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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포퓰리즘(Populism)의 명암,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유혹
입력 : 2011.09.28 16: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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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주민을 대상으로 한 ‘퍼주기 정책’은 엄청난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작용은 한때 환호했던 동독 주민의 몫이었다. 이는 임금생산에 따른 생산비용 상승, 물가상승 및 동독제품에 대한 수요 감소로 이어졌고 동독지역에서 대규모 실업사태를 야기했다. 통일 2년만에 동독 주민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한국 정치판의 포퓰리즘 대공습포퓰리즘이란 말에는 이분법적 흑백논리 등 어둡고 음침한 이미지가 존재한다.
‘포퓰리즘(Populism)의 대공습’. 한국 정치판에서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미 여(與)와 야(野),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내년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포퓰리즘이란 말에는 어둡고 음침한 이미지가 존재한다. 대중을 상대로 직접 호소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선동가, 기존 권위에 대한 타격, 반(反)엘리트 주의, 이분법적 흑백논리, 사회불안을 초래하는 억지 주장 등이 포퓰리즘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다.
하지만 포퓰리즘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의미는 말 그대로 ‘인민주의’, ‘대중주의’다. 좋거나 나쁘다는 선입견이 없었다. 대중의 불만을 해소해 얻게 된 인기를 죄악시할 순 없다. 따지고 보면 선거나 정치 자체가 대중의 인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구에서는 포퓰리즘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웹스터 사전은 포퓰리즘을 ‘특권층에 맞선 투쟁에서 일반대중의 권리와 힘을 지지하는 정치원리’라고 담담히 풀이한다. 캠브리지 사전에서의 정의는 ‘일반인의 욕구와 소망을 대변하려는 정치적 사고나 행동’이다. 일반대중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포퓰리즘을 국가주의(statism)나 엘리트주의(elitism)의 대칭점에 두는 시각들이다. 소수가 아닌 다수 대중의 정치적 의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 이념이라는 얘기다.
포퓰리즘 논란이 벌어지는 주된 영역이 복지 분야라는 점도 조심스러운 대목이다. 복지정책의 강약은 한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조정타와 같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이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발원지격인 19세기 러시아, 프랑스, 미국에서는 포퓰리즘이란 용어가 산업화, 외국자본 등에 반대했던 농민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러시아의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이 그 시초다. 남북전쟁 후 태환제도에 반대했던 그린백(Greenback)당이나 19세기 후반 등장한 미국 인민당도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포퓰리스트’라고 불렀다. 특히 남미에서는 권력을 잡은 정치세력이 야당 등 다른 정치집단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대중을 상대로 직접 정치를 펴는 방식을 포퓰리즘으로 지칭해왔다. 대의민주주의 원칙을 벗어나 직접 대중에게 호소하는 형태다.
그러나 소수의 엘리트와 다수의 대중으로 양극화된 남미 현실은 포퓰리즘이란 용어에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웠다. 여기에 미국 등 선진국 학자나 언론이 남미 정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포퓰리즘을 거론했던 것도 ‘포퓰리즘은 나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최근에는 ‘포퓰리즘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라거나 ‘나쁜 포퓰리즘, 좋은 포퓰리즘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이나 글이 잇따르고 있다.
최근에는 집권여당의 “우파 포퓰리즘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해 논란이 빚기도 했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대표 선출 직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의 친서민정책은 헌법적 근거를 가진 좋은 포퓰리즘”이라고 말했다. 흔히 나치즘, 파시즘 등 과도한 국수주의를 의미하는 유럽식 우파 포퓰리즘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려놓은 셈이다.
그러나 좋은 포퓰리즘은 없다. 말꼬리나 단어의 어원을 따질 일이 아니다. 역사적인 경험이 알려주는 진실이다. 실제로 포퓰리즘에 대한 이미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나빠져 왔다. 최근에는 서양 정치판에서도 ‘인기영합주의’를 통칭하는 용어로 포퓰리즘의 의미가 좁혀지고 있다.
