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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EU FTA 발효 이후Ⅱ] 외국계 로펌의 상륙… 격변의 법률시장
입력 : 2011.09.28 16: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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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경쟁에 불이 붙을 것으로 점쳐지는 건 기업·정부에 대한 법률 자문 분야. 규정에 따르면 외국계 변호사들이 직접 소송에 참여하는 송무 업무는 맡을 수 없게 돼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영국계 로펌이 강세를 보이고 있는 데다 초기부터 개방되는 자문 영역에서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는 국내 로펌들의 위기감은 큰 편이다.
급속도로 시장 규모가 확대되고 있는 기업 간 인수·합병(M&A), 금융, 국제 중재 등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 부분 외국계 로펌의 시장 진출이 시작됐다.이와 관련해 최근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하나 나왔다. 미국 미디어그룹 블룸버그의 2011년 상반기 한국 M&A 시장(한국 기업 대상) 조사 결과가 그것.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해당 로펌이 자문을 맡은 거래 규모 기준으로 10위권 내에 모두 5개의 외국계 로펌이 이름을 올렸다. 한국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영국계 앨런 앤드 오버리(Allen & Overy)가 7위를, 미국계 대형로펌 맥더모트 윌 앤드 에모리(McDermott Will & Emery)와 폴 해스팅스(Paul Hastings) 등이 국내 대형 로펌들에 이어 5위와 6위를 차지했다. 이들 외국계 로펌 대부분 지난해 순위권 밖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조사 결과는 최근 외국계 로펌들이 한국 기업들의 법률 자문에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영국사무변호사협회(Low Society of England and wales) 국제관 북아시아 태평양 담당인 안나 프라그(Anna Prag) 과장이 지난 5월17일 법률시장 개방과 영국 로펌의 진출계획 등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EU FTA 협정문에 따르면 1단계 개방이 시작된 7월1일부터 2년 뒤까지 외국계 로펌은 국내법 사무를 수행할 수 없고 외국법에 대한 자문만 허용된다. 한국에서 자격을 딴 변호사의 직접 고용도 금지된다. 하지만 2단계 개방부터 외국계 로펌은 국내 로펌과 국내법·외국법이 혼재된 사건을 공동 처리한 뒤 수익을 나눌 수 있고 발효 5년 후인 2016년 7월엔 두 국가 간 로펌의 합작 사업체가 만들어져 국내 변호사까지 고용할 수 있게 된다. 완전한 전면 개방이 시작되는 셈이다.
이 같은 조건 하에서 1단계 개방부터 한국에 사무소를 여는 등 본격적인 진출 채비를 하고 있는 영국계 대형 로펌은 3~5개에 달한다. 이들 로펌 모두 변호사 숫자만 수천여 명으로 한국에서 가장 크다는 김앤장 법률사무소(변호사 300~400여 명)와 비교해 구성원과 규모면에서 몇 배의 크기를 갖추고 있다. 변호사들의 국적과 자격 역시 다양하다.
게다가 일찍부터 영국 국내 시장에 머물지 않고 해외 중심으로 사업을 벌여 해외 사무소가 많다는 점과 M&A, 금융 등 전문 분야로 특화됐다는 점에서 한국 법률시장에 일대 지각 변동을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EU 권역 내의 경쟁력 있는 로펌은 모두 영국계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번 법률시장 개방은 ‘영국계 로펌에 문호를 열어주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방한한 영국변호사협회(Law Society of England and Wales)의 안나 프라그(Anna Prag) 과장은 “클리포드 챈스를 필두로 5개 정도의 영국계 로펌들이 법률시장 개방 1단계부터 한국 시장에 진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토마스 브라운(Thomas Brown) 앨런 앤드 오버리 아시아 대표 변호사는 지난 3월 영국 법률 전문지와 인터뷰에서 “(시장 진출 방향에 대한) 명확한 결정을 아직 내리지 않았지만 한국은 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시장”이라는 생각을 전했다.
