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 달고 붕 뜬 새내기 임원 “Don’t go too far”

    입력 : 2013.06.07 14:31:23

  • “임원은 자신을 희생하고 솔선수범하며 봉사하는 자리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2011년 포스코 패밀리사 신임임원들과 만난 정준양 포스코 회장의 일성 중 한 대목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회장의 주문은 당부에 그쳤다. 이른바 라면상무의 고공 액션에 그동안 힘들게 쌓아온 기업 이미지가 바닥을 쳤다. 인터넷 게시판을 도배한 비판의 댓글에는 라면상무를 빗댄 ‘임원의 갑질’이란 표현이 종종 등장했다. 도무지 표준어와는 거리가 먼, 하지만 입에 착 감기는 ‘갑질’은 권력을 쥔 갑(甲)의 횡포를 아우른 사회적 약자들의 은어다. 라면상무 사건 이후 “임원의 갑질에 매일 을과 병으로 살아간다”는 직장인들의 스토리가 인터넷 게시판의 조회 수를 높였고, TV 예능프로그램의 따끈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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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진하더니 사람이 달라졌다 연봉정보사이트 페이오픈이 집계한 시가총액 30대 기업의 지난해 상반기 등기임원 평균연봉은 7억543만원, 올해 상무로 승진한 대기업 임원의 평균 연령은 40대 후반, 국내 100대 기업 전체 임직원 70만2900여명 중 임원은 6600여명. 어림잡아도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별이 된 임원은 기업의 입장에선 인재 중의 인재요 충신 중의 충신이다. 그런데 왜? 많지 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며 벌이까지 충분한 이들이 갑질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걸까.

    한 대기업 임원은 “처음 임원이 되면 우쭐한 마음에 회사 안팎에서 목에 힘이 들어간다”며 “든든한 뭔가가 있는 것처럼 굴기도 하고 무턱대고 대우받으려고 하는데 라면상무처럼 밖에서 오버하는 건 임원들 사이에서도 꼴불견으로 통한다”고 꼬집었다.

    글로벌 기업에 근무했던 퇴직 임원은 “임원 가운데 능력이나 성과보다 충성도로 발탁된 이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완장 자랑하며 비정상적인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며 “특히 상대적으로 약자인 부하 직원을 대상으로 한 권위주의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아일랜드의 저명한 신경심리학자인 이안 로버트슨 트리니티대학 교수는 “권력을 쥐면 테스토스테론과 그 부산물이 증가하는데 이것은 마약을 복용했을 때의 증상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한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누릴 수 있는 권력이 늘고 현실 인식이 무뎌지니 절제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중병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런가 하면 로버트 서튼 스탠퍼드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악질 제로 법칙(No Asshole Rule)>에서 “악질 10명 중 7명은 보스”라고 규정했다. 캘트너 교수는 “과학자들의 심리실험 결과 권력을 쥔 이들이 적의를 갖고 동료를 괴롭혔고 마치 ‘안와전두피질’이 손상된 환자처럼 행동했다”고 밝히고 있다. 권력의 속성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이쯤 되면 ‘승진하고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 괜한 말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구자열 LS그룹 회장이 연초 신임임원 교육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구 회장은 LS미래원에서 열린 교육 현장에서 “지금은 과거와 다른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대”라며 “항상 직원들이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게 하고 이를 열심히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원의 소통의 리더십을 강조한 것이다. 구 회장은 또 “임원은 임시직이란 말이 있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제대로 된 경영자의 길을 개척하는 자리”라며 “재임기간에 눈에 보이는 성과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야 한다. 풍부한 성공담과 무용담을 많이 남겨야 훌륭한 선배이자 뛰어난 경영자로 기억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Situation 1 돈 때문에 다니는 거 아니라구?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A과장은 최근 부임한 B상무 때문에 좌불안석이다. 처음 인사하는 자리에서 B상무는 은근한 어투로 “나 돈 때문에 회사에 나오는 거 아닙니다. 퇴직하고 집에 들어앉으면 늙기밖에 더하겠어요. 이렇게 출퇴근하면서 여러분처럼 젊은 세대와 함께 지내니 저절로 젊게 지내는 것 아니겠습니까”라며 잘 부탁한다고 인사했다. 당시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B상무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자긴 돈 때문에 회사 나오는 거 아니니까 조용히 지내고 싶단 말이잖아.”

