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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글로벌 공동기획]세계의 건축·건축사 | 오스카 니마이어의 스페인 아빌레스 니마이어 센터…산티아고 북쪽길을 재건시킨 아이콘
입력 : 2013.06.07 14: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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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이 지방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에게 정복당하지 않은 그리스도교 왕국이면서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당시에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은 침략자 무어인들의 횡포를 피해 주로 북쪽 길을 이용했고 자연스럽게 이곳엔 관련된 경제적 이득을 누리는 도시들이 성장했다.
그러나 침략에 대항하는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이슬람을 몰아내고 남쪽으로 영토를 회복함에따라, 그리고 15세기 말 아스투리아스를 구심점으로 하는 그 국토회복운동이 완전히 끝나면서 이 북쪽 지방은 점차 역사의 변방으로 잊혀 갔다.
동시에 그 안의 북쪽 길은 좀 더 편리한 다른 순례 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그 주변의 도시들은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아빌레스 항구와 공장
하지만 이런 성장은 오늘날 후세들이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계속되진 못했다. 과거 이 지방을 보호했던 칸타브리아 산맥이 어느 순간 공업화를 방해하는 지형적인 장애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기간시설의 확충은 더디게 진행됐고, 곧이어 세 도시로 이루어진 삼각공업지역의 발전은 한계에 도달했다.
설상가상으로 집중적인 공업화에 의해 도시의 환경은 점점 더 삭막하고 피폐해져 갔다. 결국 도시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지역 전체로 퍼지면서 최근에는 이 지역과 도시를 구해낼 새로운 시도에 대한 요구가 계속 높아졌다. 그리고 21세기의 국가적인 경제문제는 이런 위기감을 한층 더 크게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
선물 그리고 도시의 재건 그런 혼란 속에서 맞은 2006년, 수많은 역대 수상자들이 초청된 아스투리아스 왕자 상(Prince of Asturias Awards)의 25주년 축하 행사에서 드디어 이 지역을 변화시킬 초석이 마련됐다. 그것은 1989년도 수상자로 참여한 브라질의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의 손에서 비롯됐다.
당시 특별 강연을 요청 받았던 그는 강연 대신 이 상과 수상자들의 정신을 표현하는 뮤지엄의 디자인을 제안하겠다며 즉석에서 스케치를 하게 되는데, 그 스케치가 아빌레스의 니마이어 센터(Niemeyer Center/Centro Niemeyer)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브라질을 제외한 장소에서 그가 가장 아끼고 중요하게 여기는 작품인 니마이어 센터는 뮤지엄, 공연장, 콘퍼런스, 전망대의 기능을 가진 복합문화시설로 이후 아빌레스의 도시재건사업인 ‘La Isla de la Innovacion’과 통합되어 도시 재건의 구심점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렇게 니마이어 센터는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구겐하임(Guggenheim)을 통해 빌바오(Bilbao)에 했던 것처럼 지역과 도시 전체의 재건을 이끌어내는 원천으로, 쇠퇴의 길에 접어든 삼각공업지역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그 역할을 부여 받은 것이다.
오래된 도시와 다가올 미래의 조화 해안으로 연결된 아빌레스의 강어귀, 4만4000㎡의 넓은 평지에 자리한 니마이어 센터는 탁 트인 전망을 살려 개방된 플라자로 계획됐다. 특별한 꾸밈없이 깨끗함을 강조한 열린 공간은 처음부터 니마이어가 이 프로젝트에서 강조하고자 의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서로 다른 차원의 건물들이 보는 위치에 따라 독특한 느낌을 자아낼 수 있도록 신중하게 배치됐다. 이렇게 구성된 니마이어 센터는 강 건너 아빌레스의 올드타운과 모든 부분에서 팽팽한 대조를 이루며 서로를 돋보이게 한다. 그런 가운데 알록달록한 원색과 가벼운 느낌의 철 구조물로 이루어진 다리가 올드타운과 센터 사이의 강을 가로질러 놓여있어 두 장소 간의 극단적인 이질감을 완화시켜 준다. 그리고 올드타운에서 센터를 조망할 수 있도록 강 위로 뻗은 전망용 램프(Ramp)는 올드타운의 고전적인 양식에 반하는 간결함과 센터의 부드러운 형상에 대비되는 날카로움으로 도시 재건의 열망을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다. 이렇게 니마이어 센터와 그 주변은 디자인이나 양식의 동질화에서 오는 평이한 조화로움보다 이질적인 객체들의 그룹에서 만들어지는 역설적이고 역동적인 조화로움을 선사한다.
