지고 있는 기술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 장악에 나서고 있는 만큼 기술 표준을 선취하려는 기업들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격화되는 양상이다.

    표준화 전쟁이 언제나 화두가 되는 분야는 다름 아닌 충전 기술 산업이다. 각 제품별로 최적화된 충전 기술과 노하우를 보유한 기업들이 자사의 충전 기술을 표준으로 채택하기 위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과 전기차 시장은 이러한 충전 기술 표준화 전쟁이 현재 진행형인 산업이다.

    혁신의 아이콘이자 시장의 리딩기업인 스마트폰 제조사 애플과 전기차 제조사 테슬라가 그 전장의 중심에 서 있는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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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미 스마트폰 시장점유율 1위인 애플은 그간 안드로이드 진영에서 표준 충전단자로 써온 USB-C타입 대신 독자적인 충전 규격인 라이트닝 케이블 충전 방식을 고수해왔다. 구글의 스마트폰 운영체제 안드로이드에 기반해 제조되는 대부분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은 충전단자로 USB-C타입을 채택한 상황이다. 물론 초창기 스마트폰 시장에선 각 제조사별로 구별되는 충전 표준이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대다수 정리되고 또한 기술 진보를 통해 최종적으로 현재는 스마트폰, 태블릿, 심지어 노트북까지 C타입 단자를 이용해 충전이 가능한 상황이다. 그뿐 아니라 HDMI 등 각종 모니터 및 영상 장비 관련 단자 역시 C타입으로 교체되는 추세로 인해 많은 사용자들이 멀티미디어 기기를 활용하는 데 있어 호소해온 불편함이 대폭 줄어들고 있는 상태다. 심지어는 유선 이어폰 단자, 자동차 충전단자까지 모두 C타입으로 교체되며 모든 외부 입력 단자가 C타입으로 통일되는 추세다.

    기업·소비자 모두 혜택

    이는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혜택을 줄 수밖에 없다. 충전단자가 통일되면 관련 소재 개발 비용이 줄어들고 개발 비용 등 추가적인 R&D 비용도 감소되기 때문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하나의 충전기로 각종 전자 기기를 충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추가로 어댑터나 젠더 등을 구입하지 않아도 각종 전자 장비 간 연결이나 호환성을 높일 수 있는 만큼 편리성이 향상된다. 굳이 새로운 기기의 충전기나 단자를 사야 하는 재정적인 추가 비용 부담이 줄어드는 것도 긍정적 효과 중 하나다.

    이러한 스마트폰 충전단자 표준화 추세를 역행하는 기업이 있었다. 바로 혁신의 상징 애플이다. 애플은 라이트닝 케이블을 충전기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애플 사용자들은 충전기를 따로 챙겨야만 한다. 충전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페나 헬스장과 같은 서비스업체들도 C타입 충전기 외에 애플 전용 충전기를 별도로 구비해야 하니 이중비용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애플 역시 이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플이 가지고 있는 폐쇄형 에코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지켜나가기 위한 전략에 충전 시스템도 포함되며 지켜온 하나의 레거시를 깨트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유럽 등 규제기관에서 이러한 독자적인 충전 표준 사용으로 인한 비용 낭비를 막기 위해 경고장을 날리면서 시작됐다. 독과점 견제와 친환경 효율화 기조를 지켜나가고 있는 유럽연합(EU)은 애플에 C타입 충전기 도입을 촉구하면서 미이행 시 유럽 사업에서 추가 규제가 불가피하다고 예고했다. 애플은 이러한 경고를 의식하며 태블릿 기기에는 C타입을 도입하는 등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줬다.

    애플은 EU의 강경한 규제에 11년 만에 백기를 들고 아이폰15에 라이트닝 충전단자 대신 USB-C를 최초 도입했다. <사진 연합뉴스>
    애플은 EU의 강경한 규제에 11년 만에 백기를 들고 아이폰15에 라이트닝 충전단자 대신 USB-C를 최초 도입했다. <사진 연합뉴스>

