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트에 담긴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입력 : 2014.01.09 11: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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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시장을 누비는 우리의 글로벌 기업이나 뮤지션들이 속속 출현하면서 한국의 위상이 많이 높아지고 있다. 휴대폰과 텔레비전, 자동차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주로 제조업, 그리고 K-POP 음악들이 약진하면서 동반되는 뿌듯한 현상이다. 하지만 같은 문화적 영역임에도 패션이나 음식과 같은 분야는 아직 세계로 진출해서 인정받거나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브랜드를 내지는 못하고 있다. 삶의 질이나 경제적인 여유가 필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들은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흐름을 열심히 따라가는 형국이다. 여성복을 중심으로 한 럭셔리 패션은 프랑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남성복은 역사적 유산이 풍부하고 사람들의 감성이 발달한 이탈리아가 강세다.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원래 감각이 높아서, 사람마다 패션 센스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유럽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그러면서도 사치스러웠던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기간산업을 패션으로 완전히 탈바꿈시켜 놓으면서 그 후손들이 오직 선조들의 유산만으로도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국가가 나서서 패션을 장려하고 그 산업을 보호하며 시장을 육성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열망하는 ‘에르메스’나 ‘까르띠에’, ‘셀린’과 ‘지방시’ 같은 강력한 브랜드들이 일찌감치 출현할 수 있었던 셈이다. 유럽의 헤게모니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영국으로 넘어가면서 화려했던 프랑스식 복장이 잦아들고,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 문화가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남성복은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맞춤복 거리인 새빌로에서 출발하게 되었고, 근대 영국 귀족들의 군복, 스포츠웨어, 예복을 비롯한 정제된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던 옷들이 현대적 모델이 되었다. 다만 좀 남다르게 전통을 고집하던 영국인들에 비해 예술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스타일과 멋을 즐기는 이탈리아인들이 남성복의 기초를 세운 영국식 문화에서 진일보해 전 세계 상류사회 남성들을 매료시키는 새로운 남성복의 기준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원래 여러 도시국가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해 온 이탈리아의 다양성은 밀라노, 피렌체, 베니스, 로마, 나폴리 등 각 도시별로 독자적인 특성을 가진 복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스타일 선택의 폭도 아주 넓었다. 메이드 인 이탈리아(Made In Italy)의 세계 정복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

    여러 나라의 시장, 특히 남성복에서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파워는 상당하다. 이탈리아의 축구나 음식도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이탈리아산 패션 브랜드라면 일단 특성을 따지지 않고 선호하는 현상까지 벌어졌었다.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피렌체는 우리가 서울이나 뉴욕에서 매일 보는 현대적인 건물이 하나도 없을 만큼, 건축이나 과거의 흔적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곳이다. 그곳의 남성복도 중세부터 이어진 귀족 문화의 원형을 온전하게 계승하기 때문에, 과거 이탈리아 귀족들이 입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느낌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하는 일관성을 보여준다.

    미국식 문화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던 로마식 남성복은 흔히 날렵한 스타일로 생각하는 이탈리아식 옷들에 비해 넉넉하고 편안한 실루엣을 보여준다. 무역과 세계 진출에 발군이었던 베니스의 남성복은 정통적인 테일러링 수트 제조 기법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트렌드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적극적인 특성을 보이기에 그 디테일이 항상 유연하게 변화하는 복장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들 가운데에서 가장 개성적이면서 품질이 뛰어난 고급 수트를 만드는 곳은 단연 나폴리인데, 나폴리 수트에는 영국적인 복장의 전통과 이탈리아만의 유니크한 감성이 멋지게 결합되어 있어서 더욱 가치가 높다. 모든 종류의 옷을 항상 차려 입던 영국의 지적 상류계급이 특별히 손재주가 좋고 경관이 빼어났던 나폴리를 사랑했기에 자연스럽게 두 나라의 문화가 나폴리에서 믹스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체사레 아톨리니(Cesare Attolini)나 키톤(Kiton)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성복이 그곳에서 탄생한 이유다. 물론 영국 귀족들에게 이탈리아 여행이란 일종의 교양으로 간주되었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고급 수트를 제작하는 나폴리만의 독특한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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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전통과 이탈리아 감성이 만난 나폴리 수트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인 나폴리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항구다. 날씨가 평균 8℃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쾌적한 지중해성 기후로 ‘나폴리를 보지 않고서는 죽지마라’라는 속담까지 배출한 세계적인 휴양 도시다. 음식과 의류가 출중하게 발달된 곳이지만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남부에서 흘러 들어오는 인구 때문에 빈민, 사회 문제도 상당히 안고 있다.

    하지만 수트라는 가장 남성적인 주제로 들어가 이 도시를 생각해 본다면 사실 나폴리는 영국으로부터 이어진 남성복의 과거 유산들을 철저하게 지켜가면서도 거기에 부가적인 가치를 더해 현재의 수트 문화가 미래에도 변함없이 이어지도록 만들어준 역사적인 공간이다. 1990년대 이후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나 지아니 베르사체(Gianni Versace) 같은 세기적인 디자이너들이 많이 배출된 화려한 이탈리아식 패션의 흐름이 남성 브랜드에도 큰 영향을 주면서, 남성 브랜드들도 수트의 퀄리티 그 자체보다는 브랜드네임이나 이슈를 만드는 마케팅에 힘을 쏟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러나 나폴리는 20세기 이후 일관되게 남자의 수트가 브랜드나 자산의 과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품질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품과도 같은 존재이며, 비즈니스의 본래 목적에 해가 될 만한 부적절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모든 남자들에게 점잖은 품위를 제공한다는 최초의 수트 철학을 철저하게 지켜오고 있다.