한국적 포퓰리즘 = 표(票)퓰리즘 한국에서도 포퓰리즘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다. ‘표(票)퓰리즘’이라는 한국식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다. 이는 우파나 좌파, 심지어 중도까지 거의 모든 정치세력이 표를 의식해 앞 다퉈 포퓰리즘을 이용하는 행태를 비꼰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어느 정치인도 스스로 ‘포퓰리스트’로 불리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낙인찍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좌파가 복지예산 확충을 주장하면 우파는 재정건전성 훼손을 들어 포퓰리즘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공정사회, 상생협력도 우파 일각에선 ‘좌클릭 포퓰리즘’으로 비난한다. 반대로 감세를 주장하는 우파에 대해 좌파는 기업만 살찌우는 포퓰리즘이라고 공박한다. 여기에 관료들도 가세했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무상복지를 ‘주술(呪術)’로 불렀다. 또 박재완 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치권의 반값 등록금 주장을 ‘가담항설(街談巷說)’로 표현했다. 길거리나 마을에 근거 없이 떠도는 이야기라는 의미다.
특히 선거 국면이 다가오면 좌우 모두 경쟁 상대에게 포퓰리스트라는 굴레를 씌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포퓰리즘의 정의에 대한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학문적 용어로 규정될 수 없다는 얘기다.
다만 서병훈 숭실대 교수는 고전적 포퓰리즘은 ‘인민 주권의 회복 약속’이었지만 현대의 포퓰리즘은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가 또 다른 핵심요소라고 지적한다. 장기적 개혁을 제시하지 않고 즉각적이고 모순적인 약속을 남발하는 게 바로 현대 포퓰리즘의 공통점이라는 의미다.
참을 수 없는 기준의 모호함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무료교육, 무료의료정책 등을 추진해 급속한 재정 악화와 극심한 경기침체를 초래한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즈 대통령은 남미식 포퓰리즘의 또 다른 전형으로 꼽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정치행위라는 것이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고 모든 정책에는 재정 부담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로 두부 자르듯이 포퓰리즘 여부를 명확하게 가리는 기준을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도 하거니와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편견을 불러일으키거나 뜻밖의 피해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심각한 폐해를 양산하는 포퓰리즘 정책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심각한 계층 간 갈등을 유발한다는 점과 국가재정의 건전성을 훼손시킨다는 점이 그렇다. 계층 간 갈등과 무책임한 재정 확대는 포퓰리즘 정책의 공통점이다.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배운 자와 덜 배운 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를 갈라놓고 서로 증오하게 만듦으로써 심각한 사회문제를 초래한다.
이런 가운데 문제해결을 정부 재정에 의존함으로써 나라 살림을 파탄 나게 하는 정책이 바로 포퓰리즘 정책인 것이다. 이를 거꾸로 해석하면 계층 간 갈등과 무책임한 재정확대는 포퓰리즘 정책을 가려내는 유용한 ‘잣대’가 되기도 한다.
포퓰리즘을 걸러내기 위해선 사회구조 변화를 감안한 국가 전체의 방향성을 놓고 먼저 지도를 그릴 필요도 있다. 예컨대 보육예산 확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도 권고하는 사안이다. 무상보육을 무조건 포퓰리즘으로 치부하는 건 낙인찍기에 가깝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정책의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 이필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포퓰리즘 정책을 판별할 수 있는 비교적 명쾌한 기준을 제시한다. 바로 정책의 진의성, 품질, 지속가능성이다.
반값 등록금을 예로 들면 논의 주체인 정치권은 진단과 처방에서 진정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등록금 할인율 경쟁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고교 기능교육과 대학교육 간 엄혹한 차별이 존재하는 한국의 고용시장 현실, 대학 구조조정 문제가 함께 다뤄져야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 정부 재정 여력에 눈을 감고 있는 만큼 정책의 지속가능성도 현저히 떨어진다. 반값까지는 아니더라도 과도한 등록금 부담을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이런 노력이 포퓰리즘으로 빠지지 않으려면 정책의 품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 등록금에 영향을 주는 각종 정책환경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비용 대비 최적의 정책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제도와 관행을 바꿔나가는 것이다.
