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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지방 갑부 보고서…내수시장 새 화두 지역 큰손 잡아라!
입력 : 2011.09.28 17: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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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내수시장 확대론’의 핵심화두로 ‘지방 갑부’들이 부상하고 있다. ‘사람은 나서 서울로 보내고…’는 옛말이다. 좀처럼 커지지 않는 국내시장에서 매출 신장을 꿈꾼다면 그 해답은 ‘수도권’이 아니라 ‘지방’에서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지방시장의 부상을 나타내는 징후는 전 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건설사, 백화점, 수입자동차회사 등은 ‘지방 큰손’ 잡기에 혈안이 된 상태다.
통계청이나 국민은행 등 금융기관에서도 지방 갑부를 따로 떼어내 통계를 내진 않고 있다. 다만 여러 가지 통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방 알부자의 실체를 어렴풋이 가늠해 볼 수 있다.
지방 갑부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자료로는 국세청 납세통계가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종합소득금액 상위 10% 신고자는 전국에 총 35만7081명이다. 이 가운데 36.7%인 13만1000여 명이 지방에 주소지를 두고 있는 ‘지방 갑부’로 분류된다. 이들에 대해서는 국세청이 따로 통계를 낸다. 다만 최근 몇 해 동안 종합소득세 상위 10%의 분포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서울 및 수도권이 63~64%를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36~37%가 수도권 외 지방에 살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실제로 지난 2009년 전체 근로자 1429만5000명 중 연봉 1억원이 넘는 근로자는 19만7000명으로, 이 가운데 지방 거주자는 26%에 불과했다. 수도권에는 월급쟁이 부자가, 지방에는 부동산 부자가 많다는 뜻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부자들은 자기가 다달이 벌어들이는 수입에 근거해 소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전체 재산을 염두에 두고 크게 지르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이밖에도 세무서 신고용인 만큼 소득이 ‘깐깐하게’ 잡힌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지방은 이미 고급 수입차 블루오션 롤스로이스 팬텀. 기본가격은 6억8000만원이지만 이것저것 옵션을 끼우면 7억원 중반을 훌쩍 뛰어넘는 초 럭셔리 승용차다. 이 귀하신 자동차가 지난 6월 부산과 경남 지역을 조용히 순회했다. 목적은 지방 갑부를 위한 마케팅이었다.
롤스로이스모터카서울 관계자는 “이 지역 자산가들 중 롤스로이스를 쇼핑리스트에 올려놓은 몇몇 분들이 연락해 와 부산을 들렀다 대구에서도 시승시켜 드리고 올라왔다”며 “타본 분들이 6개월 내 반드시 구매하지는 않지만 언제라도 이 정도 가격은 지불할 경제력을 갖춘 분들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돈 냄새에 관한 한 수입차 업체의 육감도 만만치 않다. 이런 수입차 업체들이 지난 상반기 국내에서 새롭게 문을 연 전시장 및 서비스센터는 총 23곳이었다. 얼핏 서울 강남 지역이나 분당·일산 등 수도권 지역에서 이들의 점포가 생겼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무려 48%가 서울·경기(인천 포함)를 제외한 지방도시에 깃발을 꽂았다. 참고로 작년까지 전국 수입차 전시장 중 지방 비중은 45%였다.
상반기 가장 많은 신규 딜러점을 모집한 렉서스는 전체 7곳 중 5곳(부산, 울산, 포항, 창원, 전주)을 지방에 뒀다.
포드의 경우에는 6월 말 강원도 원주시 관설동에 총 면적 615m²(약 186평) 규모의 단독 건물을 마련해 신차 7대를 들여 놓고 강원 지역 판매를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특히 차량 전시 및 구매 상담, 서비스 기능에다 부품창고까지 한 지붕 아래 갖춰진 ‘3S(Sales, Service, Storage)’ 형태의 지점은 이제까지 수도권에만 존재했던 것이었다. 원주 지역 매출에 대한 수입차 업계의 기대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포드도 BMW, 아우디, 재규어, 랜드로버에 비하면 다소 늦게 움직인 편이다. 특히 업계 1위 BMW는 일찌감치 이 지역 성장 가능성을 보고 서울 지역서 딜러사업을 하던 업체에 원주 지역 딜러권을 맡기면서 지방 수입차 소비 폭발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포드세일즈서비스코리아 관계자는 “원주는 혁신도시 및 기업도시가 조성 중인 최고 성장 거점 도시”라며 “앞으로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한국토요타 관계자는 “올 들어 지방 판매망을 크게 늘린 것은 당장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미래의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면서 “아반떼급 차를 구매한 사람이 쏘나타, 그랜저로 옮겨간 이후에는 결국 수입차를 찾게 되기 때문에 선제적 투자가 필요하다”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인터넷이나 카탈로그 등을 통해서도 저희 차를 접할 수 있지만 직접 오가다 매장에서 차를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며 “견물생심이 딱 들어맞는 경우”라고 덧붙였다.