일각에선 영국계 대형 로펌들이 현재 운영 중인 홍콩 사무소의 한국계 변호사들을 선봉으로 내세워 한국 사무소의 책임자를 맡길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아무래도 제도적, 문화적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선 한국의 전반적 사정에 익숙한 이들 변호사가 적임이라는 판단에서다.
현재 디엘에이 파이퍼의 이재철 변호사, 앨런 앤드 오버리의 손혁수 변호사, 클리포드 챈스의 김현석 변호사 등이 대표적으로 영국계 로펌의 한국 시장 진출 준비를 맡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어와 영어 등에 능통하고 한국 기업 등과도 친분을 맺어와 영국계 로펌의 한국 진출을 도울 적임자라는 평이다.
협정상 1단계 개방부터 국내에 진출하려면 3년간 영국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법률 자문을 했어야 하기 때문에 이 같은 자격을 만족시키는 이재철 변호사와 손혁수 변호사가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가운데 이 변호사는 국내 학부(고려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과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딴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어 국내와 해외 인맥 모두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계 로펌의 움직임을 두고 최정환 대한변협 국제이사는 “국내 대기업들 상당수가 이미 영국계와 미국계 등 외국계 로펌들과 주요 현지 사업과 관련한 자문을 받고 있고 그 규모도 상당하다”면서 “법률시장 개방 이후엔 추세가 한층 강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내 대형 로펌들 “걱정없다”… 속내는 달라 영국계 대형 로펌의 움직임에 국내 대형 로펌들 대부분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업계 전반에서는 “큰 위기”라는 상반된 반응도 나오고 있다.
특히 기업에 대한 M&A나 기업공개(IPO), 금융 등 최근 자문 영역을 개척해온 국내 대형 로펌에는 법률시장 개방이 적잖은 타격으로 다가올 것이란 전망도 있다.
국내 기업들과 심리적 거리감이 적고 오랜 기간 소통해왔다고 자부하는 국내 대형 로펌들은 영국계 로펌이 직접 한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 복잡한 속내를 보이고 있다. 겉으로는 “경쟁력 강화의 기회”라는 긍정적 반응이 나오고 있지만 실제 내부 관계자들은 시장 잠식에 대한 우려의 뜻을 내비쳤다.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의 이재후 대표변호사는 “국내 로펌에게는 세계 시장 진출길이 열린다는 측면에서 경쟁력을 강화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어느 정도 시장이 잠식될 가능성도 있지만 우리 로펌들이 잘 해낼 것”이라며 기대 섞인 관측을 내놓았다. 이 대표변호사는 또 “이번 개방은 국내 법률 서비스가 업그레이드되는 계기”라면서 “김앤장도 외국계 로펌들과 경쟁하며 발전할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2011년 상반기 한국 시장 M&A 법률자문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한 법부법인 광장의 김병재 대표 변호사.
지난 6월 기자회견을 열어 외국계 로펌 진출에 대한 대응 방안을 발표한 신영무 대한변협 회장(전 세종 대표변호사)도 “법률시장 개방 이후 상당한 혼란이 있을 것으로 본다. 대형 로펌의 우수인재들이 스카우트 대상이 되면서 이들 로펌에는 상당한 타격이 될 것이라고 생각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국계 로펌은 국내 법조계 일각의 우려가 지나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전해진다. 당장 실질적으로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닌데도 지금부터 위기감을 자아내 법률 개방을 최대한 방어하려는 국내 로펌들의 전략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재철 변호사는 “개방 첫 단계에서 영국계 로펌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이 때문에 한국 로펌들이 일찌감치 공공연하게 대내외적으로 위기감을 불러일으켜 영국계 로펌의 진출을 늦추려는 것 아닌가 싶다”면서 “실제 싸움이 전개되는 것은 완전 개방인 5년 뒤로 아직까지 한국 로펌들에게는 적잖은 준비 시간이 남아있는 셈이다”라고 지적했다.
