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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 민주화의 큰 별, 영원히 잠들다
입력 : 2015.12.24 17: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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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2일 새벽 12시 22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영면(永眠)했다. 지난 11월 19일 정오에 고열과 호흡곤란으로 서울 연건동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던 김 전 대통령은 상태가 악화돼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받았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서거 당시 임종은 차남 김현철 씨가 했지만 부인 손명순 여사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88세가 된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한국 현대정치의 ‘양김 시대’(김대중·김영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났다. 남해안에 큰 멸치어장을 소유하고 거제에서 이름난 갑부였던 아버지 김홍조 씨와 어머니 박부연 씨의 1남 5녀 중 외아들이었던 덕에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장목소학교, 통영중학교,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김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 역로는 한국 현대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3, 5, 6, 7, 8, 9, 10, 13, 14대 국회의원까지 9선 의원을 지냈는데, 만 26세였던 1954년 여당인 자유당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치른 첫 국회의원 선거(3대)에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화려하게 국회에 진출했지만 여당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을 내세우자 반대표를 던지고 탈당했다. 30여 년 정치 역로의 시작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8년 제4대 총선에 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여당의 부정선거 공작에 낙선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제5대 총선에서 국회로 복귀해 정치적 영향력을 높여갔지만 그 해 9월 어머니 박부연 씨가 무장간첩의 총탄에 살해되고,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활동이 전면 금지되는 등 잇따라 좌절을 겪게 된다.
김 전 대통령은 대변인 2번, 원내총무 5번, 야당 대표 3번, 9선 의원 등을 역임하며 민주화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군사정권에 맞섰다. 1970년대 후반에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에 항거하다 고초를 겪었고,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에는 23일간의 단식 투쟁,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 정치적 박해와 고난 속에서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대통령 재임기간에는 칼국수로 오찬을 대신하는 등 검소함과 청렴함을 표방하며 하나회 청산, 금융·부동산실명제 도입, 지방자치제, 부패 척결 등을 실시했다. 지칠줄 모르는 추진력에 퇴임 후 대한민국 사회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에도 임기 중 외환위기에 따른 국가부도사태를 초래하며 임기 초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땅에 떨어지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 퇴임 후에도 ‘양김시대’(동교동·상도동)의 상징인 상도동계의 리더였다. 애칭 ‘YS’와 좌우명 ‘대도무문(大道無門)’은 그의 영원한 트레이드 마크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딸 혜영(63), 혜정(61), 혜숙(54) 씨, 아들 은철(59), 현철(56) 씨 등 2남3녀가 있다.
감사원이 동원된 총체적인 사정의 고삐는 좀처럼 느슨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이 김 전 대통령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최측근이라 불리던 최형우 당시 민자당 사무총장이 아들의 대입 부정으로 물러났는가 하면, 정권 말기엔 차남 현철 씨가 알선수재·조세포탈 혐의로 구속 수감되는 등 취임 초기 개혁의지가 퇴색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율곡사업 비리도 책임을 물었다. 30조원 규모의 전력증강사업인 율곡사업을 이끌던 이종구, 이상훈 전 국방장관을 비롯한 김철우 전 해군참모총장, 한주섭 전 공군참모총장 등 전직 군 최고위 간부들이 방산업체 등으로부터 수억원에서 수천만원까지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속되기도 했다.
34년 만에 부활한 지방자치, 자부심을 느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과 중 대표적인 사회분야 업적 중 하나가 지방자치제다. 5·16 군사정변으로 1960년 이후 폐지된 지방의회가 1995년 6월 27일 지방선거를 통해 부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 시절 정부에 지방자치 부활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3당 합당 후 탄생한 민자당에서 여당 지도부가 된 김 전 대통령은 야권과 협상해 지방자치 부활에 합의를 이끌어낸다.
