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좋은 구두를 신어야 좋은 곳을 간다’였어요. 흙탕물을 묻히거나 구겨 신기라도 하는 날엔 엄청나게 혼이 났습니다. 구두를 보면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구두가 깨끗하지 못한 사람과는 만나지 말라고 하시곤 했죠.”
이혜경 드페이 대표의 말이다. 드페이는 최고급 악어백 브랜드인 ‘21드페이’와 고품질의 매스티지 핸드백 ‘드페이’ 그리고 보다 대중적인 라인인 ‘드페이 블랙’ 등을 제조 판매하는 패션기업이다.
드페이(DEFAYE)는 이혜경 대표의 영어이름 ‘페이(FAYE) 리’에서 따온 브랜드명이다. 수백켤레의 명품구두를 보유한 ‘슈어홀릭’ 이혜경 대표가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그의 집을 방문했다.
보여줄 게 구두뿐이라며 ‘구두방’에서 하나둘씩 꺼내놓으니 금세 거실을 가득 메웠다. 언뜻 보아도 100여 켤레가 넘어 보이는데 안방과 작은 방, 신발장에 있는 것까지 전부 합치면 400~500켤레에 달한다. 집안에 구두 전용공간인 ‘구두방’이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20년간 모았다는 구두가 새신처럼 흠집 없이 깨끗한 게 놀라웠다. 거실로 나온 구두들은 크리스찬 루브탱, 지미추, 카사데이, 세르지오 로씨, 이브생로랑, 샤넬, 구찌, 프라다 등 전부 최고급 명품 브랜드 제품이었다.
이 대표는 “제 발이 215cm로 작아 마음에 드는 신발을 발견해도 사이즈가 없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땐 너무 속상하지요. 맞추거나 해외 매장 곳곳을 수배해 겨우 구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정말 예쁜 구두를 보면 같은 걸로 두 켤레를 살 때도 있습니다.
주변에서 같은 구두를 두 켤레씩 사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거라고 해요”라고 말한다. 그의 구두 사랑은 앞서 언급했듯이,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것이다. 충청도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 딸이었던 어머니는 언제나 멋지게 차려입고 예쁜 하이힐을 신고 계셨다.
▶수백켤레 구두와 산다
이 대표 집안을 둘러보니 ‘구두와 산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미술품을 모으거나 와인, 보석, 시계 등을 모으는 컬렉터처럼 그는 이른바 슈즈 컬렉터였다. 좋은 구두 이외에는 고가의 장식품이나 오디오 등 사치스러운 물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실제 그는 구두가 매우 좋아 안방과 작은 방 빈 공간을 구두로 쌓아놓고도 부족해 거실까지 구두를 위한 공간으로 바꿀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사업상 해외를 자주 다니고 사무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그다. 얼마 전 외동딸이 분가하면서 이제는 정말 구두와 살게 됐기 때문. 이 대표의 딸은 모델과 MC, 연기자로 활발히 활동 중인 황소희다. 그는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받는 패션 유전자 덕분에 연예계 패셔니스타로 유명하다. 이 대표 본인도 셀레브리티다. 탤런트 고소영과는 20년 우정을 쌓고 있고, 김희애, 장미희, 이미숙, 정우성 등 연예인 황금인맥을 자랑한다. 김수현 방송작가는 그의 멘토다. 좋은 구두를 보는 안목은 그의 사업과도 연결돼 있다. 그는 1990년대 초 하이엔드라는 말이 없었을 당시 티에리 뮈글러를 시작으로 콜롬보, 제니, 지암바티스타 발리, 존 리치몬드, 카사데이와 같은 세계적 브랜드를 들여와 국내 시장에 성공적으로 론칭시켰다. 해외 브랜드를 들여온 1세대 머천다이저다. 이탈리아의 최고급 악어백 ‘콜롬보’의 경우 국내 비즈니스를 본사보다 키워 한국은 물론 아시아 판권까지 획득했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에 넘기면서 ‘콜롬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기도 했다.
▶드페이 론칭해 ‘어포더블 럭셔리’ 대중에게 전파
하이엔드 럭셔리만을 취급해오던 그가 달라졌다. 30년간 쌓아온 해외 패션 비즈니스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들이 접근할 수 있는 ‘어포더블 럭셔리’인 ‘드페이’를 론칭한 것. ‘드페이’를 통해 품질은 명품 못지않으면서 가격대는 20만~80만원대의 ‘착한 명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시장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서울 압구정동에 직영점은 단 1개뿐이지만 만드는 대로 물건이 팔려나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이에 CJ오쇼핑과 보다 저렴한 가격에 선보인 ‘드페이 블랙’도 공전의 히트를 쳤다. 백화점들로부터 매장을 내자는 제의가 잇따르지만 사업을 확장시키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대표는 “중국 시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드페이’를 국내 시장에 국한시키지 않고 제대로 된 ‘K-백’으로 키워 거대 시장인 중국으로 진출시키기 위해서죠”라고 말한다. ‘드페이’ 핸드백이 서울을 기반으로 하지만 중국 등 글로벌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패션 선진국인 유럽에 먼저 진출시키고 있다. 실제 이탈리아 밀라노의 유명 쇼룸인 알레산드로 스콰르찌에 ‘드페이’가 입점했다. 또한, 다음 달에는 영국의 고급백화점 하비 니콜스에 입점하고, 오는 9월에는 영국 런던의 유명 갤러리인 사치에서 열리는 ‘코리안 주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가방 브랜드로 전시·판매가 예정되어 있다. 이 대표는 “밀라노와 런던 등 유럽 현지에서 ‘드페이’에 대한 반응이 매우 좋습니다. 한국의 오방색에서 따온 독특하고 전통적인 색감에 관심을 갖는 바이어들이 많고 여러 주요 편집숍에서 입점 제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국내서는 두산면세점을 통해 면세시장에도 진출한다.