    “돈 때문에 회사 나오는 너희들이 잘못해서 문제라도 불거지면 불똥 튀니 알아서 하란 말이라던데?”

    종합해보니 부임기간 동안 아무 일 없이 넘어갔으면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A과장은 요즘 튀거나 뒤처지는 기획은 아예 잘라내고 평균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Situation 2 나 같은 후배가 없다구? C사원은 최근 D전무에게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기억이 있다. 신입사원인 그는 늘 외톨이인 D전무가 측은해 보였다. 선배들이 슬슬 피하는 게 자신의 눈에도 확연해 일부러 먼저 가서 인사하고 회식 때면 다들 피하는 D전무 주변에 앉곤 했다. 하지만 며칠 전 개인적으로 가진 술자리 이후 측은한 마음이 싹 가셨다. 퇴근이 늦었던 그날, 마침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D전무가 저녁식사를 제안했고 술도 한잔 곁들이게 됐다. 문제는 소주를 두어 병 비웠을 때 D전무의 푸념에서 시작됐다.

    “내가 왜 부하 직원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줄 아나. 내가 그 연차일 땐 일밖에 몰랐다네. 뭘 하든 성과를 내려고 눈에 불을 켰다고. 상사가 시키기 전에 일하고 성과도 제법 높았지. 지금 친구들은 전혀 그렇질 못해. 다들 내가 했던 성과에 반밖에 따라오질 못하거든. 그러니 그 친구들 입장에선 내가 불편하겠지. 따라오지 못하니 슬슬 피하는 것이고. 난 나 같은 후배가 없어서 외롭다네. 자네가 가끔 이렇게 어울려 주게나.”

    C사원이 그날 이후 선배들이 왜 D전무를 피하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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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tuation 3 사랑하는 후배, 욕도 애정표현이라구? E대리는 부서 내 라인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라인에 속한 이들은 뭘 해도 환영받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늘 찬밥 신세였다. 찬밥에 속한 E대리는 라인의 정점에 있는 F이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동향에 고등학교, 대학, 심지어 초등학교까지 따지고 드는 F이사는 사장과 동향에 대학 후배였다. 사장 앞에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살살대다가도 부하 직원들과 있으면 눈에 띄게 선긋기가 심했다.

    어쩌다 라인의 회식자리에 낄 때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기 십상이었다. 고향과 학교가 주 메뉴이다 보니 E대리는 투명인간 취급이었다. 게다가 고향에선 욕도 정이라며 어찌나 걸진 말들이 오가는지 굳이 있고 싶지도 않은 자리에 참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내 반가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자체 신문고를 통해 F이사의 라인이 문제가 됐다는 것이다. 이후 F이사는 소리 없이 좌천됐다. 라인으로 지목된 이들도 하나 둘 타 부서로 흩어졌다. 동료들 사이에선 ‘약자들의 반란이 승리’했다는 말이 돌고 있다.

    과유불급 통하지 않는 인성교육 라면상무 사건 이후 각 기업의 임원 교육프로그램에도 인성교육이 강화되고 있다. 한 CEO 코칭 전문가는 “임원이 되는 순간 무려 70여 가지 혜택을 받는다”며 “사무실과 자동차가 제공되는 건 기본이고 출장 시 비즈니스 석에 경비지원도 일반직원과 비교하면 제대로 별 대접을 받는다. 문제는 혜택과 함께 책임도 무거워지는데 그중 하나가 행동과 발언에 대한 품위 유지와 회사 이미지 기여”라며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대기업의 신임임원 교육은 자체적으로 인재개발원 등지에서 교육하거나 외부에 위탁해 진행된다. 인재육성과 교육시스템이 강한 삼성은 인력개발원에서 교육을 실시한다. 신임임원들은 일주일간 합숙하며 인성과 리더십, 경영철학 등의 교육을 받는다. LG도 매년 초 LG인화원에서 신임임원 교육을 실시한다. 7박 8일 동안의 일정에는 경영자로서 갖춰야 할 리더십, 조직 운영에 대한 통찰력, 정도 경영 등의 수업이 진행된다.