이 교수는 “국민이 고통스러우니까 정치권의 포퓰리즘 정책이 남발하는 것”이라며 “정말 심각한 문제라면 문제를 공개적으로 들춰내서 구조적이고 전문적인 처방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연쇄효과로 경제전반에 해악전문가들은 역사적으로 포퓰리즘의 극복 여부는 선진국 진입의 시금석 역할을 해왔다고 충고한다. 흔히 거론되는 사례가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의 구조개혁 사례다.
더 큰 걱정은 사교육 시장이 과열될 가능성이다. 등록금을 낮춘 만큼 각 가정에 여윳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등록금이 10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인하됐다고 가정해보자. 이론적으로 예비대학생과 학부모는 대학 진학 이후 쓸 요량으로 저축해뒀던 학자금을 미리 앞당겨 과외 등 사교육비로 쓸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지금 당장 사교육에 집중 투자하면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탓이다. 굳이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 유윤하 KDI정책대학원 교수는 “학부모와 예비대학생 입장에서는 더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는 인하된 등록금만큼을 다 쓰고 혜택을 누리는 편이 낫다”며 “사교육 시장이 과열될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물론 국민세금을 쏟아 넣은 등록금 인하분 모두가 사교육 시장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사교육에 투자하는 것보다 가계 빚을 갚거나 소비지출이 급한 가정도 많을 수 있다. 또 등록금 인하 당시에 재학 중인 대학생 가정은 등록금 인하분이 고스란히 가처분소득 증가분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상당부분이 사교육으로 흘러들 것이란 가정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병 주고 약 주는 공공요금 차등 요금제1990년대 통일을 달성한 독일도 심각한 과잉복지에 따른 포퓰리즘의 망령에 시달렸다.
예컨대 콜렛·헤이그 규칙을 활용해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내세우는 공공요금 차등 요금제는 이미 공공물가 인상이 기정사실화한 마당에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눈가림’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콜렛·헤이그 규칙이란 여가와 관련된 보완재에는 높은 세율을 적용하고 대체재에는 낮은 세율을 도입하는 차등적인 최적과세 이론을 말한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전·월세 상한제, 분양가 상한제가 결과적으로 공급을 위축시켜 되레 수급 불균형을 촉진하는 포퓰리즘 정책이 됐다고 꼬집는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의 ‘초과이익공유제’를 심각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지목한다. 조 교수는 “이해 당사자가 이윤을 나누는 방식에 동의하고 계약을 통해 서로의 경제적 처지를 개선하는 게 동반성장”이라며 “이익공유제가 강제되면 대기업의 부품 해외조달 등으로 오히려 협력업체가 설 땅이 좁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제 균형 무시… 저소득 계층 황폐화 심화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의 몰락은 지금도 포퓰리즘의 대표적인 폐해 사례로 거론된다.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의 몰락은 지금도 포퓰리즘의 대표적인 폐해 사례로 거론된다. 1946년 집권한 후안 페론과 부인 에바 페론은 저소득층 임금을 올리고 복지혜택을 강화했다. 외국 자본을 배제하고 철도나 전화회사 국유화를 단행했다. 연간 20% 이상 임금이 올라 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해졌고 재정지출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인플레이션 현상도 수십 년간 이어졌다. 결국 1940년 세계 4위 경제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이른바 ‘페로니즘’을 계기로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페론 정권이 빈민구제 재원 마련을 위해 교회의 모든 수익에 세금을 부과한 일이다. 결국 ‘이해관계’에서 뒤틀린 군부와 가톨릭이 합세해 페론을 축출했다.
