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물 착취 거부하는 MZ세대 등에 업고 외식·패션·뷰티… 비거노믹스 열풍

    입력 : 2022.11.29 16:11:15

  • ‘유난스러운 취향’. 몇 해 전까지 채식주의자를 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소수의 유별난 문화로 여겨졌던 이 ‘취향’은 최근 동물복지와 글로벌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목적의 친환경 트렌드인 ‘비거니즘(Veganism)’으로 발전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동물보호 및 환경보존에 관한 관심이 친환경 소비 트렌드로 표현되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한국채식비건협회에 따르면 세계 비건 인구는 지난해 말 기준 1억 8000명, 국내는 250만 명으로 점진적 증가 추세를 보인다. 국내 비건 인구는 2018년 150만 명에서 2021년 250만 명으로 최근 3년간 6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추듯 산업계 전반에 비거니즘 경향은 확산하고 있다. 외식을 넘어 패션·화장품·자동차 등 산업 전(全) 분야로 확장되는 추세다.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 등 국내 화장품 업체들은 동물 조직·뼈 등에서 추출한 원료를 식물성으로 대체한 제품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벤츠·BMW·현대차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도 차량 내부에 비건 가죽을 적용한 모델을 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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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데믹 이후 급부상한 비거니즘

    ‘비건(Vegan)’이란 용어는 1944년 영국비건협회 창립자인 도널드 왓슨이 최초로 사용했다. 당시에는 ‘비유제품 채식주의’로 통했지만, 1951년부터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원칙’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다만 이전까지도 채식주의자라는 용어는 존재했다.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제자들에게 육식을 금했기에 ‘피타고라스 식단’이란 말로 통용되기도 했다.

    비거니즘이 본격으로 큰 관심을 받게 된 계기는 코로나19 이후다.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한 삶은 물론 동물복지 및 지구 환경보존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가치 소비 성향을 따르는 MZ세대를 중심으로 채식을 선호하는 ‘비건’ 문화가 뚜렷한 트렌드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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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여름 태풍 및 장마철로 인한 홍수 등 재난 발생 시 기후변화에 관심이 더해져 ‘비거니즘’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여론이 더욱 증가하는 현상이 두드러짐에 따라 비거니즘은 단순한 채식문화를 벗어나 동물보호, 재활용을 통한 환경보존 등 생활습관의 변화를 포괄하는 라이프 스타일 개념으로 확대되고 있다.

    영국, 독일 등 유럽에서는 이미 활성화된 ‘비거니즘’이 최근 국내에서 빠르게 확산하면서 국내 ‘비건’ 인구는 3년 새 67% 증가하며 채식 전문식당도 급증하고 있다. 식당의 형태도 기존 간편식 형태가 아닌 파인다이닝은 물론 일상생활 속 채식 요리가 일반화되는 추세다. 식품 분야 대기업들도 저마다 특색 있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식물성 식품 전문 브랜드 ‘플랜테이블’을 출시하고 비건 만두 등을 선보인 데 이어 떡갈비, 함박스테이크, 주먹밥 등을 제품군에 추가했다.
    CJ제일제당은 식물성 식품 전문 브랜드 ‘플랜테이블’을 출시하고 비건 만두 등을 선보인 데 이어 떡갈비, 함박스테이크, 주먹밥 등을 제품군에 추가했다.

    농심은 지난 5월 잠실 롯데월드에 비건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포리스트 키친’을 오픈했다. 미국 뉴욕의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에서 근무한 김태형 총괄셰프와 손을 잡고 농심은 비건 음식 분야에서 앞서는 미쉐린 그린스타 셰프인 벨기에의 니콜라스 디클로트와 함께 스페셜 메뉴도 선보였다. 포리스트 키친은 오픈 세 달여 만에 서울시가 발표한 ‘2022 테이스트오브서울 100선’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신세계푸드는 지난 7월 강남구에 비건 레스토랑 ‘더 베러’를 오픈했다. 오는 12월까지 운영하는 ‘더 베러’는 신세계푸드의 대안육 브랜드 ‘베러미트’의 콘셉트 스토어다. 베러미트는 대체육 제품뿐 아니라 식물성 음료, 치즈, 소스, 디저트 등을 통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풀무원 역시 서울 강남구에 캐주얼 비건 레스토랑 ‘플랜튜드’를 운영 중이다. 식물성 지향 식품을 활용한 메뉴를 선보이는 플랜튜드는 다양한 메뉴를 1만원대 안팎에서 즐길 수 있는 캐주얼 레스토랑을 지향한다. 접근성을 낮춰서 더 많은 사람이 식물성 지향 식품을 맛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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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건은 입고 바르는 것도 다르다

    구찌·생로랑·발렌시아가 등 쟁쟁한 브랜드를 보유한 글로벌 패션그룹 ‘케링(KERING)’은 올가을부터 모피 사용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털을 얻으려고 동물을 죽이는 것은 현대 명품이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다. 비건 레더는 이미 패션계 주요 아이템으로 부상했다. 구찌는 2년간 자체 연구를 통해 목재 펄프와 비스코스 등 식물성 원료 기반의 비건 레더를 개발했고, 올해 6월 비건 스니커즈 라인을 출시했다.

    동물학대 논란이 일면서 동물성 원료를 배제하기 위한 노력은 이미 꽤 오랜 시간 패션 회사들에 의해 지속되었다. 그 결과 대체 가죽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해 이 분야 95개 기업이 전년의 두 배에 달하는 약 9억8000만달러(약 1조2412억원)를 투자받았다. 대부분 2014년 이후 설립된 회사로, 주로 버섯 뿌리, 파인애플, 선인장과 기타 유기농 성분을 활용하거나 비트로랩스처럼 줄기세포 기술로 제품을 만든다.