    그리고 공교롭게도 테슬라가 자신의 충전소를 타사들과 공유하기로 한 2023년, 애플 역시 최신 프리미엄 스마트폰 아이폰15에 애플 역사상 처음으로 C타입 충전잭을 이용한다고 밝혔다. 유럽에서 표준화나 독과점 기업에 대한 우려를 계속해서 제기하자 애플도 이제는 표준 전쟁을 끝내고 C타입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셈이다. 이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간 타사와의 공유나 제휴를 철저히 배척해온 애플이 충전 기술에서 처음으로 표준화에 백기를 들며 문을 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플이 고수해온 폐쇄형 정책이 쉽게 뒤바뀌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추후 중장기적으로는 정부와 규제기관의 압박이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애플도 결국 유연한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변화는 전기차 시장에서도 관측되고 있다. 전기차 세계 1위 기업 테슬라의 왕좌를 빼앗기 위한 자동차 제조사들의 적극적 투자 전략이 속속들이 공개되는 가운데 가격 인하 정책으로 치킨게임에 돌입했던 테슬라가 돌연 경쟁사에 손을 내미는 사건이 발생했다.

    테슬라가 2024년 말까지 미국 내에서 자사 초고속 충전 인프라 ‘슈퍼차저(Supercharger)’ 일부를 다른 회사 전기차에 개방하기로 한 것. 자신을 잡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회사들에 손을 내미는 테슬라의 숨은 의도는 무엇일까.

    테슬라는 2024년 말까지 17만 700개의 미국 내 슈퍼차저 가운데 7500개를 모든 전기차가 사용하도록 개방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슈퍼차저는 테슬라 전용 전기차 급속 충전기다. 충전 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따로 결제를 해줘야 하는 다른 충전소와 달리 충전 코드를 연결하면 사용자를 인식해 자동으로 과금되는 테슬라만의 충전소다.

    10년 넘게 공을 들여 구축한 고속 충전 인프라는 테슬라만의 압도적 경쟁력이라 불린다. 그러한 슈퍼차저를 테슬라가 순수한 의도로 내주는 것은 아닐 터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전기차 충전소 최종 조립이 미국에서 이뤄지고, 부품의 55%가 미국산일 때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담은 규정을 발표했다. 향후 50만 개의 전기차 충전소를 구축하고 이에 75억달러에 달하는 보조금이 지급될 예정인데 이를 노린 것이란 뜻이다.

    테슬라는 자사 차량에만 슈퍼차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전기차 확대와 미국 정부 보조금 정책과 맞물려 다른 회사 차량에도 이를 개방했다.
    테슬라는 자사 차량에만 슈퍼차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전기차 확대와 미국 정부 보조금 정책과 맞물려 다른 회사 차량에도 이를 개방했다.

    미국의 현재 전기차 표준 충전 방식은 ‘CCS’라 불리는 합동 충전 시스템 방식이다. 반면 테슬라는 그간 자체적인 충전 표준 ‘NACS’ 방식을 써왔다. 미국 정부는 테슬라가 CCS 방식을 채택하지 않을 경우 보조금을 수령하는 데 제한이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보조금을 받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테슬라는 경쟁사에 자사의 고속 충전 시스템을 개방하는 결정을 내리며 구애에 나선 것이다. 북미 시장 압도적 1위 점유율을 보유한 테슬라의 충전 시스템이 경쟁사에 개방된다면 시장에 미칠 영향력은 무시 못 할 수준으로 평가된다. 심지어 미국이 추진 중인 CCS 표준 방식이 아예 NACS 방식으로 바뀔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는 상태다. 경쟁사가 주도하는 표준에 굴복한 애플과 달리 테슬라는 아예 시장의 표준 자체를 바꿀 수 있을 만큼 막대한 시장 경쟁력을 확보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 정부 등에서도 이미 구축된 테슬라의 충전 인프라를 사용하는 것이 새로운 표준에 맞춰 신규 설치를 하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도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테슬라, 운전자 정보 확보 목적

