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만1000m 상공에서의 천태만상
입력 : 2013.06.07 14:31:44
-
#2. 최근 국내 모 항공사의 중국행 항공기에선 한 중국 교포가 비행시간 내내 승무원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승객이 기내식을 먹다가 소고기 뼈 조각을 발견했기 때문. 손님은 “이가 아프다”며 불만을 표시했고 “기내식을 승무원용으로 바꿔주겠다”며 거듭 머리를 조아리는 승무원들의 사과를 끝내 거부했다. 객실사무장이 나서 30분간이나 승객을 다독였지만 승객은 “인터넷에 내용을 올리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항공사는 마일리지를 1만 마일 제공하는 선에서 승객과 합의했다.
최근 불거진 ‘라면상무’ 사건으로 항공기 내에서 벌어지는 ‘천태만상’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기내 서비스로 제공되는 라면에서 시작된 불만이 기내 난동으로 이어졌고 결국 진상을 부린 승객은 회사에서 쫓겨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사회 전반에 걸친 ‘갑을(甲乙)’ 관행에 대한 재조명으로까지 이어졌다.
서비스 업계에서 국내 항공사의 서비스 품질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지만 소위 기내 ‘진상 승객’의 기내 소란 행위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장시간 비행하는 항공기 특성상 폭언, 욕설, 성추행, 폭력 등의 기내 소란은 단순히 승무원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수많은 승객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보다 엄격히 다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전 세계 여행가격 비교사이트 스카이스캐너가 85개국 700여명의 항공사 승무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승무원이 꼽은 최악의 ‘진상 승객’은 반말을 내뱉거나 폭언을 퍼붓는 ‘무례한 승객’(25%)이다. 뒤이어 ‘안전규칙을 무시하는 탑승객’(22%)으로 나타났다. 또 승무원들이 가장 짜증을 느낄 때는 ‘승객의 과도한 요구’(31%)가 꼽혔다.
춥거나 덥다고 불평하거나 준비된 메뉴 외의 음식을 요구하거나 특정 브랜드 음료를 고집하는 경우 등이다. 김민주 동서울대 항공서비스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과도한 서비스가 좋은 서비스로 여겨지는 문화가 있다”며 “기내 난동 행위를 법으로만 다루기엔 서비스업 특성상 어렵기 때문에 선진 서비스에 대한 고객과 항공사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소위 진상 손님 1위는 ‘막무가내형’이다. 작년 7월 제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안. 한 주부가 “제주로 가져온 골프채가 부러져 있었으니 270만원을 변상하라”며 소란을 피웠다. “정말이냐, 사실관계 확인을 하겠다”며 관련 정보를 요구하는 승무원에게 이 주부는 “내가 누군지 알아. 여기 사장이랑 아는 사람이야”라며 되레 승무원을 몰아세웠다. 결국 나중에 골프 라운딩 도중 골프채가 파손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지난해 방콕발 인천행 항공기에 탑승한 학생 K씨. 탑승하자마자 비행공포증이 있다며 소란을 피우던 승객은 여승무원에게 “무서우니까 안아달라”고 성희롱을 시작했다. “승무원이면 개인적인 얘기도 들어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오늘 저녁에 만나자”고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여승무원에게 치근댔다. 최근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기내 흡연 사례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지난 2011년 11월 한 30대 주부는 제주발 부산행 비행기에서 담배를 피웠다. 승무원의 제지에 ‘적반하장’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폭력까지 휘둘렀다. 결국 이 주부는 3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국내 항공사들은 1998년부터 기내 흡연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기내 난동사태는 이처럼 폭언, 욕설에서 시작해 실제 폭력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욕설부터 “무릎 꿇고 사과해, 밥이나 주는 것들이”와 같은 인격모독의 언행, “내가 누군지 알아, 여기 임원이 다 내 친구다”와 같은 과시형 발언에서까지 “너 잘라버리겠다, 죽여버릴거야” 등의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근절되지 않는 기내 난동사태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지만 빈번한 기내 난동사태를 막기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많다.
항공안전및보안에관한법률에 따르면 항공기 내 승객이 해서는 안 될 행위를 규정하고 있는데 ▲폭언, 고성방가 등 소란행위 ▲흡연 ▲음주, 약물 복용 후 다른 승객에게 위해 행위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행위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행위 ▲기장 승낙 없는 조종실 출입 행위 등이다.
폭행, 협박 행위로 항공기의 안전이나 운항을 저해하면 5년 이하의 징역, 승무원의 직무집행을 방해하는 행위는 10년 이하에 처하도록 돼 있다. 조종실 출입을 시도하거나 기장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승객은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하지만 서비스업 특성상 ‘진상 고객’에게 일일이 법적 잣대를 들이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고객의 난동행위를 눈감아주거나 조용히 합의하는 경우가 더 많다.
기내 난동사태는 ‘안하무인’ 승객들의 단독범행(?)인 경우가 많지만 기내 서비스 부실이나 항공사의 업무처리 미숙이 발단인 경우도 적지 않다.
항공사 승무원이 기내 난동행위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승객들의 ‘묻지마 난동’도 비일비재하지만 실제 상당수의 기내 소란행위는 항공사의 ‘서비스 지수’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얘기다.
최근 한 국내 항공사의 항공기가 이륙을 시도하다가 급정거를 한 일이 있었다. 일부 승객은 앞좌석에 머리를 부딪치고 일부 승객은 목의 통증을 호소하기도 했다.승객이 승무원에게 근육통 약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답은 “소화제 밖에 없다”는 대답뿐. 이 승객은 “왜 이륙 전 급정거를 했는지 설명도 듣지 못했고 사과도 받지 못했다”며 항공사에 공식 사과문 발표를 요구했다.
지난해 8월 러시아 모스크바를 떠나 인천으로 출발할 예정이던 한 국내 항공사의 항공기가 기체결함으로 장시간 이륙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부품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무려 20시간이 지나서야 재이륙할 수 있었다. 그동안 발이 묶인 200여명의 승객 중 일부는 공항 대합실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승객들의 사과와 보상요구가 이어진 건 불 보듯 뻔한 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최근 하이난항공 여객기가 기상 악화로 출발이 지연되는 일이 발생했다. 항의하는 승객과 입씨름을 벌이던 한 승무원은 승객으로부터 물세례를 맞아야 했다. 항공사의 과오와 무례한 승객이 빚어낸 기내 사고의 한 유형이다. 지난해 5월 에어캐나다 승객 90여명은 2000만달러의 보상을 요구하는 집단소송을 냈다. 넉 달 전 스위스 취리히로 향하던 에어캐나다 여객기가 갑자기 급강하하는 사고가 난 것이다. 사고 당시 항공사 측에선 난기류 탓으로 돌렸지만 실제 조사결과 조종사의 졸음운전 때문이란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임성현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