    대표적으로 에르메스는 비건 레더로 핸드백을 만들고 있다. 버섯 균사체를 이용해서 진짜 가죽과 비슷한 촉감과 내구성을 가진 비건 레더를 개발한 미국의 바이오테크 스타트업인 마이코웍스의 비건 레더를 에르메스가 3년여에 걸쳐 협업하며 테스트했고, 빅토리아백의 비건 레더 버전을 출시했다. 구찌는 직접 개발한 비건 레더 소재를 ‘데메트라(Demetra)’로 상표 출원하고 이 소재를 스니커즈뿐 아니라 액세서리부터 핸드백 등 모든 컬렉션에서 활용할 계획이다.

    농심이 운영하는 비건 파인다이닝 ‘포리스트 키친’의 흑마늘 대체육 함박스테이크.
    농심이 운영하는 비건 파인다이닝 ‘포리스트 키친’의 흑마늘 대체육 함박스테이크.
    사라지는 가죽제품 어떻게 대체될까

    동물성 성분과 실험이 성행했던 화장품 업계에서도 친환경 비건 제품이 확대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 등은 비건 전용 브랜드를 새로 만들고 식물성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마케팅 경쟁을 펼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2020년 6월 비건 화장품 브랜드 이너프프로젝트(Enough Project) 브랜드를 론칭했다. 대표 제품은 이너프프로젝트 보습 크림 및 ‘24H 유스 앰플’ 등이 있다. 24H 유스 앰플은 비건 클린 뷰티를 지향하는 이너프 프로젝트의 가치를 담아, 한국 비건 인증원에서 비건 제품 인증을 받았고, 버려진 플라스틱을 재활용한 PCR(Post-Consumer Recycled) PET를 50% 사용했다.

    LG생활건강은 지난해 8월 ‘빌리프 X VDL 비건 메이크업’ 라인을 출시하며 비건 시장에 발을 내디뎠다. 전 제품 동물 실험과 동물성 원료를 모두 배제한 것은 물론 피부 자극 테스트와 한국 비건 인증원의 비건 인증을 완료했다. 멀티 컬러 리퀴드, 프라이머, 스틱 파운데이션을 처음 선보이고, 같은 해 11월 립 앤 아이 메이크업과 클렌징 제품을 포함해 총 7개 품목을 추가로 선보였다. LG생활건강의 자연주의 화장품 더페이스샵도 올해 1월 비동물성 원료를 사용하고 한국비건인증원에서 비건 인증을 획득한 ‘더테라피 비건’ 라인 4종을 출시하며 비건 시장에 진출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뷰티 기업은 브랜드와 제품군을 선보이며 시장은 더욱 성장할 전망이다.

    비건의 단계별 스펙트럼
    비건의 단계별 스펙트럼

    친환경 이슈가 생존 문제와 직결된 자동차 업계도 오랜 기간 진짜 가죽을 인조가죽, 합성가죽으로 대체하고 있다. 벤틀리가 100주년 기념 모델의 시트를 제작할 때 쓴 가죽이 와인 제조 공정에서 발생하는 포도 껍질과 줄기로 만든 비건 레더였고, 폭스바겐이 2019년 상하이 모터쇼에서 선보인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콘셉트카는 사과 껍질에 폴리우레탄을 혼합해 만든 비건 레더로 시트를 제작했다.

    테슬라는 모델3에서 천연가죽을 없애고 파인애플 잎과 줄기를 사용한 비건 레더로 시트를 만들기도 했다. 볼보는 순수 전기차 모델 C40를 개발하면서 볼보 역사상 처음으로 가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자동차를 만들었다. BMW, 벤틀리, 아우디 등도 가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자동차 라인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장기적으론 자동차에서 가죽 소재는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대표는 “미래의 테슬라 모델을 비건 자동차로 만들겠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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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분야에서 비건 제품이 출시되고 있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도 드러난다. 비건 제품을 고르고 구매할 의향이 있더라도 대체로 가격이 높고, 구입처를 찾기 어려우며, 아직 종류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황성영 하나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아직 카테고리도 식품과 화장품 등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며 “지난해 전체 구매 건 대비 비건 카테고리 비중은 0.005%에 불과하고 그나마 화장품·뷰티케어(0.082%), 출산·육아용품(0.024%), 냉동식품(0.024%)에 대부분 집중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패션업계 역시 비건 가죽의 내구성 향상을 위해 다양한 보완책을 시도 중이나, 실제 소가죽의 내구성과 경쟁이 어렵고 수명이 짧아 미봉책에 그칠 것이란 시각도 있다. 이 외에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비건 식단이 치명적일 수 있다는 시각이다. 영유아나 어린이는 성장에 필요한 특정 영양소의 요구량이 많은데 알레르기와 같은 신체적 이유가 아님에도 부모의 신념에 의해 강제로 비건이 되는 아이들이 생길 수 있고, 이는 신체 발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소아과 의사의 감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목재 펄프로 만든 구찌 데메트라 스니커즈.
    목재 펄프로 만든 구찌 데메트라 스니커즈.

    황 연구원은 “2017년 벨기에에서 식물성 우유만 섭취한 생후 7개월 아기가 영양실조로 사망했고 2016년에도 이탈리아에서 1세 아이가 극히 낮은 칼슘 수치를 보여 법원은 채식만 강요한 부모의 양육권을 박탈한 사건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7호 (2022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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