당시 여야의 합의 내용은 1991년 3월과 6월에 지방의회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이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민자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은 그해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1995년 상반기로 시행시기를 연기했다. 이후 대통령에 취임한 김 전 대통령은 민자당 총재 시절 약속한 지방자치제의 전면 시행을 추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방선거 투표소에서 “중단된 지방자치를 34년 만에 내 손으로 부활시킨 데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시행을 위해 긴급재정경제명령권까지 발동했다.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국회 의결을 거치지 않고 법률 효력을 갖게 되는 대통령의 권한이다. 그만큼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금융실명제 도입 이전인 1992년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29.1%나 됐다. 하지만 도입 직후인 1993년엔 24.3%로 1년 새 4.8%포인트나 하락했다. 차명과 가명이 가능하던 경제활동이 차단되자 차명계좌 대신 다양한 금융상품을 들고 나온 은행들로 인해 금융 분야가 한 단계 성숙해졌다. 더불어 금융소득조합과세가 도입되면서 투명한 과세가 가능해졌다. 금융실명제가 성공하자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부동산실명제도 도입했다. 부동산 거래도 매매 당사자의 실제 이름을 등록하게 한 것이다. 실명 거래가 아니면 법적 보호가 보장되지 않았다. 탈세와 탈법, 투기를 막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국가부도 사태, 90% 지지율이 8%로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는 김 전 대통령에게 가장 아픈 기억이자 과오다.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이듬해 IMF 사태가 불거지며 빛이 바랬다.
시작은 당시 재계 14위 한보그룹 계열사, 한보철강의 부도였다. 손 쓸 틈도 없이 3개월 뒤 삼미그룹이 부도를 냈고, 이후 기아차의 도산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쌍방울그룹과 해태그룹의 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고려증권과 한라그룹이 차례로 무너졌다. 그해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이 30조원을 훌쩍 넘기자 금융시장은 말 그대로 카오스나 다름없었다. 부채 상환에 외환보유액이 바닥 난 정부는 1997년 11월,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한다. 그리고 12월 3일에 550억달러를 지원받았다.
태풍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기업은 줄줄이 도산했고 정리해고자는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밖엔 칼바람이 분다”는 직장인의 푸념, 이 시기엔 안팎이 다르지 않았다.
경제전문가들은 이러한 사태의 원인으로 무리한 OECD 가입을 꼽는다. 정부가 무리하게 OECD 가입을 밀어붙여 다자간투자협정(MAI), OECD 뇌물방지협약 등 각종 개혁을 추진했지만 정작 기업들이 급변하는 경영환경이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취임 초 90% 넘게 치솟았던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이후 역대 최저 수준인 8%대까지 떨어졌다.
故김영삼 전 대통령의 語錄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이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 점거 농성을 폭력진압하자 항거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하고 발표한 성명서의 한 대목이다. 김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제명으로 부마(釜馬)항쟁이 촉발됐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정직하게 나가면 문은 열립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좌우명이다. 1979년 신민당 총재 재선 직후 ‘대도무문’을 내세우며 “권모술수나 속임수가 잠시 통할지는 몰라도 결국은 정직이 이깁니다”라고 열망과 원칙을 표현했다. 직접 ‘大道無門’을 쓰는 장면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기도 했다.
▶“민주화의 길은 산행과 같다.”
1987년 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산행도중 많은 낙오자도 있었다. 민주화도 이와 같다. 민주화의 길은 그만큼 고행의 길”이라고 표현했다. 그해 6월 민주항쟁으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표출됐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1990년 30여 년의 야당생활을 접고 3당 합당을 결행한 후 야권의 변절자란 비판에 맞선 한 마디. 김 전 대통령은 이후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해 1992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너무 급히 달려도 위험하지만 달리다가 멈추면 쓰러진다.”
1993년 모범수출업체 대표들과 점심식사에서 개혁을 자전거에 비유하며 멈추면 쓰러진다고 표현했다.
▶“분노와 저항의 시대는 갔으며, 투쟁이 영웅시되던 시대도 갔다.”
1993년 서울대 졸업식 축사 中
▶“보름 후면 남북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기로 했는데….”
1994년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
▶“남북한 사이의 체제경쟁은 이미 끝났다.”
1994년 8·15 광복절 경축사 中
▶“국민 여러분의 참담한 심경과 허탈감, 정부에 대한 질책과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 대통령으로서 부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이후 대국민 특별담화문 中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1995년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당시 일본 정치인들의 거듭된 망언을 논하며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다.”
1997년 차남 김현철 씨의 한보사태 이권개입 의혹에 대한 기자회견
▶“국민들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1999년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회동 中
▶“나도 23일간 단식해 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
2003년 당시 단식 농성 중이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를 방문한 자리에서 단식 중단을 요구하며
▶“버르장머리 고쳐줘야 한다.”
자신이 발탁한 김무성 의원이 2008년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후 방문하자 한나라당 공천심사가 엉망이라고 비판하면서 격앙된 마음을 표현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63호(2015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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