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현동 신사옥으로 이전한 김중도 앙드레김아뜨리에 대표 | 부친이 남긴 디자인유산 동시대적 요소 결합시켜

    입력 : 2015.05.08 14: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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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신사동의 랜드마크로 꼽히던 앙드레김 사옥이 지난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故) 앙드레김이 반세기 패션디자이너 외길을 걸으면서 생전 마지막 20년 동안 일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던 곳이다. 고 앙드레김의 시대는 신사동 의상실이 문을 닫으면서 마지막을 고했지만, 양아들이자 2세 경영인 김중도 대표가 이끄는 ‘앙드레김 아뜨리에’는 논현동에 새 둥지를 틀며 찬란한 2막을 열었다. 김중도 앙드레김아뜨리에 대표(35)는 “신사동 사옥을 매각해 상속세 등 그간 발목을 잡고 있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고 논현동에 건물을 사서 의상실을 다시 열게 됐다”며 “새로운 시작인 만큼 아버지가 남기신 디자인 유산에 동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 요소를 결합시켜 제 2의 전성기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앙드레김 신사동 이전 사옥은 코스닥에 상장된 제약회사에 180억원에 매각됐다. 이곳은 고 앙드레김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1999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옷 로비 사건 청문회에 불려나간 앙드레김은 그의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것과 함께 신사동 사옥에 세 들어 산다는 게 알려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사치의 온상지에서 막대한 부를 축척했을 거라는 의혹과는 달리 소박하고 검소하게 일에만 정진해온 모습이 알려져서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문회 이후 앙드레김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게 됐고 속옷 등 그의 이름이 들어간 상표를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많은 돈을 벌게 됐다. 마침내 2001년에는 임대해 사용하던 그 건물을 구입하기에 이른다.

    김 대표는 “아버지께서 월세 살던 건물을 갖게 됐을 때 무척 기뻐하셨다”며 “하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아이들도 키우고 세금도 내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테니 건물을 팔고 작은 곳으로 옮겨 다시 시작하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새로 마련한 사옥 겸 의상실은 이전 사옥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인 강남 을지병원사거리 인근에 위치해 있다. 부지 400㎡ 규모의 지상 4층, 지하 1층 건물로 ‘앙드레김 아뜨리에’는 1층을 쇼룸, 2층은 제작실, 지하는 창고로 활용할 방침이다. 건물 전면은 브랜드 상징색인 화이트로 치장하고, 1층 쇼윈도는 고 앙드레김이 생전 사용했던 책상과 물품들로 그의 집무실을 재현해 브랜드의 히스토리와 상징성을 강조할 방침이다.

    김 대표는 “20년 전부터 신사동 의상실 인테리어를 맡아온 분이 신사옥도 담당했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와 거의 변함없이 재현하려고 신경을 썼다”며 “여전히 앙드레김 디자이너를 그리워해서 부티크를 찾는 단골 고객들이 대다수고 그분들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해서다.

    디자이너 앙드레김은 떠났어도 발길을 끊지 않고 의상실을 찾는 단골고객이 궁금하다. 그는 “간혹 젊은 분들도 있지만 40~50대 가 많이 오고, 아버지가 안 계셔도 오히려 한 벌 사실 것을 몇 벌씩 더 사가기도 할 정도로 ‘앙드레김’에 애정이 많은 고객들이다. 워낙 오래된 단골손님들이라 무늬와 색상, 디자인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달라고 정확하게 요구할 정도”라고 얘기한다. ‘앙드레김 옷’이라고 하면 화려한 드레스를 떠올리지만 투피스 정장을 찾는 고객들도 많다고 김 대표는 귀띔한다.