기업 등 법률서비스 주요 소비자에겐 선택의 폭 확대? 국내 로펌들의 복잡한 속내와 달리 해외 사업 등에 대한 자문이 필요한 기업 등 법률 소비자에겐 시장의 변화가 ‘선택의 폭 확대’라는 긍정적 측면으로 더 크게 다가온다. 이와 더불어 영국계 로펌의 진출로 그간 안전한 국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국내 로펌들의 영업 마인드와 서비스 정신이 제고될 것이란 기대감도 크다.
이 때문에 국내 대형 로펌의 고위 관계자들은 한결 같이 법률시장 개방 이후 “서비스 경쟁력 제고, 영업 마인드 강화”를 꾀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정훈 태평양 대표변호사는 “소비자 입장에서 선택의 폭이 늘어나는 건 확실하다. 외국계 로펌은 돈만 벌어가겠다는 게 아닌 기업을 위해 서비스하겠다는 자세에서 국내 로펌과 다른 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엔 변호사들이 ‘엘리트’란 의식 때문에 클라이언트들이 사무실에 전화걸기 쉽지 않았는데 최근 우리 로펌은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볼 수 있도록 고객을 위한 서비스를 실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재후 김앤장 대표변호사의 생각도 같았다. 국내 최대 로펌조차 고객 대응 마인드를 바꾸지 않는다면 기업 등 주요고객들이 찾지 않을 것이란 절박함도 느껴졌다. “지금까지 판검사 하고 나온 소위 ‘전관’ 변호사들에겐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점이 있었다. 외국 변호사들처럼 고객 서비스하는 그런 정신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이 대표변호사는 말했다. 지금도 소속 변호사들이 바쁘다고 상담을 미루고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런 일을 없애 ‘24시간 서비스’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완전 개방이 이뤄지는 5년 뒤부터는 영국계와 국내 로펌이 합작 사업체를 설립하고 한국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어 자문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송무에서도 선택의 폭이 확대된다. 이 때부터는 한국에 있는 기업과 개인 모두에게 법률시장 개방이 현실이 되는 셈이다. 직접 외국계 변호사가 송무에 참여하진 않겠지만 합작 법인에 고용된 한국 변호사가 소송을 대리해 실질적으로는 외국계 로펌도 일반 송사를 맡을 수 있게 된다.
다만 이 같은 선택권 확대엔 전반적인 법률 서비스 비용 상승 우려가 뒤따른다는 게 업계의 전반적 인식이다. 영국계 로펌이 들어온다고 해도 한국 시장의 고객만을 위해 가격을 낮출 가능성이 희박하다. 국내 대형 로펌들도 영국계 대형 로펌에 뒤진다는 평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병재 광장 대표변호사는 “국내 로펌보다 자문료가 열 배 가까이 비싼 영국계 로펌이 국내에 들어온다고 해도 가격을 낮추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외국계 로펌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로펌도 충분한 시간과 인력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덩달아 자문료가 올라가지 않겠냐”고 생각을 전했다.
향후 한국 법률시장 모습…공존의 길로?
바른과 비슷하게 시장에서 송무가 강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화우의 변동걸 대표변호사는 “개방 이후의 위기에서는 송무 분야가 제조업과 같은 ‘굴뚝산업’으로 버티고 있어야 한다. 서비스업과 유사한 자문분야는 흥망성쇠가 심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국내 대형 로펌들이 자칫하면 ‘공멸’로 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반응도 나온다. 김동건 대표변호사는 “자문 영역이 외국계 로펌에 상당수 넘어가 국내 로펌들이 송무 쪽으로만 몰리면 공멸의 길로 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며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향후 5년간 국내 대형 로펌들이 적절히 대처해 영국계 로펌과 공존하며 전체 시장 크기를 키울 것이란 기대가 없지는 않다.
윤세리 율촌 변호사는 “한국 로펌들도 대규모, 전문화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갖춰가고 있다”면서 “한국에 진출하지 않는 외국 로펌 등과의 제휴로 능력을 키워 법률시장 개방에 맞대응해 가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재언 / 매일경제 사회부 기자 blowind@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1호(2011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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