    문화적 유산이 풍부한 나라고, 세계적으로 출중한 패션 브랜드들을 많이 배출한 국가답게 이탈리아 사람들은 모든 문화적 영역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센 편이다. 그러나 수트에 관한 한 나폴리 장인들의 자존심은 이 세상 누구보다 하늘을 찌른다. 지금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고급 수트 스타일의 뿌리가 나폴리나 풀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이탈리아 지역의 장인들의 손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전 세계에서 장인들의 조합인 길드를 최초로 결성한 곳이 나폴리이고, 1351년에 이미 재봉 장인 길드를 위한 기술 시험이 실시될 만큼 이 도시에는 장인들이 많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수준 높은 클래식 수트를 제작하는 테일러를 사르토(Sarto)라고 하는데, 이미 19세기부터 이탈리아 전역에서 인정받던 사르토들은 모두 나폴리 출신이었다고 한다. 수트 한 벌이 출근을 위한 공산품보다 예술품으로 존중 받는 나폴리 수트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대표될 수 있다.

    첫째, 나폴리는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도시일 뿐이지만, 그들의 문화 스타일만은 전 유럽 지역의 신사들에게 모두 적극적으로 수용될 만큼 국제적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나폴리는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답게 역사적으로 그리스, 프랑스, 독일, 스페인, 아랍, 터키 등의 나라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타국의 문화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재해석하며 발달해 왔기 때문이다. 스페인, 프랑스, 영국이라는 열강으로부터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각각의 나라에 전승되어 온 복식 전통과 나폴리만의 기술이 믹스되며 독특한 나폴리 스타일이 지속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폴리 수트에는 나폴리를 넘어선 전 유럽의 역사와 문화가 함께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나폴리풍 혹은 나폴리 스타일이란 산업 문명의 획기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적인 문화의 핵심이 되는 핸드메이드(Hand-Made) 정신, 즉 자본과 마케팅에 대한 투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브랜드네임보다 장인들의 정교한 수작업을 통해서만 획득 가능한 품질에 대한 일관된 지향을 보여준다.

    특히 사람의 움직임을 반영해서 제작하는 나폴리식 수트는 어깨와 소매, 허리 등 인체의 입체적인 부분을 정교한 수작업으로 처리해 착용자가 편안한 느낌을 갖는 동시에 겉으로 보여지는 스타일도 유려해진다.

    나폴리 수트의 어깨 라인은 겉으로 보기에는 좀 작아 보이지 않느냐고 걱정할 만큼 몸에 밀착돼 있지만, 실제로 그 수트를 입은 사람은 전혀 몸에 구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가볍고 편안해한다. 이런 느낌이 가능하게 하는 수작업의 비밀은 숙련된 나폴리 장인들이 직접 하는 바느질에 있는데, 결국 소재의 가격에 상관없이 실을 깊게 넣어 뜸을 뜨는 정성 어린 바느질을 통해 완성된 옷의 구조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유연성까지 강조할 수 있다는 그들만의 자신감이다.

    셋째, 나폴리 수트는 그들만의 작고 섬세한 디테일을 통해서 보수적인 특성이 숙명적인 수트를 어느 정도는 개성적으로 혹은 세련되게 입는 테크닉을 발휘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나폴리식 어깨 라인은 어깨에서부터 손목으로 내려오는 소매 라인이 점점 좁아지는 입체적인 형태를 통해서, 착용감과 스타일 모두를 만족시켜 준다. 그 소매는 자신의 개성에 따라 실제로 버튼을 열고 잠그도록 만들어졌다. 이것은 버튼 구멍을 만들었다는 단순한 아이디어를 넘어, 남자들도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버튼을 다 잠그거나 혹은 몇 개를 동시에 풀면서 수트 차림에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주는 것이다.

    또한 바르카(Barca, 이탈리아어로 돛단배라는 뜻)라는 나폴리식 수트의 가슴주머니는 직선이 아니라 정말 배 모양처럼 곡선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 또한 핸드메이드로 그 주머니를 만들었다는 증명인 동시에(기계로 곡선 주머니를 커팅하고 부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곡선에 걸맞은 포켓스퀘어(Pocket Square, 가슴주머니에 꽂는 장식 수건)도 돛의 모양이나 입체적인 느낌으로 장식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었다.

    역사는 언제나 아이러니를 수반하지 않던가. 나폴리는 아름다운 기후와 환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귀족들이 자주 찾았지만 관광이나 음식, 재봉 이외의 산업이 발달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에 비해 가난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실력 있는 장인들과 출중한 바느질 솜씨가 출현할 수 있었다. 전통에 대한 철저한 존중,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고집, 오픈 마인드, 그리고 스스로를 상징하는 개성. 아직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를 갖지 못한 우리에게 나폴리의 역사가 시사하는 바는 그런 것이다.

    남훈 2005년부터 2011년까지 7년간 제일모직 ‘란스미어’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현재 패션전략컨설팅회사 ‘더 알란 컴퍼니’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서울 종로 GS타워몰에 액세서리 편집숍 ‘알란스(ALAN’S)’를 오픈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0호(2014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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