우아한 곡선과 단순한 색채의 건축 예술 센터 안의 건물들은 그 형상이 비범하지만 복잡하거나 난해하지 않아 누구든지 자신의 직관과 기하학적 상상을 따라가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건물 하나하나가 니마이어만의 곡선을 통해 시적인 감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시각적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니마이어는 장식적인 디테일을 최대한 배제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중심으로 해 건축의 순수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형태적 아름다움을 증폭시키기 위해 모든 건물들은 하얀색으로 채색됐는데 여기에는 공업도시 아빌레스가 가진 어두운 느낌을 중화시키려는 의도도 함께 포함돼 있다.
또한 오디토리움에 부분적으로 입혀진 강렬한 원색은 하얀 무채색에 내재된 일말의 지루함을 제거하고 그중 노란색 벽체가 가진 그림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피카소를 연상시키면서 이곳의 모든 건축적인 것들이 예술의 범주로 인식되게 만드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성 프란시스 교회
그는 바우하우스(Bauhaus)의 기계화된 규칙을 혐오하면서 피카소처럼 모든 불필요한 규칙들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건축이 발명이라는 관점에서 아름다움, 새로운 표현, 차별화되고 독특한 해법을 얻기 위해서는 탐구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건축이 구조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했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엔지니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새로운 혁신의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디자인은 곡선과 콘크리트로 대변됐다. 그의 건축에서 곡선이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콘크리트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의 콘크리트가 단단함을 숨기고 부드러움을 입는 것은 곡선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그는 “인간에 의해서 창조된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직각과 직선은 나를 매료시키지 못한다. 나에게 매력적인 것은 자유롭고 감각적인 곡선이다. 내 조국의 산과 굽이치는 강과 사랑스러운 여인의 육체로부터 나는 그것을 찾는다”라는 말로 자신의 건축을 설명했다.
그렇게 그가 활동한 전 기간을 통해 창조된 작품들에는 곡선과 콘크리트의 결합이라는 일관성이 있다. 그런 그의 건축은 성 프란시스 교회(Church of St Francis, 1943), 브라질리아 대성당(Catedral Brasilia, 1970), 니테로이 현대 미술관(Niteroi Contemporary Art Museum, 1996) 등을 통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브라질의 중부도시 벨루오리존치(Belo Horizonte)의 팜풀라(Pampulha) 지역 호숫가에 위치한 성 프란시스 교회는 예배당을 덮는 주 볼트(Vault)를 가운데 두고 몇 개의 크고 작은 볼트들이 연속적으로 구성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호수를 정면으로 해 배치된 이 교회는 호수 건너편에서 볼 때 연속된 볼트 구조가 주변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계획됐다.
그리고 호수 주위의 보행로를 따라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자연적 배경과 변화되는 교회의 모습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 이 교회가 계획되던 20세기 전반은 새로운 건축의 시대로 다양한 교회 건축이 시도되고 있었으나 고딕 성당의 영향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니마이어는 이 교회를 통해, 당시의 새로운 건축 재료인 콘크리트를 이용한 현대적 공법과 함께 곡선의 조형미를 살린 건축의 창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2008년 4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2011년 3월 25일 공식적으로 개관한 니마이어 센터는 개방된 플라자(Open Plaza)와 돔(Dome), 오디토리움(Auditorium), 전망타워(Sight-seeing Tower), 다목적 빌딩(Multi-pur pose Building)의 5개 요소로 구성됐다. 그중 플라자를 제외하면 4개의 요소들은 모두 독립적으로 배치된 콘크리트 건축물들이다. 돔(Dome)
전망타워(Sight-seeing Tower)
다용도 빌딩(Multi-purpose Building)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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