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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EU FTA 발효 이후Ⅰ] 경제·사회·문화 빅뱅 시작됐다
입력 : 2011.09.28 16: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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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EU FTA 발효로 오는 2015년께부터는 서울역 광장이나 인천국제공항에서도 BMW·벤츠 택시가 즐비하게 늘어선 유럽 공항의 모습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독일 베를린 테겔공항에 다양한 유럽 자동차 택시들이 손님을 기다 리고 있다.
경제 영토가 넓어지면서 유럽에 대한 한국인의 심리적 거리감도 줄어들게 됐다. 우리 기업들이 단지 수출입 확대라는 경제적 틀에서 벗어나 한·EU FTA가 가져올 사회·문화적 파급효과에도 주목하고 대비해야 할 이유다. 이에 한·EU FTA에 따른 경제·사회·문화적 요인들을 점검해 봤다.
수입차 관세 3년 뒤 사라져 “삼성 SM520을 7년 탔는데 이제 슬슬 외제차로 바꾸고 싶어요. 가격이 계속 오르는 현대·기아차나 신형 SM5를 사느니 차라리 외제차로 갈아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개인택시 운전사 김모 씨(67)는 요즘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SM520 택시로 30만km를 달리는 동안 아무런 잔고장이 없어 좋았지만 슬슬 차를 바꾸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
실제 작년 말 서울개인택시운송사업조합 소속 한 조합원은 차량가액만 1억원이 넘는 BMW 735시리즈로 모범택시를 운행하려고 했다. 안타깝게도 이 모델은 LPG 구조 변경이 불가능한 터보엔진 방식이라 실제 구매가 이뤄지진 않았지만 이미 일부 개인택시 운전자들이 벤츠·BMW 차량을 후속 택시로 고려하고 있다. 구매 후 10년 동안 소모성 부품을 무상 교환해 주는 수입차 서비스가 이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한·EU FTA가 발효됐기 때문에 1500cc 이상 수입차에 붙는 관세는 8%에서 단계적으로 줄어 2014년 7월 모두 철폐된다. 오는 2015년께부터 서울역 광장이나 인천국제공항에서도 BMW·벤츠 택시가 즐비하게 늘어선 유럽 공항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국내 시장 공략을 위한 유럽 수입차 업체들의 차값 할인 경쟁도 후끈 달아올랐다. 이미 BMW, 벤츠, 볼보 등이 관세 인하분을 판매가격에 반영해 1.4% 안팎의 가격 조정을 끝냈다. 완성차 가격뿐 아니라 유럽산 자동차부품에 붙는 관세 4.5%도 한꺼번에 사라진다. 이를 소매가격으로 환산하면 4% 정도 부품값이 떨어져 비싼 가격 때문에 망설였던 소비자들의 구매욕을 자극할 수 있다.
유리해지기는 한국차도 마찬가지다. EU측은 공산품 전 품목에 대해 5년 안에 관세를 철폐하고 이 중 99%는 3년 안에 없애기로 했다. 한국 완성차 업계는 연간 1500만대가 팔리는 EU 시장에서 점유율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주력인 1500cc 이상 차종에 붙는 10% 관세를 EU가 3년 안에 철폐하면 향후 15년간 수출이 연평균 14억 달러 이상 늘어날 것이란 분석이다.
친환경·안전 놓치면 시장 잃는다 수입차 선호 현상은 비단 택시뿐만이 아니다. 유럽산 공산품과 식료품이 대거 수입되면서 한국 소비자의 구매 기준도 유럽식의 영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다. 특히 자동차 배기량·브랜드를 사회적 지위와 동일시하는 한국적 소비 특성은 친환경 기술과 고연비로 무장한 유럽 자동차의 도전을 받게 됐다. 식품 안전성 부분은 소비자 눈높이가 크게 높아져 위생·안전에 물의를 일으킨 기업은 시장에서 회복 불가능한 신뢰의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단적으로 유럽산 돼지고기의 경우 한국의 도축시스템보다 훨씬 엄격한 위생 관리 수준을 자랑한다. 정부와 업계가 국내 도축시스템 전반을 업그레이드하는 노력 없이 신토불이 논리만 주장하다가는 국내 소비자로부터 된서리를 맞을 수 있다.
