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걸 기자의 Blue House Diary] 대통령 건강관리는 중대한 정치활동

    입력 : 2015.06.12 14:5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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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월 18일(토) 오전 8시(한국시간 18일 밤 10시) 박근혜 대통령의 중남미 4개국 순방의 첫 기착지인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 시내 홀리데이인 호텔 프레스센터.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현지 아침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기자 : 박 대통령이 무척 피곤해 보이시던데 건강은 어떠신가요?”

    ▶민 대변인 : 어디서 그런 말을 들으셨나요. 컨디션 좋게 일정을 의욕적으로 소화하고 계십니다. 건강이 안 좋다는 건 사실무근입니다.

    ▶기자 : 제가 어제(현지 시간으론 전날인 17일) 정상회담 풀취재를 갔다 왔는데요. 앞에서 직접 봤는데 피곤해 보이시던데….

    ▶민 대변인 : 아닙니다. 제가 알기엔 전혀 그런 일이 없습니다.

    #2. 4월 25일(토) 오전 10시(한국시간 25일 밤 10시)
    ▶민 대변인 : 이번 일정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한 것 같고, 저도 치통을 앓았는데…(중략). 대통령께서 제일 처음 콜롬비아에서 교민 간담회 하시다가 기침을 몇 번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또 한 번 기침하시면서 그러셨습니다. “수행원들이 고산병 때문에 고생하는데 고산병을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목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고산병 때문에, 괜찮으세요?” 물으신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께 얘기는 안 했지만 비행기에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입니다. 주치의가 아래로 자꾸 불려가더라고요. 그래서 알아봤더니 대통령께서 편도선이 붓고 복통에 열이 많이 나서 매일매일 주사와 링거를 맞고 강행군을 하신 것 같습니다.

    ▶기자 : 거의 매일 링거를 맞으신 것인가요?

    ▶민 대변인 : 매일 매일 주사와 링거를 맞았습니다.

    ▶기자 : 콜롬비아 도착한 당일부터 맞으신 것인가요?

    ▶민 대변인 : 기침하고 그러셨으면 주치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조치를 하려고 하지요. 고산병이 아니더라도 몇 시 몇 분에 맞았는지 모르겠지만 매일 그렇게 강행군을 하셨습니다.



    민 대변인이 귀국 직전인 25일 브라질에서 ‘대통령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브리핑한 내용은 국내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과로로 인한 인후염과 위경련으로 절대안정이 필요한 상태였다. 박 대통령의 귀국길은 국민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대통령은 귀국 직후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연루 의혹이 있는 이완구 전 총리 거취를 결정해야 했고, 나라를 비운 동안 지지부진한 공무원연금개혁에 다시 시동을 걸어야 했다. 정치개혁도 공언해 놓고 떠난 참이었다. 이런 와중에 대통령이 와병하며 칩거에 들어갔으니 국내외에 큰 뉴스였다.

    반면 이 브리핑보다 일주일 전 중남미 순방의 첫 기착지였던 콜롬비아에서의 민 대변인의 브리핑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민 대변인의 대답을 또렷이 기억한다. “대통령이 피곤해 보인다”는 일상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 필자였고 이에 대해 이례적으로 언성을 높이며 반박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분명히 남아 있다. 결국 민 대변인은 18일 본인의 브리핑을 일주일 만인 25일에 스스로 정면으로 번복한 셈이 됐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민 대변인도 몰랐거나 아니면 모른 척 했거나.

    대통령의 동선을 밀착 수행하는 대변인이 몰랐을 가능성은 낮다. 나중에 민 대변인에게 이 이슈를 물어봤다. 민 대변인은 콜롬비아에서의 대답(대통령은 건강하다)은 “정무적 판단에 의한 답변이었다”고 답했다. 일종의 ‘선의의 거짓말’이란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여하튼 민 대변인은 25일 이처럼 박 대통령의 건강이상을 밝힌 직후부터 27일 오전 7시 전용기에서 한국에 내리자마자 대통령이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는 발표에 이어 28일, 29일, 30일, 5월 1일까지 박 대통령의 건강상태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다시피 했다. 대통령의 건강 이상을 중계 방송하듯 발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대통령의 건강은 국가 기밀사항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靑 “대통령 건강은 국가 2급 비밀”

    실제 이번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청와대는 대통령의 건강은 국가기밀이라며 국회에서도 공개를 피한 적이 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 이재만 총무비서관, 박종준 경호실 차장 등은 지난해 11월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헬스트레이너인 윤전추 씨의 행정관 임명과 피트니스 장비 구입 논란 등에 대해 기밀이라는 이유로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특히 지난해 11월 6일 국회 운영위에서 박 차장은 민현주 새누리당 의원의 질의에 “대통령의 건강, 체력 등은 2급 비밀에 준하여 관리한다”며 “어느 나라나 국가원수의 건강상태는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문제로 전부 비밀로 관리한다”고 발언했다.

