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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 루시드폴, 기타를 내려놓고 소리를 탐구하다
입력 : 2019.12.30 11:4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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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대중음악계는 아이돌 댄스 음악, 힙합 음악 등으로 대변되는 ‘주류’의 시대를 넘어 보다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음악이 공존하는 시대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가수가 수백 개의 신곡을 발표하고 있지만 왠지 비슷한 느낌의 음악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아이러니한 가요계의 현실. 그 때문일까. 세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공명을 울리듯 자기만의 길을 우직하게 걷는 뮤지션은 그 존재 자체로 빛난다.
최근 정규 9집 <너와 나>로 돌아온 루시드폴(본명 조윤석, 44)은 전술에 꼭 부합하는 뮤지션이다. ‘음유시인’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어쿠스틱 기타 선율에 몸을 맡긴 시적 언어를 무기력한 듯, 하지만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의 음성은 그리 대단한 듯하지 않아도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위로를 준다. 개중 어떤 곡은 마치 자장가처럼 포근해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수면제(?)가 되기도. 지금은 제주에 터전을 마련한 뒤 귤 농사를 지으며 인생의 또 다른 장을 열었지만, 새로운 경험은 그의 음악에도 고스란히 투영돼 음악 팬들에게 더 깊은 심상, 더 짙은 잔향을 남긴다. 1990년대 후반 활동했던 미선이 밴드를 거쳐 솔로 아티스트 루시드폴로서 2005년 내놓은 두 번째 정규앨범 <오, 사랑>을 시작으로 2007년 3집 <국경의 밤>, 2009년 4집 <레 미제라블>, 2011년 5집 <아름다운 날들>, 2013년 6집 <꽃은 말이 없다>, 2015년 7집 <누군가를 위한>, 2017년 8집 <모든 삶은, 작고 크다>까지 2년 주기로 정규 앨범을 발매하고 있는 루시드폴의 지난 2년의 시간을 담은 9집 <너와 나>는 이번에도 조금 특별하다. 포토 에세이와 함께 발매되는 이번 앨범은 10년이란 긴 시간을 함께한 반려견 보현과의 특별한 컬래버레이션으로 완성됐다. 반려견을 대상으로 한 작품집은 많지만, 그의 반려견 보현은 루시드폴의 파트너로 나서 앨범에 담긴 수많은 ‘소리’를 담당했다. 앨범 크레디트에 당당히 작곡가로 이름을 올리며 국내 1호 반려견 저작권자가 됐다.
“2018년에 모 출판사에서 그림책 번역 제의를 받았어요. <손으로만 해요>라는 책이었죠. 동네의 유기견을 좋은 마음으로 한두 마리씩 거두다 지금은 꽤 커진 유기견 보호소가 있는데, 제도적으로 지원을 받기 어려운 형편이라 십시일반 주위에서 돕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번역료를 그쪽에 기부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서 작업을 하기로 했거든요. 그 사정을 출판사에서 알게 됐고, 보현의 사진집을 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주셨어요.” 루시드폴이 처음부터 출판사의 사진집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처음엔 좀 머뭇했어요. 예쁘고 귀여운 반려견을 담은 화보, 단순한 반려견 사진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죠. 제안을 받고 망설이다 2019년은 정규음반을 내는 해니까, 음반과 뭔가를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가장 어쿠스틱한 울림으로 어떤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을지 긴 시간 고민해왔었는데, 마침 제 음악적 관심사가 2018년에 있었던 어떤 일을 계기로 많이 변했거든요.”
계기가 된 건 예기치 않은 사고였다. “농장에서 일하다 손을 심하게 다쳤고, 한동안 기타를 칠 수 없는 상황이 됐어요. 잡혀있던 공연도 취소하고… 뭐랄까. 음악적 거세를 당한 기분이었죠.”
루시드폴은 “혼자 돌파구를 찾다가 손가락을 많이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음악을 듣게 됐다”고 담담하게 당시를 떠올렸다. “전자음악이나 실험음악, 컴퓨터가 많이 해주는 음악들. 그러면서 사운드스케이프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겼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소리 이외에 다른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됐어요. 그런 와중 반려견에 대한 이야기와 같이 묶어서 앨범을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그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죠.”
불의의 사고였지만 이 사고는 음악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줬다. 지난 십수년간 루시드폴 음악은 ‘어쿠스틱’ ‘유기농’ ‘아날로그’ 등으로 대표돼 왔지만 이번 작업을 계기로 접근법을 달리 하면서 더 폭넓은 음악의 세계로 나아가게 됐다.
“꽤 긴 시간 동안 기타 없는 제 음악을 상상할 수 없이 살아왔어요. 어느 순간에는 제가 거부하고 싶더라도 듣는 분들이 ‘루시드폴 음악같다’고 할 때, 조용조용한 기타 소리에 나오는 음악, 그렇게 카테고리화되어 있더군요. 한편으로는 안전한데, 다른 편으로는 좀 고착화된 면도 있었겠죠. 그런데 제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기타와 거의 강제적으로 떨어져 살아야 하는 상황이 온 거예요. 음악적으로 뭔가 해야 하는데 기타를 칠 수 없었기 때문에 기타가 가장 멀리 있는 악기가 된 거였죠.”