    가격대는 20년 이상 앙드레김 옷만을 만들어온 장인들이 수작업을 위주로 한 오트퀴트르(고급 맞춤)의상을 제작하기 때문에 300만원대 고가다. 웨딩드레스의 경우 400만~500만원대를 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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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드레김 추모 5주기, 날로 짙어 가는 사부곡 올 8월이 되면 앙드레김 추모 5주기다. 서른이 될 때까지 단둘이 살아오다가 부친 없는 5년을 보낸 아들은 짙어가는 그리움에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김 대표는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을 써서 귀찮을 때도 많았지만 되돌아보면 그리운 시간들”이라고 회상하며 “요즘(세 아이의 아빠인) 내가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지만 결국은 원하는 대로 해주는 아버지 모습을 닮아 있어 놀라곤 한다”고 덧붙였다.

    김중도 대표는 결혼을 하지 않은 고 앙드레김이 생후 백일 때 입양한 양아들이다. 그럼에도 요즘 주변에서 아버지 생전모습과 닮아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삼십 년을 패션계 거장 아버지와 함께해온 세월이 그를 친아들로 만든 듯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의상실 문을 닫을 때까지 일하고 외부활동이 없는 날은 집에서 아들과 지내면서 집과 의상실을 쳇바퀴 돌듯 규칙적으로 살아온 생활패턴도 그대로 닮았다. 김 대표 역시 집과 사무실을 오가는 생활을 하지만 한 가지 부친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운동을 좋아한다는 것.

    그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아버지께서는 의상 전공을 권유하셨지만 싫다고 하니 더 이상 강요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해도 아버지만큼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며 계속해서 “운동을 워낙 좋아해 체대 들어가 운동선수나 체육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것은 말리셔서 불어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유명 아버지를 둔 그의 어린 시절은 남달랐다. 놀이공원이나 영화관을 가면 줄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관계자들이 뛰어나와 자리를 마련해줬다. 초등학교 때까지 의상실에서 직접 만든 흰색 옷을 입고 다녔고, 주말이면 오페라와 연주회를 빠짐없이 보러갔다. 해외 패션쇼도 거의 동행했고, 겨울이면 눈축제가 열리는 삿포로로 휴가를 떠났다.

    그는 “사람들이 아버지를 알아보는 게 신기했고 누구나 오페라를 보러 다니는 줄 알았다. 흰색 맞춤옷은 사춘기가 되면서 쳐다보는 이목이 부담스러워 안 입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남들처럼 평범한 옷을 입게 해 주셨다”고 전했다. 아들이 편하게 입고 다니도록 했지만 정작 고 앙드레김 본인은 흰색 옷만 입고 분칠한 얼굴, 검게 칠한 염색머리를 한 치 흐트럼 없이 고수해갔다. 옷장에는 사계절용 소재로 만든 120벌의 똑같은 흰색 옷을 갖춰놓았고, 숱이 적어진 머리를 보완하기 위해 매일 아침 5시경이면 이발소 염색사가 집으로 왔다. 방수기능의 L사 마스카라와 흑채 스프레이를 활용해 민머리를 검게 채웠다. 나이가 들면서 칙칙해진 피부톤을 보완하기 위해 파운데이션을 얼굴에 발랐다.

    김 대표는 아버지의 독특한 스타일에 대해 “처음부터 흰색 옷을 입었던 건 아니고 시행착오 끝에 볼륨이 풍성한 화이트 의상이 본인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결론 내리셨다. 머리는 여러 번 가발도 써보셨지만 불편하고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 전문 염색사에게 맡겨 칠하기 시작하셨고, 화장을 지운 소위 아버지 민낯은 무척 깨끗하고 피부도 좋다”고 떠올렸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아버지에 대해 말해달라는 질문에 김 대표는 감히 평가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일에 관해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똑같은 옷을 무대에 올리지 않았고 매번 변화하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그는 “앙드레김 옷은 맨날 똑같다는 말을 가장 싫어하셨다. 자수나 원단, 작은 디테일이라도 끊임없이 바꾸고 업그레이드시키려고 노력하셨는데, 그 미묘한 차이를 알고 이해하는 분들을 만나면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인간 앙드레김을 만날 수 있는 영화 <앙드레김>이 조만간 크랭크인할 전망이다. 배우 하정우가 주연을 맡고 <의뢰인>을 연출한 손영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지난 2008년 한국외국어대 졸업식에서 아버지 앙드레김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김중도 대표 학생 때 모습.
    지난 2008년 한국외국어대 졸업식에서 아버지 앙드레김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김중도 대표 학생 때 모습.
    라이선스 사업은 순항중… 중국 진출도 추진 “그동안 앙드레김이라는 브랜드가 어느 한 계층과 나잇대에 국한돼 있었던 게 사실”이라는 그는 “이제는 젊은 층, 좀 더 대중에게 다가가는 하지만 기품 있는 브랜드로 만들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새 사옥 이전을 계기로 김중도 대표는 앙드레김 유지를 받들어 종전 ‘앙드레김 아뜨리에’ 맞춤복 비즈니스와 앙드레김 브랜드 로열티 사업을 알차게 이끌어나갈 방침이다. 그의 곁에는 30년간 앙드레김과 함께 한 임세우 이사와 10여 명 공방 장인들이 있다. 의상실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지금은 김 대표의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유은숙 씨도 든든한 후원자다.

