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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사진작가(겸 설치미술가) | 1920년대 모더니즘에 빠졌던 남자 ‘모던 보이’로 환생
입력 : 2016.08.05 17: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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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사진작가(겸 설치미술가)를 처음 만난 건 정확히 20년 전이다. 1996년 그는 섭외 일순위 패션 포토그래퍼였다. 지금은 중년이 된 X세대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무크, 시스템, 엘칸토, 베이직 진 등 유명 패션브랜드의 광고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패션이 지금의 IT처럼 첨단 유행을 선도하던 시절 소비자 마음을 정확히 집어내는 그와 작업을 원하는 기업의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잘 나가는 사진작가만은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 서울 청담동을 중심으로 생겨난 고급 상류 문화를 만들고 전파했던 선도자였다.
그는 프랑스 파리 마레지구에 있는 100년 된 명소 ‘카페 드 플로르’의 이름과 인테리어를 가져와 청담동에 문을 열었다. 원래 ‘카페 드 플로르’는 프랑스 카페를 대표하는 곳으로 피카소, 장콕도, 카뮈, 에디트 피아프 등 많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이를 따라하듯, 청담동 ‘카페 드 플로르’에 예술가와 연예인, 패션업계 종사자 등 트렌드 세터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그곳은 서구의 새로운 문화를 즐기고 유행을 선도하는 장소로 명성이 자자했다. ‘카페 드 플로르’의 주인장이던 김영호 작가하면 ‘청담동 고급 문화 전파자’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됐을 즈음 그는 다시 변신했다. 이번에는 진지한 예술사진 작가로 다가왔다.
그는 우리시대 명인들을 흑백 사진으로 기록한 ‘명인전’부터 현대자동차 공장의 기계 장치와 그 흔적을 추상 판화처럼 기록한 ‘Great Modern’전, 사람이 스스로 잘 볼 수 없는 ‘등’에 오롯이 집중해 찍은 ‘몸’ 사진전, 물속에 누운 채 연잎의 풍경을 찍은 ‘피안’전 등 잇달아 예술사진전을 연 것. 그의 작품들은 현대 미술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예술사진들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 김영호 작가에겐 ‘설치 미술가’라는 수식어가 한 개 더 생겼다. 그는 현재 도자기 로봇의 머리 위에 형광등을 올린 설치 미술작품 ‘모던 보이’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서울 신사동 코너아트스페이스에서 개최한 ‘스스로 빛나는 존재, 모던 보이’ 전시는 60여 명의 각계각층 전문가들과 협업(컬레버레이션)한 작품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초창기 활동 때부터 1920년대 모더니즘 사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모더니즘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해를 원년으로 봅니다. 전쟁으로 인해 당시의 패러다임이 전부 바뀌었죠. 왕족과 귀족이 몰락하고 신흥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는데 바로 모더니즘입니다. 저는 새로움을 받아들이려는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시대 정신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시인 이상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 그리고 시대를 앞서간 기업인 정주영과 이병철, 최근의 스티브 잡스와 마크 저커버그 등 이들 모두는 모던 보이이고 모던 걸인 거죠.
▶‘모던 보이’ 설치미술을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확대해 나간다고요.
제가 만든 작품 중에 사람 키만 한 ‘태양광 골목 지킴이 모던 보이’가 있습니다. 낮에 태양광으로 충전해서 밤에 골목에서 환하게 빛을 내는 작품입니다. 투명한 소재로 만든 로봇 몸체에는 손전등, 건빵, 소화기, 방독면, 우산, 마이크 등 비상 상황에 필요한 물품들이 들어있습니다. 이 로봇을 깜깜한 섬마을이나 인적이 드문 도시 골목에 설치하면 사람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만든 거죠. 또 한 가지는 태양광으로 켜지는 모던 보이 전등을 만들어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 등 저개발국에 전파하고 싶습니다. 전기가 없는 그곳에 태양광 모던 보이가 보급되면 거기 사람들이 보다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태양광 전등을 선물하면 모던보이 정신도 같이 전달할 수 있다는 거죠. 세상은 아무도 너를 도와주지 않지만 너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서울284’ 전시 작품
▶사진이나 미술 등 작업을 할 때 본인만의 철학은.
제가 철학으로 삼는 말이 있습니다. ‘형식은 본질의 표면이나, 진실은 보이는 것 너머에 있다’입니다. 사물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걸 좋아합니다. 연꽃을 찍은 ‘피안’ 시리즈의 경우 물위에서 보다가 물속으로 들어가 찍은 작품입니다. 대림미술관에서 개최한 ‘몸’ 개인전도 사람의 등만 찍었습니다. 사람은 본인의 뒷모습을 평생 못 보고, 거울을 비춰 봐도 내가 보는 것과 사람들이 보는 게 정반대입니다. 현대자동차 공장을 찍은 사진전에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자동차 충격을 실험하는 벽면을 찍었습니다. 이 흔적이 생기려면 수백억씩 들여 만든 셀 수 없이 많은 자동차들이 부딪쳐야 하죠. 생각하기에 따라 엄청난 가치를 지닌 흔적입니다. 자동차의 기술과 열정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작품으로 볼 수 있지요. 새로운 시각으로 보니까 새로운 세상이 나타나는 거죠. 이게 제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업 방식이 궁금합니다. 최근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나요.
일을 시작할 때 스토리텔링부터 먼저합니다. 그러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죠. 현대자동차의 해외공장 프로젝트를 할 때는 화폐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다가 기호학에 넘어갔고 주역까지 읽게 됐습니다. 그때 읽었던 주역이 ‘모던 보이’ 작품을 만들 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작품 아이디어는 갑자기 나오는 게 아니고 연구했던 많은 것들이 흩어진 파편처럼 있다가 조합이 되기 시작합니다. 최근 맡은 프로젝트는 ‘실크로드’를 가지고 스토리텔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달 중국 시안을 여행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여러 전문가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500년 역사를 지닌 비림(비석의 숲)이란 곳에서 원하던 한자어 하나를 찾았는데 마치 인디애나 존스가 보물을 발견한 희열을 느꼈습니다. 저는 저의 작업이 이미지만 양산하는 게 아니라 철학이 들어 있길 바랍니다. 돌멩이도 철학이 있으면 작품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한낱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불과합니다.
[김지미 기자 사진 류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71호 (2016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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