루시드폴은 “처음엔 여러 가지 음악을 들었지만 엠비언트 음악(ambient·전자 악기 중심의 공간감적 명상 음악)을 많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런 고민들이 더 깊어지지 않았나 싶다”면서 “엠비언트 음악 자체가 소리와 음악의 경계를 들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피곤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분명 큰 계기, 순간이 된 것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작업은 소리의 ‘채집’부터 시작됐다. 소리를 채집하고 합성할 수 있는 도구를 구했다. 아침 산책길 루시드폴과 아내, 그리고 보현이 내는 모든 소리를 녹음했다. 계절마다 다른 새 소리, 바람 소리까지. 어쩌면 간밤 피어올린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까지도. 그 모든 소리는 음악의 원재료가 됐다.
채집한 소리가 음악으로 탄생한 과정은 루시드폴이 ‘고요연구소’라 명명한 자신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졌다. 마치 공학도 시절 실험실에서 보낸 일상과 흡사했다. “예전에 실험실에서 실험하고 데이터 분석하고 기계를 돌리고 결과가 나왔던 일상처럼, 아침에 일어나 기계를 켜고 신디사이저를 켜고 유튜브 켜고 강의 듣고, 새로 나온 모듈에 대해 고민하고, 소리를 만들고, 보현이하고 산책할 시간이 되면 레코더 들고 나가 소리 채집하고, 들어와서 프로파일링하고… 돌이켜보면 기타 치며 사는 걸 업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이 어떻게 보면 음악적으로 많이 해방시켜준 것 같기도 합니다.”
루시드폴은 이번 앨범에서 ‘소리’와 ‘음악’의 경계를 두지 않고 모듈러 신스(modular synth), 샘플링, 필드레코딩(소리 채집), 그래뉼라 신테시스(granular synthesis·소리의 작은 단위부터 출발해 이를 배열, 가공, 조합해 다른 차원의 사운드를 만드는 디지털 음악합성 기법 중 하나)를 통한 다양한 시도를 했다.
총 13곡이 수록된 이번 앨범의 모든 소리는 ‘만들어졌다’. 특히 수록곡 ‘산책할까’와 ‘뚜벅뚜벅’은 온전히 보현의 소리로만 완성됐다. 리드미컬한 분위기 속 멜로디 역시 보현의 소리를 녹음해 변주시키고, 새로 합성해 다양한 소리를 만들었다. 심지어 악기의 일부 소리도 보현의 소리로 만들어냈다. 이 모든 과정과 결과물에 대해 루시드폴은 “너무나 말이 되고, 또 의미도 있더라”며 무릎을 친 속내를 털어놨다. “언젠가는 (보현과) 헤어지겠지만, 보현의 소리 DNA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면 노래 안에서 보현이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는 것이다.
보현이 전방위로 나선 수록곡 ‘콜라비 콘체르토’는 이번 앨범 선공개곡으로 낙점됐을 정도로 각별한 곡이다. 보현이 콜라비를 먹는 소리에서 착안해 탄생한 곡인데, 보현의 소리만으로 이뤄진 곡이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색다른 시도가 인상적이다.
“어떤 개들은 편식도 한다는데, 보현이는 특별히 안 먹는 게 없어요. 특히 콜라비나 사과 같은 걸 먹으면 사람의 구강에선 절대 날 수 없는, 굉장히 상쾌한 소리가 나요.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다가, 굉장히 음악적이란 생각을 하게 됐죠. 보현이 콜라비 먹는 소리들을 몇 번 채집해 그걸 컴퓨터로 더 재미있게 변주해서, 마치 여러 명의 보현, 혹은 강아지가 같이 콜라비를 먹으면서 각각 다른 속도와 다른 높낮이로 하나의 합주를 하는 것처럼 곡을 만들었습니다.”
보현은 자신의 소리로 탄생한 ‘콜라비 콘체르토’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루시드폴은 “조금 신기했다. TV나 음반에서 다른 개 소리가 들리면 으르렁거리곤 하는데, 이번엔 짖지 않더라”며 빙긋 웃었다.
“이번 앨범의 경우 완전히 음악으로 바뀌어버린 소리도 있지만, 보현이 왕 하고 짖거나 으르렁거리는 내추럴한 소리들이 노래에 섞여 나와 그런지, 짖지 않더라고요. 편안하게 듣는 모습을 보고 자기 소리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쉽게도 보현의 마음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편안하게 듣고 있는 것으로 짐작하는 거죠.”