    실제 북한과 대치상황인 우리나라에서 군 통수권자이자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건강은 국가안위와 직결되는 최상급 기밀사안이다. 안보 차원에서 관리돼야 한다는 뜻이다. 전임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최근 발간했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지난 2009년 12월 폐에 문제가 발생했던 기억을 회고했다. 이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걱정하는 말을 하거나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며 “아내에게만 발병 사실을 알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참모들과 함께 있을 때도 비타민을 먹는 것처럼 약을 먹고, 안색이 어두워 보이지 않도록 김윤옥 여사가 쓰던 화장품으로 화장을 했다고도 회고했다.

    ▶조선시대 승정원 업무지침에도 ‘정기검진’

    지금으로 따지면 청와대 비서실격인 조선시대 승정원 업무 지침서인 ‘은대조례(銀臺條例)’에는 ‘문안진후(問安診候)’라는 규정이 있다.

    승지를 맡은 자가 닷새마다 한 번씩, 즉 한 달에 모두 6차례 어의와 함께 직접 방문해 왕의 건강상태를 점검하는 것이다. 당시 이른바 음식에 독이 있는지를 미리 맛보는 ‘기미상궁(氣味尙宮)’이 있어 음식까지 철저하게 관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청와대 내에서 쓰이는 물과 식자재는 철저히 단속된 루트를 통해서만 취급된다.

    조선시대 왕들은 내시들이 ‘매화틀’이란 요강을 들고 다니며 용변을 시중들었고, 어의(御醫)는 배설물을 입으로 맛을 보며 건강을 체크했다.

    군주시대의 왕과 민주시대의 대통령은 다르지만 현대에도 국가정상의 건강상태에 관련된 단서들은 철저하게 국가기밀로 취급된다. 우리나라처럼 북한이라는 ‘주적’이 있는 나라의 경우, 국가정상이 다른 나라, 특히 적성국가를 방문했을 때 건강상태를 노출할 수 있는 체액과 소변 등은 경호실이나 국정원(옛 안기부)에서 처리를 맡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역시 대통령이 순방을 나가면 의료팀이 대소변과 체액까지 모두 수거한다.



    ▶대통령 건강이상 정세불안 직결돼

    실제로 국가정상의 건강은 곧 국내정세 불안이나 정치적 이슈로 직결되는 사례도 꽤 있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지난 2013년 초 심한 장염을 앓은 후, 이어 8월엔 뇌출혈의 일종인 만성 경막하 혈종이 발견돼 10월에 수술을 받았다. 이후 40여 일 동안 공식석상에 나오지 못해 ‘대통령 유고설’에 시달리다가 다리 골절로 또다시 칩거해야 했다. 이 40일이란 기간 동안 경찰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했고, 치안 공백을 틈타 약탈 행위도 벌어졌다. 불볕더위 속에 대규모 정전사고까지 이어지며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져 대통령직에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특히 적대국과 긴장관계이거나 전시인 경우 정상의 건강은 특급기밀에 해당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전쟁을 이끌었던 윈스턴 처칠이 폐렴에 걸려 중태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이때 적군이었던 일본이 신문 등을 통해 “중병에 걸린 처칠이 사경을 헤매고 있고 죽게 되면 뛰어난 전쟁 지도자를 잃은 영국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사항(?)’을 대서특필하며 일본군의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때 맞춰 당시 처음으로 개발된 페니실린을 처방받고 처칠이 완쾌된 모습으로 등장해 오히려 사기를 반전시키고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다는 기록도 있다.

    ▶정상의 건강관리는 엄중한 정치행위

    국가정상의 건강상태는 이처럼 중요한 정보라는 점은 확실하지만 무조건 숨겨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인 것만은 아니다. 정상의 건강은 그 자체 혹은 공개하거나 은폐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정치행위다.

    예를 들어 소아마비로 두 다리가 불편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휠체어에 앉거나 지팡이를 짚은 모습을 절대 공개하지 않는 방법으로 강인한 대통령의 이미지를 연출했다. 다리가 불편하고 고령이어서 ‘건강이상설’에 시달리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후보 당시 인기가요인 ‘DOC와 함께 춤을’ 개사한 노래를 TV로 광고해 근거 없는 소문을 날려버렸다. 문제는 대통령의 건강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때다.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처럼 국민들이 대통령의 건강이상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적대국이 이를 전쟁 등에 활용할 경우 치명적일 수 있다.

    실제 미국처럼 대통령제가 정착한 나라에서도 대통령 건강을 체계적으로 알려 오히려 안정감을 주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지난해 말 미국 백악관은 대통령 주치의를 기자들 앞에 내세워 대통령의 인후염 치료에 대해 설명하게 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의 주치의인 로니 잭슨 박사는 “CT스캔 검사 결과 위산 역류에 따른 인후 염증으로 밝혀졌으며 후속 치료가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2주간 오바마 대통령의 치료를 일정부분 공개했다. 대통령의 질병에 관해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전문성이 있는 주치의를 내세워 국민에게 신뢰를 주는 의도로 풀이된다.

    당시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부분은 주치의가 나서서 밝혔지만, 이와는 별도로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자기 몫을 했다. 대통령이 갑자기 검사를 받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일정상의 편의 때문”이라고 답하는 등 일반적인 질문엔 대변인이 답을 한 것이다.

    ※ 57호에서 계속... [글 김선걸 기자 사진 김재훈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7호(2015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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