하지만 페로니즘은 지금도 아르헨티나를 지배하고 있다. 모든 대학 교육이 무상이고 국립 의료시설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한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현 대통령은 페론당 출신으로 ‘제2의 에바 페론’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한번 포퓰리즘의 덫에 걸리면 빠져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베네수엘라는 만성적 재정적자와 정치사회 불안이라는 남미식 포퓰리즘의 또 다른 전형으로 꼽힌다. 1998년 56.2%의 지지를 받으며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당선된 우고 차베즈는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무료교육, 무료의료정책 등을 추진함으로써 재정 상태가 급속히 악화됐고 극심한 경기침체가 초래됐다. 지난 2001년 집권했던 태국의 탁신 전 총리는 농가부채 탕감과 무상 의료·교육을 내세웠다. 농민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중산층의 반발에다 비리로 축출됐지만 탁신의 망령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붉은 셔츠(반정부)와 노란 셔츠(친정부) 간 유혈 충돌까지 빚었고 최근에는 그의 여동생이 정치적 돌풍을 일으키며 태국 총리가 됐다.
유럽 재정위기의 근원지인 그리스는 2010년 4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전까지 미성년 자녀가 있고 15년 이상 직장에 근무한 사람이면 누구나 연금 수혜자격을 줬다. 30대 중반이면 연금을 탔다. 이상화 자유기업원 연구원은 “2007년 그리스의 중등교사 1인당 학생 수는 7.5명으로 핀란드(13.1명)의 절반이었다”며 “방만한 재정 운영의 한 단면”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대통령 선거 때마다 포퓰리즘적인 공약이 등장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 대선 때 정주영 후보의 ‘반값 아파트’와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의 ‘농가부채 탕감’이다. 2002년 노무현 후보의 행정수도 건설 공약도 충청권에서 ‘재미 좀 봤다’는 표현처럼 표를 의식한 측면이 강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 대선에서 ‘반값 등록금’을 공약에 적시했다.
국회 차원의 포퓰리즘도 문제다. 18대 국회에서 5월20일까지 발의된 법률안 수는 1만1210건에 달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국회를 통과해 실제 집행되는 법과는 거리가 먼 ‘실적과시용 법률안’이라는 지적이다. 목적이 그렇다보니 내용도 불투명할 뿐더러 정당별 차별성도 없다. 기업형 슈퍼마켓(SSM) 규제, 전세가 상한제, 대학등록금, 무상보육, 공공비축미 증가, 서민금융 지원 등 여러 이슈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물론 민주노동당까지 엇비슷한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상당수의 포퓰리즘 정책이 ‘민주노동당→민주당→한나라당’의 순으로 전이돼 왔다고 지적한다. 소수 야당이 제기한 인기영합정책이 선거판에서 ‘표’가 된다는 사실이 입증되자 제1야당은 물론이고 집권당까지 휩쓸려 들어갔다는 분석이다.
국가와 서민을 살리는 반(反)포퓰리즘 포퓰리즘 정책은 한번 도입되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과잉복지 문제를 해결하려다 국민적인 저항에 시달리고 있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국가들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역사상 포퓰리즘을 훌륭히 극복해낸 사례도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역사적으로 포퓰리즘의 극복 여부는 선진국 진입의 시금석 역할을 해왔다고 충고한다. 흔히 거론되는 사례가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의 구조개혁 사례다.
1970년대 영국은 복지지출 증가와 실업난, 강성노조 등으로 경제 활기를 급속히 상실했다. 급기야 1976년에는 외환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대처 수상은 1979년 보수당의 승리로 집권에 성공한 사정이 달라졌다. 전 정부(노동당)가 추진했던 각종 국유화 정책과 복지정책에 대해 대대적인 가지치기에 돌입했다. 복지지출을 삭감하는 대신 세금을 인하했으며 비효율적인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인플레이션 억제에 주력하는 가운데 강성 노조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응해 나갔다. 작은 정부를 강조하면서 민간과 기업 활동의 자율성 보호에 앞장섰다.
