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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에 뜨는 ‘프라이빗 이코노미’… ‘불특정 다수’ 대신 ‘우리끼리만’, 광장 시대 가고 사랑방 경제로
입력 : 2020.04.01 17: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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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로 불특정 다수와의 접촉을 꺼리는 소비자가 늘자 소수 정예만을 위한 ‘프라이빗 이코노미’가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에도 취향, 개성에 따라 소수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소비가 확산돼 온 트렌드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르 메르디앙 서울은 어린 자녀를 둔 패밀리 고객을 겨냥한 ‘프라이빗 키즈 플레이’ 패키지를 선보였다. 평소 공용 공간으로 제공하던 르 메르디앙 서울의 키즈 전용 놀이 공간 ‘키즈 플레이’를 한 가족이 90분 동안 단독으로 쾌적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실내에만 있기엔 답답하고 키즈 카페를 가자니 불안한 이들이 대상이다. 아이들이 뛰어 노는 동안 부모도 같은 공간 내 마련된 전용 라운지에서 각종 다과를 즐길 수 있다.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는 최대 8인까지 이용 가능한 ‘프라이빗 겟어웨이 패키지’를 내놓았다. 호탤 내 ‘프라이빗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다 일행 8인이 호텔 바로 옆 메가박스 코엑스점 내 VIP 전용 상영관 ‘더 부티크 프라이빗’에서 영화를 즐기는 프로그램이다. 원하는 영화, 시간을 선택할 수 있고 일행 외에 다른 관객을 마주칠 일도 없어 프라이빗한 영화 감상이 가능하다. 식사도 객실로 갖다 준다. 서양식과 동양식 요리 중 선택해 원하는 시간에 8인분을 룸서비스로 이용할 수 있다. 와인 2병과 엑스트라 베드(최대 2개)도 제공돼 늦은 밤까지 객실에서 한강 뷰를 즐기며 추억을 쌓을 수 있다고 내세운다.
이외에도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은 ‘룸콕’ 한정 특가 상품을 내놨다. 객실 안에서 룸서비스를 통해 프라이빗한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1박당 식음료 크레디트 10만원을 제공한다. 메이필드호텔은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프런트를 통하지 않고 바로 체크아웃할 수 있는 ‘익스프레스 체크아웃’ 제도를 운영 중이다. 제주신라호텔은 프라이빗하게 자연을 즐길 수 있는 패키지 ‘신라 포 유’를 출시했다. 사전예약제로 1일 수용인원을 관리하고 있는 ‘치유의 숲’에서 트레킹을 즐기며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레저 전문가 직원이 동행해 숲을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한다.
유통업계에선 엄선한 한정판 명품을 예약된 시간에 호텔 펜트하우스 등 특정 장소나 VIP 공간에서 쇼핑할 수 있는 ‘트렁크쇼’가 각광받는다. 쇼핑객이 적은 시간대를 골라 고객과 시간 약속 후 매장에 도착하면 동행해서 제품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퍼스널 쇼퍼 서비스’도 최근 부쩍 예약률이 높아졌다는 게 백화점 명품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 명품업계 관계자는 “외부인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전용 엘리베이터를 갖춘 펜트하우스나 고급 전시 공간, 매장으로 고객을 초대하고 관련 공간은 방역 등에서 완벽하다는 것을 사전에 이미지나 영상으로 알리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식업계도 그간 프라이빗 서비스를 제공해온 곳들이 선방하고 있다. 서울 종로에 위치한 한식당 ‘가가’는 낮과 밤에 단 한 팀의 예약만 받아 운영하는 ‘원테이블 레스토랑’이다. 애초 공급이 적은 데다 불특정 손님들과 마주칠 일이 없어 코로나19 사태로 개점휴업 상태인 다른 식당들에 비해 형편이 낫다고. 최정숙 가가 대표는 “최근 모임 자체를 꺼리거나 모임이 취소되는 탓에 일부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식당에 비해서는 선방하는 편이다. 외부 서빙 직원을 두지 않고 원테이블이라 다른 고객과 접촉할 일도 적은 만큼 안전성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주점은 나만 아는 숨은 술집 ‘스피크이지바(speak easy bar)’가 주목받는다. 스피크이지바는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돼 있지 않고 홍보도 하지 않는 은밀한 가게’를 뜻한다. 과거 1920년대 미국에서 금주령이 내려졌을 때 애주가들을 위해 몰래 술을 팔던 비밀스러운 바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간판도 없고 홍보도 거의 안 해 소수 단골손님이 데려와야만 방문할 수 있다. 최근 ‘힙지로’라 불리는 을지로 맛집이 대개 이런 식이다. 인쇄골목, 허름한 구석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에서도 4~5층에 위치, 걸어 올라가서도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을지로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카페 ‘깊은못’이나 ‘물결’, 와인바 ‘5시37분’ ‘결국’이 대표 사례다. 5시37분은 ‘5층’에 있는 ‘37평 가게’라는 의미다.