딸 황소희 사진액자가 놓인 테이블
이 대표가 딸 황소희, 탤런트 남주혁과 함께 한 사진
▶원하는 삶 살려면 포기할 건 포기해야
이혜경 대표는 못 말리는 ‘슈즈홀릭’이지만 ‘워커홀릭’이기도 하다. 해외 출장을 가는 걸 제외하고는 집과 사무실을 오간다. 자투리시간을 이용해 요즘은 중국어 공부 삼매경에 빠졌다. 이탈리아 브랜드 ‘콜롬보’사업을 할 때는 이탈리아어를 마스터했다. 그는 “중국 진출을 목표로 세워놓고 중국어 한마디 못한다면 말도 안 되죠. 이제 시작해서 현지인처럼 할 순 없겠지만 중국 사람들과 대화에서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도록 공부하고 있습니다. 공부는 평생 해도 부족하고, 공부를 하는 삶이 좋은 것 같습니다”고 말한다. 여성들의 로망인 명품 구두를 수백켤레 갖고 있고, 해외를 오가며 패션사업을 벌이고, 유명 연예인들과 친분을 이어가며 셀레브리티의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그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혼자서 지내는 경우가 많고 사교로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다. 이 대표는 “원하는 삶을 살려면 포기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고 1분의 시간도 낭비 없이 짜놓은 스케줄대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목표대로 사는 게 가끔은 멀미날 정도로 힘들지만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감사하죠”라고 한다.
이혜경 대표는 대한민국 1%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하이엔드 럭셔리 브랜드 ‘21드페이’를 전개하고 있다. 그에게 최근의 상류층 소비성향에 대해 물었다. 그는 “상류층 손님들이 예전처럼 고가의 최고급품만을 찾지 않아요. 옷은 유니클로처럼 저가 제품을 입기도 하죠. 오트퀴트르(고급 맞춤복)를 찾는 수요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중간대 의류들은 어려울 듯합니다. ‘드페이’에서 10만~20만원대 캐릭터백을 내놨는데 인기가 있었어요. 상류층도 가치소비 성향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고 전한다. 30년 패션사업을 벌여온 이 대표에게 열심히 일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솔직히 일하는 게 무척 재미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어 행복하고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생각입니다. 사실 비즈니스 목적이 수익을 내는 것이긴 하지만 금전은 적게 벌 수도 못 벌고 실패할 수도 있죠. 하지만 묵묵히 꾸준히 해나갈 생각입니다”고 답했다.
신예 디자이너 육성에도 적극적, ‘카네이 테이’ 정관영 발탁
이혜경 대표는 ‘드페이’의 수석 디자이너로 신예 정관영을 영입했다. 재일교포 3세인 정관영은 본인의 일본 이름인 ‘카네이 테이(KANEI TEI)’란 브랜드를 낸 디자이너다. 일본에서 자라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정관영은 한국수출입은행에 근무하다 뒤늦게 디자인에 뛰어든 케이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이 대표가 “재미있는 브랜드를 만들어보라”고 제안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 사용된 미군 텐트를 업사이클링해서 만든 가방브랜드 ‘카네이 테이’가 세상에 나오게 됐다. 현재 ‘카네이 테이’는 국내 유명 패션편집매장인 ‘분 더 숍’과 홍콩의 하비 니콜스에 각각 입점되어 있다. 이 대표는 정관영 디자이너 영입과 함께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취향이 들어간 콜라보레이션 제품을 ‘드페이’를 통해 선보이고 있다. 첫 번째로 나온 컬렉션은 사첼, 클러치, 백팩, 쇼퍼 형태의 가방들로 구성됐다. 가방의 부수적인 장식으로 여겨져 왔던 술장식(Tassel)과 자수 와펜, 스팽글 장식과 같은 요소들을 전면에 내세운 게 특징. 특히, 사첼백 ‘크로노’와 백팩 ‘스테고’는 좋은 시장 반응을 얻고 있다. 이들 제품은 최근 일어나고 있는 제품의 소형화 추세에 맞추어 3가지 사이즈로 출시됐다.
[김지미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