토요타와 렉서스는 당초 판매와 서비스 기능 등이 한 건물에서 지원되는 3S 딜러점을 원칙으로 했지만 올 들어선 3S 정책을 포기하면서까지 판매점 위주로 지방 거점을 확대하고 있다. 그만큼 업체들끼리 지방 거점 확보 속도 경쟁이 붙었다는 증거다.
해운대 주상복합 아파트 분양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친 부산 지역은 특히 수입차 진출 경쟁 1번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탈리아 스포츠카 페라리·마세라티를 수입 판매하는 FMK는 지난달 18일부터 21일까지 부산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VIP 고객 및 이 지역 잠재고객들을 상대로 시승행사를 진행했다. 마세라니 콰트로포르테나 페라리 캘리포니아 등 한 대에 최저 3억원이 넘는 고가차 4대를 동원, 보험료와 진행비만 억대가 넘는 행사다. 국내에 서울 신사동 한 곳에만 매장이 있는 FMK 측은 현재 부산 지역에 신규 딜러 모집을 벌이고 있다.
FMK 측은 “지난해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페라리 전시 행사를 열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나 많은 가망고객들이 몰려들었다. 최상위 브랜드에 대한 지역 소비자들의 잠재 욕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포르쉐가 국내 2호 매장을 해운대구 우동에 열었고,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차 브랜드인 마이바흐 역시 우동에 매장을 갖추고 있다.
폭스바겐 그룹의 고급차 브랜드인 벤틀리도 지난해 5억1800만원짜리 최고급차 뮬산을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국내에 첫 선을 보여 화제가 됐다.
롤스로이스를 판매하는 코오롱글로텍 역시 부산에 2호 매장을 내는 것을 검토 중이다.
통 큰 쇼핑, 한번에 1000만~2000만원씩신세계 센텀시티(좌), 롯데백화점 광복점(우)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살롱쇼에 온 부산, 대구 등 고객들이 1인당 구매하는 금액은 1000만~2000만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도 대구, 청주 지역 고객들을 대상으로 ‘명품 버스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프로그램에는 쇼핑 외에도 백화점 식당가에서의 점심식사와 미술관 방문, 콘서트 관람 등의 문화공연 체험이 포함된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서울 지역 백화점을 주로 이용하는 지방 고객은 강원도 거주 고객 비중이 전체 고객의 19%를 차지해 가장 많다. 다음으로 부산(14%), 충남(13%), 울산(8%) 순이었다. 이들 지방 고객들이 선호하는 점포는 단연 명품족으로 넘쳐나는 서울 압구정 본점이라고 한다.
신세계백화점도 지방 갑부에 공을 들이고 있다. 특히 부산을 비롯한 영남권 갑부를 겨냥해 문을 연 신세계 센텀시티는 지난 상반기 매출이 26.3% 급신장하는 기염을 토했다.
초고액 자산가 프라이빗뱅킹도 지방으로 증권사 역시 부자들의 돈 냄새를 가장 먼저, 가장 구체적으로 포착하는 곳이다. 지방 갑부를 잡기 위한 프라이빗뱅커들이 움직임이 빨라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삼성증권은 오는 10월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초고액 자산가(VVIP)들을 상대로 자산관리서비스를 제공하는 PB센터(SNI)를 개설한다는 계획이다. 초고액 자산가 대상 증권사 PB센터가 지방에 진출하는 첫 번째 사례가 될 전망이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을 고려하면 충분히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삼성증권 측의 설명이다.
지방갑부의 힘은 부동산?대구 부촌 범어동의 한 아파트
1~6월 상반기 전체 누적 숫자를 따져 봐도 마찬가지 결론이다. 수도권은 지난 5년 평균치보다 0.5% 늘어나는데 그쳤지만 지방에선 47.2%나 증가했다. 가히 폭발적인 증가세다. 전문가들이 부동산시장을 지방경기 활성화의 진원지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 들어 지방에선 아파트 분양도 활기를 띠고 있다. 죽을 쑤고 있는 수도권 아파트시장과는 딴판이다.
김신조 내외주건 사장은 “부산을 비롯해 분양이 잘되는 곳에선 ‘빨리빨리 분양’이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방 아파트 시장뿐만이 아니다. 지방 갑부를 대상으로 한 수도권 내 고급주택 마케팅도 치열하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소재 코리아CC 챌린지 코스에 자리 잡고 있는 투스카니 힐스가 그런 예다. 총 91실 규모의 단독, 듀플렉스, 타운형의 3가지 타입으로 구성돼 있는데 분양가격은 9억~39억원에 달한다. 쌍용건설은 지방 갑부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샘플하우스 ‘1박2일 숙박 체험’을 실시하고 있다. 지방에서 어렵게 올라와 잠깐 보고 가는 게 아니라 아예 하룻밤 자면서 직접 체험해 보라는 배려다.