가격이 비싸 소비자로부터 외면 받은 각종 친환경 상품들에도 뜻밖의 기회가 찾아올 수 있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은 “제조비용이 커 시장성이 떨어지는 친환경 상품의 경우 향후 코스트(비용)가 따르더라도 그 제품을 구매하겠다는 새로운 소비 트렌드가 정착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동물복지 등 관습·제도 변화 한·EU FTA는 이미 한국의 제도와 관습을 바꾸고 있다. 그간 한국 사회가 소홀했던 동물복지 등에서 유럽식 기준이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정부는 한·EU FTA 발효에 발맞춰 EU와 동물복지에 대한 정보, 전문지식 및 경험을 교환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무 작업을 추진 중이다. 비록 도축이라는 운명을 타고 났지만 자라나는 동안 자연 방사 등 최적의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EU의 동물복지 정책에 주목하고 있다. 예컨대 평소 닭이 안심하고 쉴 수 있도록 지면 위에 나무막대(횃대)를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계란 품질을 일반란보다 월등하게 높일 수 있다. 갓 태어난 송아지를 최소 일주일 이상 어미 곁에 두고 함께 키우면 스트레스가 감소돼 향후 잦은 병치레로 항생제를 투약하는 일도 줄어든다.
한국 정부와 국회도 한·EU FTA 발효에 맞춰 동물복지 축산농가에 대한 시설 지원 근거를 담은 동물보호법 개정안을 시행할 계획이다. 동물복지 축산물에 대한 소비자 선호도가 빠르게 늘 것을 예상하고 정부에 앞서 관련 시책을 펼치고 있는 지자체도 있다. 경기도 안성시는 2009년부터 관련 조례를 시행해 일부 축산농가에 소가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 주고 있다.
최근 유럽에서 일고 있는 케이팝(K-POP) 열풍도 한국·유럽 엔터테인먼트 산업 간 빅뱅을 예고한다. 고주현 연세대·SERI EU센터 연구교수는 “한·EU FTA 문화협력 의정서에 따르면 기획자, 연출가, 안무가 등의 상호협력 제작이 가능해 한국의 문화산업이 EU로부터 공동투자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며 “케이팝 열풍은 이 같은 공동투자 규정을 현실화하는 유인 장치로 작동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질 좋고 값싼 유럽산 먹을거리 대공세-유럽산 돼지고기는 엄격한 위생 관리를 자랑한다. 정부와 업계가 국내 도축시스템 전반을 업그레이드하는 노력 없이 신토불이 논리만 주장하다가는 국내 소비자로부터 된서리를 맞을 수 있다.<br>-치즈와 같은 유럽산 가공식품은 관세가 5년에 걸쳐 약간씩 떨어져 당장 큰 가격인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br>-유럽 맥주에 대한 소비자 수요는 이미 작년부터 빠르게 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시장 선점을 노리는 일부 업체를 중심으로 발효 초기부터 예상 밖의 깜짝 가격인하 경쟁에 돌입할 가능성도 있다. 시장 선두 제품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한국 소비자들의 심리를 고려한 각종 할인 경쟁이 시작될 것이라는 게 유통업계 관측이다.
2004년 한·칠레 FTA 발효 이후 칠레산 와인이 유행한 것처럼 EU와의 FTA는 한국에 유럽산 와인의 새로운 전성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한·칠레 FTA로 칠레산 와인에 붙던 관세(15%)가 매년 2.5%씩 6년간 단계적으로 없어졌지만 한·EU FTA는 15% 관세를 단번에 없애는 조건이어서 가격 파괴력이 훨씬 크다. 특히 정통 유럽 맥주의 공습은 진한 맛과 골라 먹는 재미로 국내 소비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전망이다.
업계는 유럽 맥주에 대한 소비자 수요가 이미 작년부터 빠르게 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특히 아일랜드, 독일, 벨기에, 체코 등에서 생산된 맥주의 수입 러시가 이어지고 있다. 그간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럽산 전통 맥주 맛에 눈을 뜬 소비자들이 늘면서 올해 맥주 수입액이 가볍게 5000만 달러를 돌파할 가능성이 크다.
샤넬 등 명품은 FTA 무풍지대최근 유럽에서 일고 있는 케이팝 열풍도 한국·유럽 엔터테인먼트 산업 간 빅뱅을 예고한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1호(2011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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