아무나 못 오는 비밀스러운 가게에 초대받은 손님은 ‘인싸(인사이더)’로 인정받은 기분에 만족감을 느낀다고. 일산의 한 오피스텔 건물 2층에서 간판 없는 칵테일바 ‘리즈’를 운영하는 정준환 사장은 “처음에는 간판도 없고 테이블도 몇 개 되지 않는 작은 바가 성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나만의 아지트 공간을 찾는 20~30대 직장인들이 입소문을 타고 왔다가 또다시 지인들을 데려오는 ‘다단계식 영업’이 이어지고 있다. 덕분에 이제 주말이면 자리가 있는지 미리 전화로 물어보고 오시라 할 정도로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온라인 PT앱 ‘마이다노’
프랜차이즈업계에선 창업설명회 풍경이 바뀌고 있다. 예비창업자들이 프랜차이즈 본사로 모이는 대신 담당자가 찾아가는 ‘1:1 출장형’을 속속 도입 중이다.
도시락 프랜차이즈 ‘토마토도시락’과 셀프빨래방 프랜차이즈 ‘크린업24’는 최근 온라인을 통해 ‘찾아가는 창업 설명회’ 접수를 받고 1:1 맞춤형 상담을 진행했다. 예비 창업주가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신청을 하면 담당자가 원하는 지역 어디나 직접 찾아가서 셀프빨래방 창업에 관해 상담하는 식이다. 크린업24 관계자는 “코로나19 확산과 일정·거리 제약 등으로 참여가 어려웠던 전국 곳곳에 거주하는 예비 창업주의 편의를 높이기 위해 찾아가는 가맹사업 설명회를 기획했다”고 전했다.
갤러리업계는 사전예약을 통해 소수 고객에게만 전시장을 개방하는 ‘프라이빗 전시’에 나섰다. 아라리오갤러리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열리지 못한 아트바젤 홍콩(Art Basel Hong Kong) 출품작을 삼청동 전시장에서 프라이빗 전시로 선보였다. 같은 삼청동 소재 학고재갤러리도 소장전을 열면서 프라이빗 전시를 내걸었다. 우찬규 학고재갤러리 회장은 “코로나19 사태를 떠나 마니아, 컬렉터들이 ‘나만을 위한 전시’에 매력을 느끼면서 한두 시간 단위로 예약해 갤러리를 방문한다. 쾌적하고 밀도 있는 감상, 취향에 부합하는 구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이런 트렌드는 계속될 것”이라 전망했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인 서울스카이는 관광객은 급감했지만 ‘프라이빗 프러포즈’ 부문에서는 명소다. 연중 운영하는 ‘더 스카이 로맨틱 프러포즈 패키지’는 프리미엄 라운지 바 ‘123 라운지’에서 운영한다. 하루 4회 제한, 회당 30만원, 60만원짜리 상품인데도 지난 2월에 이미 전년 동월 대비 280% 이상의 신장률을 보였다고. 이곳에서 프러포즈를 했다는 30대 직장인 L씨는 “오히려 사람들이 많지 않고 커플만을 위한 프라이빗 서비스에 초점을 맞춰주다 보니 이곳을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온라인 PT앱 ‘마이다노’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시절에도 지식인, 예술가 중심의 살롱문화가 형성됐고 프랑스 68혁명(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운동)이 태동한 배경도 이런 소수 지식인, 취향이 세련된 상류층 중심의 프라이빗 이코노미였다. 한국도 소득 수준이 향상되고 대외 개방이 본격화하면서 구매력 있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이런 기류가 만들어졌는데 최근 사태 이후 ‘돈을 더 내더라도 믿을 만한 공간에서 지인 중심’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현상이 뚜렷해졌다”고 설명했다. 이는 산업적으로도 중요한 변화 기점으로 해석된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학과 교수는 “다중이 밀집하는 서비스는 사양길에 접어들 수 있다. 이들은 살기 위해 1인실, 또는 격리된 공간으로 변신을 시도할 것”이라 말했다. 프라이빗 이코노미의 서막이 열렸다는 의미다.