    충전소 개방에는 이러한 정부 눈치 보기뿐 아니라 더욱 은밀한 의도도 숨겨져 있다. 더 많은 운전자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란 것이다. 타사 전기차 충전 데이터를 확보해 더 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서비스를 고도화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프랑스, 독일 등 16개국에선 슈퍼차저를 일부 타 전기차들도 이용할 수 있다. 이미 테슬라는 자사의 자율주행 기술을 바탕으로 수많은 운전자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타사의 충전 데이터까지 수합될 경우 테슬라의 방대한 데이터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런 경쟁력 덕분에 슈퍼차저는 테슬라의 자율주행 기술과 더불어 가장 테슬라스러운 독자적 서비스로 이름이 나있다. 실제 슈퍼차저 네트워크만 1000억달러, 한화 130조원이 넘는 기업가치를 갖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GM과 포드, 리비안 등이 테슬라와 충전 제휴를 선언하며 테슬라를 중심으로 합종연횡이 활발한 가운데 전기차 판매와 별도로 전기차 충전 인프라만큼은 다다익선일 수 밖에 없다. 특히 휘발유나 경유의 경우 주유소별로 차량에 따른 구별이 없는 것처럼 전기차 충전 표준이 이뤄져야 전체 산업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전기차 시장 경쟁에서 남들보다 한발, 아니 수십 걸음 앞서 있는 테슬라 입장에선 이미 선점한 충전소 인프라를 개방하는 게 어쩌면 쉬운 결정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테슬라도 모든 경우의 수를 감안하고 고민한 끝에 결정한 만큼 추후 테슬라 입장에선 실보단 득이 훨씬 많은 것으로 판단했다고 봐야 한다.

    이미 경쟁사들은 테슬라의 전기차 충전 방식을 적용하겠다고 발표에 나서고 있다. 볼보는 2025년부터 미국·캐나다·멕시코 등 북미 3개국에 판매되는 차량에 NACS 충전 규격을 적용하되 소비자가 원할 경우 CCS 방식도 제공하기로 했다. 짐 로언 볼보 최고경영자는 “2030년까지 완전히 전기차로 전환하기 위한 여정의 일환으로 전기차 사용을 가능한 한 쉽게 만들고 싶다”면서 “전기차로의 이행을 막는 주요인 중 하나가 쉽고 편리한 충전시설 사용”이라고 밝혔다. 결국 테슬라의 충전망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자사의 전기차 경쟁력으로 직결되는 만큼 타도 테슬라를 외친 기업들의 고민은 깊어질 전망이다.

    사실 애플과 테슬라가 철저히 자신들만의 표준을 사용하고, 개방 대신 폐쇄형 정책을 써온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들의 에코 시스템 안에 사용자가 오랜 시간 머물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경쟁사의 제품을 쓰지 않고 그 안에서 모든 일상과 업무 등을 가능토록 유도해 생태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애플의 그러한 폐쇄성 전략과 마찬가지로 일론 머스크 역시 테슬라라는 자동차 서비스와 함께 슈퍼앱을 목표로 하는 X(옛 트위터)를 중심축으로 이용자들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머무르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열렬한 광신도와 팬덤을 만들고 타 서비스나 기기 이용자들과 차별화되는 우위 전략을 사용하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 포함된다.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폐쇄 정책은 규제당국이나 경쟁사 입장에선 무척 난처한 전략이다. 쉽사리 후발 사업자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으며 한번 울타리 안에 들어간 고객을 뺏어 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1위 기업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고 경쟁사들을 고사시켜 시장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경쟁의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규제당국의 눈엣가시로 불린다. 실제 테슬라는 연방거래위원회(FTC)와 앙숙이라 불리며 독과점 문제에 대한 지적을 수차례 받아왔다. 그렇다 보니 애플이나 테슬라 모두 지금까지 추진해오고 계획한 것과 달리 어느 정도 개방이라는 키워드를 챙겨가면서 사업을 전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부분이 애플의 충전단자를 C타입으로 바꾸게 했고 테슬라의 충전소가 경쟁사에 열리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생성형 AI에서도 표준 전쟁 벌어질 듯

    EU는 알파벳, 아마존, 애플,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바이트댄스 등 총 6개 기업을 특별 규제를 받는 대형 플랫폼 사업자를 뜻하는 게이트키퍼로 지정하고 이에 대한 특별 관리를 발표했다. 2024년부터 시행되는 디지털시장법상 특별 규제를 받는 해당 기업은 시장 지배력 남용을 할 수 없으며, 만약 발생할 경우 전체 매출의 최대 10%에 해당하는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받게 된다. 이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독점 기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테슬라의 충전소 개방에 영향을 미쳤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이러한 표준 전쟁은 기술 발전에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특히 화두가 된 생성형 AI 기술에서 아마 표준화 전쟁이 격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많은 기업들은 규제 가이드라인을 자체 제정하고 AI헌법을 만드는 등 무분별하게 개발되고 있는 AI 기술의 문제점을 사전에 시정하고 표준화된 기술 경쟁이 도입될 수 있게 애쓰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산업에서 표준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질지, 그리고 그 표준 기술을 선점하는 기업이 어디가 될지는 투자자 관점에서도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이슈다.

    추동훈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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