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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임원, 생존게임 이겨내기
입력 : 2012.03.26 17:5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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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속 비결을 묻자 A전무는 “경쟁 우위는 유능이 아니라 생존”이라며 “강해서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게 강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35년 간 직장생활에서 A전무와 서로 경쟁을 펼친 직장 동료는 몇 명이나 될까. 헤드헌팅업체 유니코써어치가 지난해 가을에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100대 기업 임원이 되려면 직장 동료 105명과 경쟁을 치러야 했다. 매출액 기준 100대 상장 기업을 분석한 결과 상근 임원 수는 6619명, 직원 수는 69만6284명으로 직원 수 대비 임원 수가 105.2대 1이었다. 당시 집계로 100대 기업 중 임원과 직원 수가 가장 많은 곳은 삼성전자였다. 직원 10만453명에 상근 임원이 966명으로 임원 1인당 직원 수는 104.0명이었다. 전체 평균에 가장 근접한 수치다.
그렇다면 이른바 동료 임원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어떤 점이 선행돼야 할까. 허영종 커리어케어 전무는 “임원의 경쟁력이 곧 회사의 성과로 이어진다”며 “개인이 아니라 팀워크가 바탕이 된 임원 간의 경쟁이 회사의 경쟁력으로 돌아온다”고 강조했다. 허 전무는 “경쟁에서 이기려고만 하는 임원은 빨리 도태된다. 잠시 반짝할 순 있지만 서로 돕는 팀워크를 무시한 경쟁은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결국 동료가 등 돌리고 부하 직원과 상사의 마음이 떠난다”고 덧붙였다.
Competition 1. 1시간 먼저, 1시간 뒤에!
2년 전 IT기업의 이사가 된 B이사는 사내 임원 중 유일한 지방대 출신이다. 승진 발령이 난 후 대학동기들과의 축하모임에서 술이 거나해진 한 친구가 대뜸 ‘꺾기 쉬운 꽃’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그가 봐도 동료 임원들의 스펙은 화려하다 못해 휘황찬란했다. 명문대는 기본이요 미국 유학을 갔다 온 이도 여럿이었다. 모임 이후 그는 새삼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다. 엔지니어로서 실력으로 승부해 임원까지 올랐지만 마주한 현실은 왠지 꺼림칙했다. B이사는 우선 부하직원들에게 집이 멀어 출퇴근 시간을 조정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다음 날부터 동료 임원들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해 1시간 늦게 퇴근하길 반복했다. 저녁 약속이 없을 때면 정확히 가장 먼저 출근하는 임원보다 1시간 먼저, 가장 늦게 퇴근하는 임원보다 1시간 늦게 퇴근했다. 반응은 6개월 뒤부터 서서히 나타났다. 처음엔 사원들 사이에 얘기가 돌더니 차장, 부장급들도 수군대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난 뒤 그는 사원들에게 ‘에너자이저’란 별명을 얻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지난해 시무식 땐 사장도 그의 별명을 거론했다. “올해는 신규 사업 개발에 가장 많은 투자가 이어질 겁니다. B이사님이 수고해주세요. 그 팀이 에너자이저팀이라면서요?”
Competition 2. 잡스도 아닌데 웬 외골수? C상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스티브 잡스다. 그가 사망하고 전기가 출간됐을 땐 회사 앞 서점이 문을 열자마자 책을 집어 들었다. 잡스 주변에 인재가 넘쳐났다는 사실과 그의 괴팍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잡스와 일할 때면 마치 그게 세계의 중심 같았다. 뭔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성공에 대한 확신이 섰다”는 책 속의 증언이 특히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기가 출간되기 전부터 C상무의 잡스 사랑은 유명했다. 회의 시간이면 늘 잡스 얘기가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꼭 잡스 때문은 아니지만 C상무는 임원회의 때면 옳다고 생각하는 건은 끝까지 밀고 나가려고 노력했다. 임원회의에서 확실한 목소리를 확보하고 ‘가능성 있는 건 밀고 나가지만 아닌 건 아니다’란 입장이 자신의 경영철학임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하지만 어느 날 부사장의 한마디에 C상무는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C상무님, 여기는 애플이 아닙니다.”
화장실 양변기에 앉아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골몰하던 C상무는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다시 한 번 입을 다물어야 했다. “매번 회의 때마다 사사건건 자기만 옳아요. 고집이 센 건지 외골수인 건지.” “C상무가 잡스 팬이라며, 잡스도 아니면서 웬 외골수?”
“처음부터 너무 목표치가 높았던 것 아닙니까. 지금 회사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겁니까. 그 건을 지원하기엔 지금껏 투자된 자금도 회수가 불투명하잖아요. 게다가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도 완성이 안됐고 협력사도 갖추지 못했어요. 너무 혼자 앞서가는 것 아닙니까. 이 회의는 보폭을 맞추자는 것이지 앞서가자는 게 아니에요!”
Competition 4. 투서로 흥한 자 투서로 망한다? 지난해 전무로 승진한 E전무는 올 초 퇴직했다. 퇴직하던 날 학교 후배이자 동료 임원이던 F상무의 조언에 뻥 뚫린 가슴이 아직도 서늘하다. E전무는 상무 시절 지근에서 사장을 보좌하며 수행비서 아닌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오죽하면 사장님 댁으로 출근해 그곳에서 퇴근하는 날도 비일비재했다.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만 빼면 늘 붙어 다녔다. 자연스럽게 그 어렵다던 독대 시간도 길어졌다. 지방 출장이라도 갈 때면 서너 시간 이상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어느 부서가 요즘 어떠냐는 질문에 자질구레한 소문까지 보고했다. 자연스럽게 사내에선 ‘2인자’ ‘승진 1순위’란 말이 돌았다. 하지만 사장이 F상무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질문하기 시작하며 그의 승승장구가 무너졌다. 처음엔 가감없이 F상무를 이야기하다 어느 순간 근거 없는 소문까지 입에 올리게 된 것이다. 한두 번 상황이 이어지자 사장은 오가는 맞장구 없이 조용히 E전무를 응시했다. 퇴직하던 날 그를 찾아온 F상무는 한참을 망설이다 찻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어갔다.
“사장님이 그러더군요. 선배가 제 학교 선배라 망설였는데 오히려 시시콜콜한 것까지 세세하게 답해줬다고. 임원들과 돌아가면서 점심식사 할 때 사장이 묻는 고정 레퍼토리가 누가 어떠냐는 겁니다. 제겐 선배를 묻더군요. 그때 그러시더군요. 누가 임원이 되면 이상하게도 다른 임원들의 투서가 는다고.”
[안재형 기자 ssalo@mk.co.kr / 사진 =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9호(2012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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