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발목을 잡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수렁으로 밀어 넣고 있다. 유로존은 물론 전 세계 경제를 패닉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의미하는 그렉시트(Grexit, Greece+Excit 합성어) 공포다.
그리스 유로존 탈퇴
시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다. 그리스가 유로존 단일통화인 유로화와 절연하는 행위가 유로존에 어떤 나비효과를 초래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2002년 1월 1일 유로화 통용 후 지난 10년간 17개국 3억3000만명의 유로존 국민들이 유로화를 자국 통화로 사용해왔다.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한다면 유로화를 폐기처분한 첫 번째 회원국이 된다. 그동안의 학습효과가 없는 만큼 그리스 유로존 탈퇴가 어떤 후폭풍을 초래할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2년 전 처음 그리스 유로존 탈퇴 이야기가 나왔을 때 보다는 그 충격이 덜할 것”이라며 시장 불안을 불식시키려 애쓰고 있는 모습이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더라도)유럽은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며 “지난 2년간 방어체계를 구축해왔다”고 강조했다. 패트릭 호노한 아일랜드 중앙은행 총재도 “그리스 퇴출이 매력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로존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도 아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설마 하던 그리스 유로존 탈퇴가 현실이 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시장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렉시트 가능성만으로도 전 세계 주가와 재정 위기국들의 국채값이 연일 곤두박질치는 등 세계경제가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유로존 탈퇴 촉매는 바로 그리스 내 반긴축 정치세력이다. 지난 6월 총선에서 긴축 피로감에 지친 유권자들이 긴축·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기존 정당을 걷어차고 긴축을 반대하는 군소정당에 70%에 가까운 표를 몰아줬다. 특히 “긴축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며 긴축 무용론에 불을 지핀 알렉시스 치프라스 당수가 이끄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이 16.8% 지지를 확보, 일개 군소정당에서 그리스 제2당으로 급부상했다. 치프라스 당수가 긴축을 지지하는 정당과는 연정 구성을 할 수 없다고 버티면서 열흘 이상 그리스가 무정부 상태에 빠지는 등 혼란을 거듭했다. 결국 연정 구성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리스는 6월 17일 총선을 다시 치른다. 문제는 총선을 통해 치프라스의 급진좌파연합이 제1당의 자리에 오를 경우, 긴축안 폐기 가능성이 한층 커진다는 점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시점에서 총선을 실시하면 급진좌파연합이 1위를 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긴축 무효선언은 곧바로 구제금융 중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3월 트로이카(EU, IMF, ECB)와 그리스 연립정부가 합의한 1300억 유로에 달하는 2차 구제금융 제공은 그리스가 긴축을 통해 나라살림을 제대로 만들어 놓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유로화가 바닥이 난 상태에서 구제금융이 중단되면 결국 그리스는 부도사태를 맞게 된다. 그리스 중앙은행이 유로화를 찍어낼 수 있는 발권력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화폐경제를 유지하려면 결국 옛 통화인 드라크마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유로존 탈퇴가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5월 14일 하룻동안 1조원에 달하는 돈이 인출되는 등 연일 뭉텅이 돈이 빠져나가고 있다. ‘유로존 퇴출과 국가부도 사태가 터지면 제때 예금을 찾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예금자들이 대거 예금 인출에 나섰기 때문이다.
유로존 와해는 없다… 트로이카의 양보
그리스 부채탕감으로 민간채권단은 이미 원금의 75%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은 상태다. 그리스 회생을 위해 대부분의 빚을 탕감해줬음에도 그리스가 결국 부도를 내고 유로존에서 이탈한다면 유로존 국가들이 천문학적인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영국 경제경영연구센터(CEBR)는 그리스 유로존 탈퇴로 유로존이 붕괴되면 1조달러(1160조원)에 달하는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진단했다. 유로존이 살아남더라도 그리스 유로존 탈퇴로 유로존이 수천억 유로(수백조원)에 달하는 손실을 볼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그리스 채권을 담보로 막대한 유동성을 빌려준 유럽중앙은행(ECB)이 거덜날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도 나온다. 유럽연합(EU)이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수수방관하기 힘든 이유다. 그리스 차기 총리 자리를 노리고 있는 급진좌파연합의 치프라스 당수가 “(긴축을 폐기해도) 유럽이 그리스 구제금융을 중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호기 있게 자신감을 내비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집권한 뒤 유럽이 지원을 중단하면 아예 돈을 갚지 않겠다”며 유럽 채권단과 치킨게임(담력 겨루기)을 벌이고 있다. 그는 “구제금융이 중단돼 그리스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면 유로존 국가들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며 채권단을 협박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로 재정취약국인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에 돈을 떼인 투자자들이 아무리 수익률이 높아도 투자위험이 큰 이탈리아와 스페인 국채를 매입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스페인, 이탈리아 채권 투매에 나서면 국채금리가 지속가능하지 못한 수준으로 치솟을 수 있다. 