    현대기아차는 인재개발원에서 일주일간 합숙하며 리더십과 국내외 경영환경 이해, 도덕성 등의 강의를 실시한다. 마지막 순서로 임원의 배우자를 초대해 현장견학과 특강 등을 진행하기도 한다. 지난 4월 23일 3박 4일간 신임임원 합숙교육을 실시한 한화는 ‘임원의 역할과 책임감’을 주제로 매너 교육에 주력했다.

    올해는 특히 임원의 자질 교육을 강화했다는 후문이다. 그룹연수에서 신임임원 교육을 실시하는 SK는 리더십과 조직원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윤리경영과 리더의 자세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시행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2003년부터 신임임원 교육을 서울대에 위탁했다. 서울대는 ‘임원 경영능력 향상과정’을 개설해 3개월 동안 신임임원 교육을 실시한다.

    그런가 하면 금융지주 임원들은 조찬강연을 비롯해 주말에도 최신 경영 트렌드와 인문학 등의 수업을 들으며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10년 전부터 임원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는 하나금융지주는 매달 조찬강연 ‘드림소사이어티’를 실시하고 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와 하나금융 인사전략팀이 주제를 선정하고 강사를 초빙한다. ‘하나 리더스 아카데미 토요과정’은 2007년부터 진행된 맞춤형 리더십 과정이다. 마케팅부터 역사, 심리, 인문학, 예술 등 18개 강의가 1년 동안 진행된다.

    ‘우리금융포럼’(우리금융경영연구소)을 진행하는 우리금융지주는 계열사 임원을 대상으로 외부강사를 초빙해 경제 이슈와 인문학 등 다양한 강연을 열고 있다. 최근엔 ‘엔저와 환율정책, 토빈세 필요한가’를 주제로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의 강연이 진행됐다.

    신한금융지주도 매달 한 번씩 임원을 대상으로 경제, 마케팅 등 시의성 있는 주제로 오픈 강연을 실시한다. 지난해부터 매달 조찬 포럼도 진행하고 있다. KB금융지주는 부서장 이상을 대상으로 2011년부터 ‘경영자예비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5개월간 경영지식, 심화, 비즈니스 프로젝트, 그룹 CEO 특강 등을 거친다.

    경영 전문가들은 임원의 역할에 대해 “흔히 부장을 관리자, 임원을 리더로 규정한다. 관리자는 ‘Doing Things Right’ 해야 하고 리더는 ‘Doing the Right Things’ 해야 한다는 의미다. 관리자는 기획과 예산 내에서 일을 관리하지만 리더는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며 사람을 관리한다”며 “분명한 역할 구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단명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조직원과의 소통은 최근 요구 강도가 높아진 임원의 역할이다. 장혜선 커리어케어 상무는 “글로벌 기업에서 임원급을 스카우트할 때 리더십, 업무 능력, 외국어, 도덕성, 인성, 조직에 대한 로열티, 술버릇까지 체크하며 평판 조회에 나선다. 다녔던 회사의 상사, 동료, 부하 직원, 고객사까지 챙기는데 대부분 솔직한 답변이 돌아온다. 임원이 된 시점부터 스스로 평판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 컨설팅사의 퇴직 임원은 “훌륭한 임원은 성과는 성과대로 내고 CEO, 상사와의 커뮤니케이션, 부하 직원에게 공정하게 채찍과 당근을 제시해야 한다”며 “정의는 내릴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완벽한 임원은 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만큼 인간관계가 어렵다는 방증이다. 특히 “부하 직원들과의 소통과 운영에 있어 부장 시절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임원은 도태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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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원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전국남녀 직장인 69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임원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꼽은 응답이 21.5%로 가장 높았다. 임원이 됐을 때 가장 누리고 싶은 혜택으로는 특별성과금이 39.9%, 개인사무공간 22.1%, 스톡옵션행사권 10.0%, 임원들을 위한 특별연수 8.1%, 차량지원 5.9%, 인사권 4.6%, 개인비서 4.5%, 골프회원권 등 복지혜택 3.6% 순으로 집계됐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특별성과금(7.8%p↑)과 개인사무공간(5.9%p↑)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고, 남성은 스톡옵션행사권(8.9%p↑), 개인비서(4.2%p↑)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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