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동전쟁 PartⅠ ③ 유류할증료] 에너지 전쟁이 바꾼 여행 트렌드 “여름휴가 멀리 한 번보다 가깝게 두 번”

    입력 : 2026.04.09 17: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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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은 늘 설렘으로 시작됐지만, 올봄 검색창 앞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몇 달 전만 해도 갈 만하다고 여겼던 유럽 항공권이 어느새 수십만원, 많게는 백만원 가까이 뛰었다. 합리적인 가격에 항공권을 구매할 수 있는 시기였던 여름휴가 3~4개월 전 전쟁이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났다. ‘결제 버튼이 쉽사리 눌리지 않는다’라는 커뮤니티의 반응이 직접 찾아보면 격하게 체감된다. 여행을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가고 싶은 마음과 감당할 수 있는 비용 사이의 간격이 갑자기 너무 벌어졌기 때문이다.

    유가가 흔들리자 가장 먼저 비싸진 것은 ‘하늘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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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의 출발점은 중동전쟁이 자극한 에너지 시장이다. 3월 23일 브렌트유는 배럴당 112달러 선에서 움직였고,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 때문에 공급 불안 우려가 계속되고 있다. 항공업계에 더 직접적인 충격은 제트 연료다. IATA는 최근 주간 평균 제트연료 가격이 배럴당 175달러까지 올랐다고 집계했다. 지난해 말 IATA가 2026년 평균 가정치로 제시했던 88달러와 비교하면 시장이 얼마나 급격히 흔들렸는지 단번에 드러난다. 항공사로서는 운항비의 핵심인 연료비가 예상 범위를 크게 넘어선 셈이다. 이 충격은 곧바로 소비자가격으로 번졌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4월 한국 출발 국제선 유류할증료를 공지하면서 적용 기준을 모두 ‘발권일’로 명시했다. 다시 말해 같은 5월 여행이라도 3월에 끊느냐 4월에 끊느냐에 따라 실제 지급액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3월 23일 기준 인천~뉴욕 편도 유류할증료는 3월 9만 9000원에서 4월 30만 3000원으로, 유럽 노선은 7만 9500원에서 27만 6000원으로, 인천~방콕은 3만 9000원에서 12만 3000원으로 뛰었다. 표면적으로는 ‘할증료’지만, 소비자에게는 사실상 항공권 총액 인상으로 체감된다.

    중동 허브공항이 멈추다

    문제는 가격이 오른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거리 노선은 운항 자체의 불확실성까지 커졌다. 로이터통신은 “중동 허브 공항 차질 이후 아시아-유럽 노선에서 항공권 가격이 급등했고, 일부 여행객은 대체편을 구하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비싼 우회노선을 택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유럽 항공사들도 항공유 가격 급등과 우회 운항 장기화가 더 높은 운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장거리 여행이 비싸진 동시에 피곤해지고, 일정까지 불안정해진 것이다. 한 여행사 관계자는 “최근 신혼여행을 미루거나, 유럽 가족 방문 일정을 연기하거나, 동남아 여행을 접고 국내 여행으로 방향을 튼 사례가 늘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가족 단위 여행객은 충격이 더 크다. 1인당 몇십만원 오른 비용이 3인, 4인으로 불어나면 총액 차이가 금세 백만원 단위가 된다.

    올여름 휴가 ‘비용 방어형 여행’이 대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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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사람들이 휴가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행 욕구는 여전하다. 다만 방식이 달라진다. 비싸고 멀고 변수 많은 장거리 대신, 짧고 가깝고 일정 조정이 쉬운 여행지가 강해지는 흐름이다. 수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계산적인 수요로 재편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국면에서 유리한 여행지는 대체로 비행시간이 짧고 직항 선택지가 많으며, 전체 여행 예산을 통제하기 쉬운 곳들이다. 일본, 대만, 중국, 베트남, 필리핀 같은 단거리 노선이 대표적이다. 국내 여행 역시 반사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장거리 여행 한 번에 들어갈 예산으로 제주나 부산, 강릉 같은 국내 여행을 두 번 이상 다녀올 수 있다는 계산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가성비’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올해 여름의 핵심은 비용을 아끼는 여행이 아니라, 비용 변동성을 줄이는 여행에 가깝다. 스카이스캐너는 최근 ‘K-직장인 여행 트렌드’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인 직장인 1000명 가운데 62%는 올해 여행을 짧게 자주 가겠다고 답했다. 국내 여행 계획은 89%, 해외여행 계획은 75%로 여전히 높았지만, 여행 횟수는 국내 평균 2.7회, 해외 평균 1.8회로 쪼개졌다. 해외 선호지는 일본·중국·대만 등 3시간 이내 단거리 지역이 41%로 가장 많았고, 여행 시점은 여름휴가철이 65%로 1위였다. 여기에 3일 또는 2일 연차를 붙여 다녀오겠다는 응답이 많았고, 금요일 출발 선호도도 높았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취향 조사가 아니다. 전쟁과 유가, 환율, 유류할증료, 항공편 불확실성이 동시에 커진 시장에서 직장인들이 내놓은 현실적

    해법에 가깝다. 멀리 한 번 크게 떠나는 대신, 가까운 곳을 더 자주, 더 짧게, 더 유연하게 가겠다는 것이다. 올여름 휴가 트렌드는 이미 정해졌다. ‘호화로운 장거리’가 아니라 ‘예산을 통제할 수 있는 단거리’, ‘길게 한 번’이 아니라 ‘짧게 두세 번’이다. 여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전쟁은 사람들이 떠나는 방식부터 바꾸고 있다.

    스카이스캐너는 “응답자의 47%가 주말 전후 연차 사용을 선호하고, 특히 금요일 출발 비중이 39%로 가장 높다”라고 분석했다. 올여름 여행 시장의 승자는 가장 먼 곳이 아니라, 가장 효율적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일 가능성이 커졌다.

    [박지훈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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