수요가 적은 상황에서 국채를 발행하려면 과도하게 높은 금리를 지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금리는 과도한 금융비용 부담으로 연결되고 결국 언젠가는 지급불능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불안감이 커지면서 스페인 국채수익률(10년물)은 6%대 중반을 넘어서 7%선을 향해 달리고 있고 이탈리아 국채 금리도 6%대에 육박하고 있다.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모두 국채수익률이 7%를 넘어서면서 구제금융을 받은 바 있다. 유로존 3,4대 경제대국인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무너지면 그야말로 유로존 시스템이 와해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에 따른 금융시장 패닉이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 다른 재정 취약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럽연합이 두 눈을 질끈 감고 타협에 나설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반긴축 기조를 내건 프랑수와 올랑드가 17년만의 좌파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등 긴축 일변도 기축 정책 대신 성장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유로존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점도 이 같은 타협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그리스가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폐기처분할 수는 없지만 정부지출 삭감폭과 속도를 완화해주거나 재정목표 달성시점을 연기해주는 등의 양보조치를 시행, 파국을 막는 노력이 가시화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대안은 없다… 그리스 긴축 이행
지난 6일 총선은 그리스 경제를 망가뜨려 2차례나 구제금융을 신청한 기존 정치권에 대한 정권심판 분위기가 강했다. 하지만 6월 17일 총선은 긴축이냐 아니면 유로존 탈퇴냐를 묻는 국민투표나 마찬가지다. 구제금융·긴축 프로그램 폐기론을 외치고 있는 급진좌파연합 등 반긴축 세력에게 또다시 힘을 실어주면 유로존 탈퇴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구제금융 자금을 받기 위한 긴축 시행을 주장하는 신민당·사회당을 밀어주면 긴축의 고통은 가혹하겠지만 그리스는 유로존 회원국으로 남을 수 있다. 이제 그리스 국민들도 유로존 잔류와 탈퇴가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체감하고 있다. 유로존에서 탈퇴하면 그리스는 수십억유로의 농업보조금과 개발보조금 지급대상에서 제외된다. 지난 10년간 자국통화로 사용했던 유로화 대신 이제는 그리스 옛 통화인 드라크마를 써야한다. 어떻게든 경쟁력을 갖추려면 유로화 대비 드라크마 가치를 대폭 낮춰야 한다. 드라크마의 대폭적인 평가절하 가능성은 뱅크런을 부추기고 있다. 예금인출이 통제 불능한 상황으로 확대되면 은행이 확보하고 있는 유로화 유동성이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ECB의 유동성 공급이 없다면 유로화 대신 드라크마화를 발행해 대신 지불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급받은 드라크마가 곧바로 유로 절반 수준으로 평가절하가 된다면 앉은 자리에서 예금액이 반토막이 날 수 밖에 없다. 예금자들이 앞다퉈 예금 인출에 나선 이유다.
또 디폴트를 선언하고 유로존에서 탈퇴하면 외부지원이 끊겨 그리스의 경기침체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이 경우 세입이 더 쪼그라들면서 긴축을 시행할 때보다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연금·사회보장기금을 삭감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그리스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드라크마를 무제한 발행하는 꼼수를 쓸 수도 있겠지만, 이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이 통제 불능한 상황이 되면 경제시스템이 회복 불가능한 상황으로 망가질 수 있다.
유로존 퇴출이 가져올 수 있는 이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에 그리스 유권자들도 움찔하고 있다. 긴축은 반대하지만 유로존 탈퇴는 원치 않는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스 언론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리스 국민 10명중 8명은 유로존에 남기를 바라고 있다. 유권자 표심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여전히 여론조사를 보면 반긴축 기치를 내건 급진좌파연합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긴축 지지세력과의 격차가 줄고 있다. 특히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구제금융·긴축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보수파 신민당이 급진좌파연합(23.7%)을 누르고 2차 총선에서 1당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신민당과 연정을 구성했던 사회당 지지율도 상승하면서 긴축을 반대하는 급진좌파연합을 배제한 채 신민당·사회당만으로 연정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이처럼 긴축을 지지하는 정당이 집권하면 2차 구제금융 지원이 계속되고 유로존 탈퇴 이야기는 수면 아래로 잠복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급진좌판연합의 치프라스 당수가 연일 강경발언을 쏟아내고 있지만 실제로 1당 당수가 돼 총리자리에 오르면 극단적인 주장을 접을 것이라는 진단도 내놓고 있다. 유로존 탈퇴가 그리스 몰락의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치프라스 당수 자신도 구제금융·긴축 프로그램 약속을 파기하겠다고 공언하면서도 유로존 탈퇴는 원치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