프라이빗 이코노미가 ‘온라인 경제’가 낳은 파생 현상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오프라인에서는 자신의 의사 표시를 하기 힘들지만, 온라인에서는 익명성에 기대 누구나 의견을 개진한다. 그러다 보면 온라인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거친 표현이 오가게 되지만, 오프라인에서는 오히려 더 자신을 숨기고 안정성을 소구하게 된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응어리는 자신과 취향이 맞는 이들끼리 모이는 소모임이나 서비스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
주윤황 장안대 유통경영과 교수의 생각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들은 관람객들이 VR(가상현실) 등을 통해 작품을 감상하도록 하고, 온라인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사진은 사비나미술관 ‘VR(가상현실) 전시감상’ 화면 모습
<트렌드 코리아 2020(공저)> <1코노미> 저자인 이준영 상명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서양에서는 워라밸을 가족 중심으로 추구하지만 우리나라는 개인 단위로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또 1인 가구는 다인 가구보다 개인의 성장과 소확행을 추구하는 소비를 지향하는 편이다.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이런 소비를 추구할 수 있는 시간적 여력도 생긴 만큼, 세분화된 취향 소비를 추구하는 마이크로 트렌드가 더욱 확산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윤황 교수도 비슷한 의견이다. “취향이 세분화되며 일반 차 모임 대신 녹차, 보이차 등 특정 차를 즐기는 이들끼리 모이는 식으로 모임의 성격과 대상도 더욱 세밀해질 것이다. 인원도 줄어 동네에서 3~4명만 소규모로 모여 산책을 하거나 소모임을 하게 될 수 있다. 소비자는 이런 소규모 모임 여러 곳에 참여하며 자신의 취향과 가장 잘 맞는 소수 정예와 제한적으로 만나는 ‘모임 세분화’가 이뤄질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프라이빗 이코노미가 강화되면 ‘광장 시대’의 종언이 앞당겨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김재현 당근마켓 공동대표는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겸 CEO는 인터넷이(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광장의 시대’에서 ‘소그룹’으로 변해갈 것으로 내다봤다. 중고상품 거래는 물론, 취향별 소모임 등 커뮤니티 기능도 활성화될 것이다. 당근마켓도 주거생활권에서 각종 소모임을 연결하는 서비스로의 확장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일부 지역에서는 시범 운영 중이다”라고 전했다.
프라이빗 이코노미는 주로 VIP 고객 대상의 배타적 유료 멤버십으로 제공하고 있어 ‘그들만의 리그’가 공고해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격의 시대> 저자 김진영 이화여대 교수는 “선진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멤버십 레스토랑, 특정 사교클럽 등이 계속 늘어났는데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프라이빗 이코노미는 주요 트렌드의 하나로 자리 잡을 것이다. 특히 VVIP층의 이런 경향이 더 강화되면서 계층화를 촉발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일반 소비자 대상으로도 확대돼 더욱 대중화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박진용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한국유통학회장)는 “사람은 인간관계 외연을 확장하려는 사회화 욕구와 신뢰가 보증된 이들과 제한적으로 모이려는 개인화 욕구가 이중적으로 양립한다. 현재는 업계에서 프라이빗 서비스를 VIP 고객 대상의 배타적 유료 멤버십으로 제공하고 있어 ‘그들만의 리그’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프라이빗 서비스에 대한 니즈는 일반 대중도 마찬가지인 만큼 향후 대중 타깃의 비즈니스도 많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승욱 매경이코노미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5호 (2020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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