    현재 앙드레김 브랜드는 이너웨어와 안경, 양말, 도자기, 주방용 리빙도자기, 벽지, 우산, 타월 등 9개 품목에서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김 대표는 상표권 로열티 사업을 확대하는 한편 앙드레김을 세계적인 유명 상표로 키우기 위해 필요하면 실력 있는 패션기업과 협력하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검토 중이다. 그는 “속옷과 골프 라이선스 사업이 홈쇼핑 유통을 통해 계속 커가고 있고 조만간 아동복 라이선스도 새롭게 재개할 계획”이라며 또한 “앙드레김 컬렉션을 이어갈 디자이너와의 지속적인 콜라보레이션(협업)작업도 조만간 가시적 행보를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김 대표가 가장 신경 쓰는 신사업은 중국 시장 진출이다. 여전히 앙드레김을 기억하고 있는 중국 시장의 반응도 좋아 중국 진출에 대한 제안도 잇따르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 청도 등에서 앙드레김 패션쇼를 개최해온 터라 브랜드 인지도는 이미 쌓여 있는 상태고, 이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브랜드 사업을 벌이겠다는 복안이다. 김 대표는 “부친께서 활동하셨을 때 중국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셨는데 그래서인지 중국에서 고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중국 진출은 물론 지금까지 관심을 보이는 아랍권, 베트남 등 아시아 시장 진출도 시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기회가 된다면 부친 이름으로 재단과 교육 아카데미도 만들고 이런 과정을 통해 앙드레김을 한국을 대표하는 토털 패션 브랜드로 만드는 게 제 꿈”이라고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지난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한 행사에 당시 13세였던 김중도 대표가 부친과 함께 참석한 모습.
    지난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한 행사에 당시 13세였던 김중도 대표가 부친과 함께 참석한 모습.
    기부천사 행보도 대를 이어 지속할 것 고 앙드레김은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통 크게 쾌척해 왔고 사랑의 열매와 적십자 등에 기부해 명실공히 패션계의 기부천사란 칭호를 받아왔다.

    특히 그는 자신이 앓던 직장암을 치료해온 서울대학병원에도 가정 형편이 어려운 의대생들에게 장학금 명목으로 10억원을 기탁키로 하고 매년 일정액을 기부해 왔다. 그동안 기탁한 액수가 5억5000만원에 달한다. 도중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채우지 못한 10억원을 아들 김중도 대표가 이어가고 있다. 그가 아버지 최측근이던 임세우 이사와 함께 앙드레김 사후 서울대 의대에 남몰래 2억원을 기탁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에 서울대학병원 측은 감사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앙드레김은 활동 당시 유니세프 친선대사와 사랑의 열매, 적십자사 후원 활동과 자신의 모교인 고양중학교에도 장학금을 지원해왔다. 김 대표도 여건이 되는 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사회공헌에 적극 나설 뜻을 내비쳤다.

    김중도 대표 1981년생, 한국외국어대 불어불문학과, 2010년~현재 앙드레김아뜨리에 대표 [김지미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6호(2015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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