SK건설도 경기 용인시 기흥구 중동의 고급 타운하우스인 동백 아펠바움 2차에 대한 ‘1박2일 입주 체험’을 진행 중이다. 분양가는 3.3㎡당 평균 2200만~2400만원 선으로 주택형에 따라 12억~22억원 선이다.
지방 수출산업 호황도 한몫 단순히 부동산 경기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부동산 경기가 주요한 이유인 것은 분명하지만, 성장한계에 봉착한 수도권 내수시장 여건과 자동차·중공업 등 지방 수출산업의 활성화가 또 다른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권은 더더욱 관심지역이다. 부산을 비롯해 거제, 창원, 울산 등을 아우르는 이 지역에는 최근 몇 년 새 고소득을 올리는 주요 대기업 임원들과 중견, 중소기업 CEO와 전문직 종사자들이 급증했다. 이 산업 벨트에 위치한 주요 제조업체들과 그 부품업체들의 실적이 최근 몇 년 새 일취월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 해운대에서 거주하는 한 사업가는 “올 들어 해운대 고급 주상복합아파트에 울산, 창원 지역의 알부자들이 상당수 이주해 왔다”며 “대기업 수출 경기를 톡톡히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 들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땅값도 지방 갑부들을 키우는 재료가 된다. 수도권 집값은 줄곧 곤두박질이라지만 땅값만큼은 올 들어 8개월째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지방에서 터진 호재들이 땅값을 끌어올리고 있다. 세종시 이전, 과학벨트 선정,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 등의 지역 호재가 잇따르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땅값 과열까지 거론될 정도다.
소비성향 변화의 바로미터 역할을 하는 골프장 매출을 봐도 지방 갑부들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가 발간한 '레저백서 2011'에 따르면 회원제 골프장의 이용객 수 비중은 수도권은 2010년 38.6%로 전년보다 1.0%포인트 하락했다. 하지만 지방 대부분에서는 그 비중이 증가했다. 강원권이 8.0%로 전년보다 0.2%포인트 감소했을 뿐 대구, 경북은 11.0%로 0.7%포인트, 광주, 전남권은 6.5%로 0.6%포인트 증가했다.
■ 지방 갑부 그들은 누구인가 백화점, 수입차, 건설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지방 갑부들의 소비패턴에는 일정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들은 지역에서 알짜 중견기업을 일군 기업가이거나 그 자손들로 ‘이 정도 성공했으면 남 눈치 볼 것 없이 좀 써도 되겠다’는 공통된 소비성향을 보인다는 분석이다. 지방에서 개업한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도 지방 갑부에 포함되는 직군들이다.
이들 지방 갑부의 궁극적 벤치마킹 대상은 서울 수도권이 아니라 해외다. 서울 압구정동의 백화점을 이용하더라도 그들의 시선은 그곳에 있는 해외 명품일 뿐이다. 압구정동의 분위기는 쇼핑 분위기를 돋우는 양념 또는 참고대상일 뿐이다. 수시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계층이기 때문에 글로벌한 취향을 갖췄다.
또 하나 공통점은 ‘형님이 사면 나도 산다’는 소비심리다. 지역사회에서 경제력 있는 중년 남성들의 ‘이너서클’에서는 “형님이 먼저 사면 저는 이후에 사겠다”거나 “시내에 이 차가 몇 대 깔리면 그 때 고려해 보겠다”는 식의 겸손형 ‘집단동조소비’ 성향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일반인의 눈치를 볼 이유는 없지만 지방 갑부들 사이에서 형성된 커뮤니티에선 아직도 ‘모난 돌 정 맞는다’는 정서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번 물꼬를 트면 사정이 달라진다. 몰아치듯 마케팅 효과가 집중돼 나타나기도 한다. 한 고급차 딜러는 “해당 지역 집단의 수장 격인 분이 구매하도록 상당 시간 공을 들이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전문가들은 “내수업체의 눈길이 지방에 쏠리는 것 자체는 반가운 일”이라는 반응이다. 지방갑부 13만 명을 내수시장 확대를 위한 요긴한 축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양극화 때문이다. 지방에서도 지역 간 격차가 심하고, 같은 지방에서도 서민이 아닌 ‘갑부’ 중심으로 경기 개선을 체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지방에서 소비된 자금이 해당 지역에서 다시 돌지 않고 수도권으로 빨려드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이진우 / 매일경제 경제부 차장 jeanoo@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2호(2011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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