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pecialⅡ]분배에 실패한 정부, 화살은 기업이 맞았다

    입력 : 2012.12.27 11: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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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소기업에 다니는 박 모씨는 월급날이 돼도 신이 나지 않는다. 몇 년 전만 해도 두둑한 월급을 받으면 꽤나 뿌듯했는데 지금은 카드대금 막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기 때문. 월급은 5년 전에 비해 크게 오르지 않았는데 밥값과 교통비 통신비 등이 눈이 뒤집어질 만큼 올랐다는 게 박 씨의 설명이다. #김 모씨는 대학 5학년생이다. 의과에 다니는 게 아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그는 졸업을 늦추면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 졸업생에게 더욱 높아지는 취업 문턱을 조금이라도 낮추자는 의도에서다. 김 씨 주변엔 지금 대학 5학년은 물론이고 6학년, 7학년도 수두룩하다. 굳이 공부를 더 할 생각이 없지만 졸업을 해도 취업이 안 되자 대학원에 적을 두고 취업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두 사람의 얘기는 현재 우리 사회의 아픈 단면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이런 얘기를 들먹거리면서 해법으로는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순환출자를 규제하고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도입하며 재벌의 불법행위를 엄하게 처벌한다며 목청을 돋운 것이다.

    마치 삼성전자가 연신 사상 최대 규모의 이익을 경신하고 있고 현대차의 글로벌 점유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게 서민들의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다는 투였다. 당연히 비난을 받아야 했을 정부가 화살을 피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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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 뒤에 숨은 비겁한 정부 지난 4월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소득불평등 논란이 일자 통계 오류라고 관심을 돌렸다. 그는 “최근 수년 동안 가구수는 급증하고 가구원수는 줄어드는 현상이 우리나라의 소득분배 불평등도를 악화시켰다”고 주장했다.

    며칠 후 박 장관은 다른 자리에서 “지니계수나 소득5분위배율 등 통상적으로 얘기하는 분배 불평등지수를 보면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분명히 개선됐다”며 소득 격차가 커졌다는 지적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 책임자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소득불평등도는 최근 상당히 악화됐다. 통계청이 발표한 2인 이상 도시가구의 시장 소득을 기준으로 한 소득 5분위분배율은 노무현 정부 시절 5년 평균이 5.19배였던 반면에 이명박 정부 시절 4년 평균은 6.0배로 나타났다.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한 소득 5분위분배율도 노무현 정부 당시 5년 평균이 4.528배였던데 비해 이명박 정부 4년 평균은 4.875배로 악화됐다.

    소득 5분위분배율은 상위 20%의 계층이 하위 20%의 계층에 비해 얼마나 많은 소득을 올리는지를 나타내는 비율로 빈부격차를 나타내는 지표로 널리 활용된다.

    분배구조가 악화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또 다른 지표인 지니계수 역시 노무현 정부 시절의 평균보다 이명박 정부 때의 평균이 높다. 물론 현재 지니계수는 노무현 정부 말년에 비해선 미미하나마 개선됐으니 정부 당국자의 주장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악화됐던 정도를 생각한다면 이런 변명을 국민들이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전체 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소득분배 상황 역시 노무현 정부 시절보다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가 제대로 제기되지 않은 것은 정부는 물론이고 경제학자들조차 지난 1980년대 말 이후 분배문제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의 소득분배 통계가 분배 문제를 파악하기보다는 후생수준을 측정하는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는 당국의 설명에서도 잘 나타난다. 통계 수치가 현실보다 완곡하게 표현되고 있어 실제 계층 간 갈등은 훨씬 심각한 상황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제기하는 대목이다.

    특히 최근엔 중산층 이하에서 실질소득이 감소하는 현상이 두드러져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여기엔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석유류나 밀가루를 비롯한 식료품 가격이 급등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 수입물가가 소득보다 훨씬 가파르게 올라 서민 가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다.

    환율이 급등한 2007년 이후 물가를 국가통계포털에서 보면 경유 값은 40%, 자장면 값은 25% 정도가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도시지역의 실제 물가는 이보다 더욱 가파르게 올랐다. 자장면이나 설렁탕 등 음식 값을 50% 이상 올려 받는 곳이 부지기수다.

    국내 물가가 이처럼 급등한 데는 두 차례 외환위기(한국은 2008년에 대외순자산이 마이너스로 떨어질 수 있었던 위기상황이었음)로 놀란 정부가 수출로 외환을 확보하겠다는 일념으로 줄기차게 고환율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재정위기를 맞아 엄청난 돈을 찍어낸 미국과 EU의 통화 가치가 떨어져야 하는 게 정상인데도 한국의 원화는 정부의 입김 덕에 이제까지 약세를 유지해왔다. 최근 미국 정부가 한국에 대해 환율시장에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글로벌 금융위기 전 920원대에 머물던 환율이 1100원대에서 유지돼 수출기업들은 엄청난 혜택을 입었지만 전 국민이 비싼 자장면을 먹으며 물가 부담을 견뎌온 것이다.

    이에 대해 이헌재 전 부총리는 “삼성전자나 현대차 등 일부 대기업이 매 분기 수조 원의 영업이익을 내고 있지만 경제 전체로는 고용도 늘지 않고 성장률도 하락하고 있다”며 “성장의 정체와 소득 불균형으로 사회 전반이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빠진 상태”라고 진단했다. 한마디로 정부가 분배 구조를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 당국자나 관변단체들은 왜곡된 분배구조를 바로잡는 보완책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고환율 정책을 옹호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

    핵심은 분배구조 왜곡 정부는 더 나아가 사회간접자본이나 복지비처럼 국가예산으로 충당해야 할 사업들까지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긁어내는 복권이나 마권을 팔아 재원을 조달했다. 또 다른 면에서 분배구조를 왜곡시킨 것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 11월말 복권 판매액은 2조9129억 원으로 이미 2012년 정해진 한도를 훌쩍 넘긴 상태다. 경마나 경륜 매출은 이보다 규모가 훨씬 커 10조 원이 넘었다. 여기에 카지노까지 합한 사행산업 전체 매출은 18조 원대에 달한다.

    문제는 이 돈이 부자가 아닌 약자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복권이나 마권 구매자의 대부분이 중산층 이하라는 것은 이미 외국의 조사에서 밝혀진 진실이다. 또 이런 도박의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도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부가 도박 중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정부가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이유다.

    초보 수준의 미흡한 통화정책도 중소기업이나 서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다. 부동산 거품이 한창일 때 돈을 계속 쏟아내 값이 폭등하게 만들었던 당국은 이번엔 가계부채가 급증하고 있다는 이유로 경제가 위기로 치닫고 있는데도 돈줄을 옭아매며 긴축정책을 펴고 있다. 이 바람에 시기를 잘못 택해 자영업에 뛰어든 서민들이 파탄에 이르고 있고 중소건설업체들은 이미 수없이 문을 닫았다.

    정치권은 그동안 이런 정부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 한번 제기하지 못했다. 그러다 선거철이 되자 대기업을 희생양 삼아 비판의 강도를 높인 것이다. 물론 일부 대기업의 부도덕이 없지는 않지만 정부가 받아야 할 비난까지 기업들이 떠안은 셈이다.

    [정진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8호(2013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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