이른바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한 ‘대처리즘’이다. 실업문제의 심화, 가족해체 촉진 등의 부작용이 거론되고 있지만 영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는 큰 이견이 없다. 1990년대 통일을 달성한 독일도 심각한 과잉복지에 따른 포퓰리즘의 망령에 시달렸다. 하지만 사민당 출신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2003년 발표한 ‘아젠다 2010(Agenda 2010)’을 기점으로 복지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경제 활성화, 지속가능한 사회보장제도를 기치로 내걸었던 슈뢰더 총리의 정책은 이후 메르켈 총리가 추진하는 경제개혁으로 이어졌다. 포퓰리즘의 원산지격인 남미에서도 극복사례가 나오고 있다. 한때 초등학교를 중퇴한 과격한 노조지도자였던 룰라는 2002년 노동자당(PT)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중도실용 노선을 묵묵히 고수했다. 강력한 인플레이션 억제정책과 친기업 정책으로 경제를 안정시킨 것은 물론 브라질 경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성공한 지도자로 꼽힌다. 대중적 인기도 대단해 지난해 퇴임당시의 지지율이 90%를 육박했을 정도였다.
한국에선 포퓰리즘 극복사례로 1980년대 초반 강력한 안정화 정책을 추진했던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의 사례가 꼽힌다. 당시 안정·자율·개방을 기치로 내건 김 수석은 물가안정을 위해 여당과 업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산동결, 임금 인상 억제, 추곡수매가 인상 억제, 수입 자유화, 금융실명제 추진 등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국민과 기업 입장에서는 당장 고통이 체감되는 정책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1980년대 초고도성장의 밑바탕이 됐다. 이 기간 동안 한국 경제는 탄탄한 중산층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후 한국의 중산층은 정치적 민주화, 경제사회적 선진화의 기초 여건으로 작용하게 된다.
소득 2만 달러 ‘피로감’이 포퓰리즘 논란 배경 표를 의식한 정치권의 포퓰리즘은 사실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포퓰리즘 논쟁이 벌어지는 것일까.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서라지만 총선과 대선 시기가 각각 내년 4월과 12월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최근의 포퓰리즘 논란은 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일부 전문가들은 최근의 포퓰리즘 논란이 소득 2만 달러 문턱에서 오는 ‘피로감’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는 지난 2007년 2만 달러 시대를 돌파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을 받아 1만 달러대로 주저앉아야 했다. 한국이 2만 달러대로 재진입하기 위해서는 3년이 더 필요했다. 지난 2010년에야 2만759달러로 간신히 재진입에 성공했다. 이 기간 동안 경제적으로 한국 국민들은 심각한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했다. 바로 양극화다. 여기에 또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이 정부와 정책에 대한 낮은 신뢰도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4~5년 간 2만 달러 문턱에서 국민들이 굉장히 어렵게 버텼다. 그냥 주저앉을 수 있는데 참고 버틴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텐션(긴장)이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한 교수는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위기 극복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에 국민 신뢰가 훼손된 것이 오늘날 포퓰리즘 정책이 만연하게 된 구조”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와 정치권이 국민에게 차근차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봤자 국민은 차근차근이라는 말을 신뢰하지 못하고 보다 즉각적인 정책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고 설명했다. 단적인 예가 반값 등록금 공약이다. 반값 등록금은 지난 2006년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 때마다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불과 5년 전에는 현실성 없는 공약으로 치부할 수 있었던 국민의식이 지금에 와서 엄청난 갈증을 분출한 것도 더 이상 감내하기 어려운 경제 현실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한 교수는 “지난 무상급식 논란도 그렇지만 고차방정식으로 풀어야 할 반값 등록금 문제가 정치 이슈화하는 과정에서 일차방정식이 됐다”며 “고차방정식을 일차방정식으로 단순화한 정책이 어필할 만큼 생활고 등 국민적 피로감은 심각하다”고 분석했다.
극복의 두 가지 역설인류 역사상 포퓰리즘을 확대 재생산시키는 핵심적인 자양분은 대중과 선동적인 리더십이었다. 그런데 포퓰리즘을 극복하는 방법 역시 이 두 가지에 달려 있다.
[이진우 / 매일경제 경제부 차장 jeanoo@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1호(2011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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