콜라비를 맛있고 재미있게 먹던 보현은, 자신의 주인이자 동반자인 루시드폴 덕분에(?) 뜻밖에 뮤지션이 됐다. 앨범 크레디트에 ‘작곡·콜라비 연주: 보현/편곡: 루시드폴’로 이름이 올랐고, 저작권 등록도 진행 중이다. 루시드폴은 “보현의 저작권 등록 서류와 통장을 만들면서 어린 시절 명절 때 부모님께 맡겼다 다시는 찾지 못했던 세뱃돈이 떠올랐다”면서 “보현의 저작권료가 나오면 그걸로 밥도 사주고, 껌도 사주고, 독립하게 하려 한다”고 너스레 떨었다. 또 “보현의 친구들에게도 보현의 이름으로 도움을 줄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아날로그적 작업 방식을 고수해 오던 루시드폴에게 일종의 ‘전환점’이 된 이번 작업 이후 깨닫게 된 것도 상당하다. “대체로 어쿠스틱 악기 하면 내추럴하고 따뜻하다는 공식이 있는데, 정말 그럴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는 그가 이번 작업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사람이 만든 소리만큼 자연의 소리에 자극적인 건 없는 것 같다”는 것.
“아날로그는 따뜻한 반면 디지털은 차갑다는 말을 많이 하죠.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의문이 들었어요. 사실은 아날로그가, 훨씬 왜곡이 많죠. 이를테면 릴테입이나 LP는 그 당시 기술상 코딩이 불가능해서 전기의 힘으로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하려다보니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지, 음의 왜곡은 훨씬 더 하거든요. 오히려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더 원음에 가까운 소리를 만나게 되죠. 그러면서도 저 역시 흔히 생각하는 ‘아날로그=따뜻해, 디지털=차가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원음에 가까운 자연의 소리는 뭘까요. 그것도 어려운 질문이에요. 자연에 없는 소리는 자연스럽지 않은 소리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날카롭고 나쁜 방향으로 귀를 자극하는 소리는, 대부분 인간이 만들어낸 소리라는 것이죠. 이제 더 이상, 어쿠스틱이냐 디지털이냐는 무의미한 것 같아요.”
이 같은 깨달음은 향후 음악 작업에 드러날 더 많은 변화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다양한 음악을 하기 위해 다양한 툴을 쓰는 건지, 여러 툴을 쓰다 보니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관심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제가 화가라면 팔레트 위에 물감이 한 가지만 있어도 그림을 멋있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백 가지 물감이 있는데 그 중 하나만 선택해서 그리는 것과, 하나밖에 없어서 그걸로만 그리는 건 다른 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팔레트 위 물감 개수를 조금씩 늘리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전에는 어쿠스틱 기타 위주 음악, 내추럴한 사운드 범주 안에서 깊게 파고들려 했다면 이번 앨범을 통해선 방향이 달라지게 됐어요.”
전업 뮤지션이 되기에 앞서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후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대학원 생명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2007년 스위스 화학회 고분자과학부문 최우수논문발표상을 수상하는 등 전문 분야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낸 ‘넘사벽’ 공학도 루시드폴. 그의 탐구와 실험이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밤낮 없이 함께 하고 있는 ‘귤나무’다.
“요즘은 식물들의 음악을 실험하고 있어요. 저는 항상 나무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이라 ‘나무는 어떤 생각을 할까’에 관심이 높아졌어요. 물론 인간 기준의 사고는 아니겠지만, 나무라는 생명체 내부의 흐름을 음향화시키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조금 더 체계화시켜서 나무와 같이 만드는 음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5년 전, 결혼 후 제주도에 터를 잡은 루시드폴은 “지금 환경에 너무 만족하기 때문에 도시에서 살 자신은 없어졌다”고 했다. “사람 일은 알 수 없으니, 내가 농사를 못 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이 밭을 팔면 어떻게 될 지 너무 잘 안다. 주변의 나무는 다 베어지고 타운하우스가 됐다. 크지 않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이들(나무)만큼은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것.
“반딧불이도 살고, 특히 요샌 새들이 많아졌어요. 갈 데가 없어서 그런 걸까요. 그래서 저는, 그냥 지금처럼만 살 수 있으면 감사할 것 같고. 도시로 가거나 농사를 그만 둘 생각은 없어요.”
‘농사꾼’으로서의 목표에 대해 묻자 그는 “없다”며 쑥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이제 6년 정도 됐는데, 유기농 인증을 받거나 수확량을 높이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그냥, 좀 더 알고 싶어요. 귤나무를, 레몬나무를요. 올해는 귤이 맛있게 나왔는데, 왜 해마다 다르게 나올까. 어느 해 다산하는 나무는 다음해에 꽃을 못 피우는데, 그런 해걸이 없이 나무들도 피곤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실험으로 치면 1년에 한 번 밖에 할 수 없는 실험이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좀 더 알아가고 싶어요.”
‘음악인’으로서의 목표도 같았다. “더 알고 싶고, 나라는 사람의 팔레트가 있다면, 색깔이 1년에 하나, 2년에 하나도 좋으니 점점 늘려가고 싶어요. 식물의 소리를 음악화하는 작업도 진지하게 해보려 하고요. 주위의 좋은 뮤지션들과 새롭고 과감한 음악도 싱글 단위로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연-음악-사람이 이뤄내는 너무나 이상적인 각도의 ‘트라이앵글’이. 그의 음악은 그 자체로 루시드폴이고, 자연이었다.
[박세연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기자 사진제공 안테나]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2호 (2020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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