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인생 50년 맞은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건축은 인문학의 절정

    입력 : 2015.04.03 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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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마스터 플랜, 국립국악당, 코엑스, 명동성당 100주년 마스터 플랜,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수많은 작품을 남긴 건축가 김원은 김수근·김중업 시대 이후 한국 건축계의 큰 산으로 꼽힌다. 건축인생 50주년을 맞은 그가 요즘 고민에 빠졌다. 동숭동 사무실을 찾자 김원 대표는 “건축가로 평생을 살아왔으나 지금 내가 한 걸 자랑할 기분이 아니다. 일찌감치 건축을 시작했기에 개발 광풍에 편승해 잘 먹고 잘 살았다.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어려움을 겪는 후배들 생각에 인터뷰조차 부담스럽다고 했다.

    “제자들이 일이 없어 사무실 문 닫고 합치고 난리다. 거품 경제가 꺼지면서 건설 붐이 사라졌고 부동산 침체로 도산이 이어지고 있다. 기업이고 개인이고 집을 짓지 않는다.”

    그는 난마처럼 꼬인 교육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지적했다. “과거 사립학교들이 우후죽순으로 대학을 세웠다. 학교 세우는 게 커다란 이권이었다. 부모들이 뼈 빠지게 모은 돈 긁어가려고 기업하듯 학교를 세웠다. 정부 기준에 따라 먼저 세우기 쉬운 2년제 초급대학을 만든 뒤 야금야금 종합대 허가를 받았다. 종합대 만들려면 이과대나 공과대는 필수인데 공과대는 실습시설이나 장비 갖추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 공대에서도 건축과나 토목과는 돈 없어도 된다. 제도실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건축과, 토목과를 만들었다.”

    이게 좁은 땅에 건축가 과잉 상태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중동 특수 때 사우디 현장에서 막일을 한 사람들이 누구인줄 아나. 건축과 출신 학사들이다. 교육과 인력의 낭비다. 신도시 만들 때 잠깐 반짝했지만 그 이후로 계속 내리막이다. 그런 교육을 중단해야 한다.”

    건축계의 문제는 교육의 방향을 다시 설정해야 풀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전국에서 연간 수천 명의 건축가를 배출하고 있는데, 사회가 그들을 다 소화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대학들은 해마다 학생을 뽑아 또 건축가를 배출한다.”

    건축은 인문학의 완성 대학의 건축 교육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공돌이 교육을 받았다. 그게 아니다. 우리말에는 건축이나 건축가라는 단어가 없었다. 건축이란 게 뭔가. 세울 건(建), 쌓을 축(築). 일본인들이 서구 문명 들여와 세우고 쌓고 하는 물리적 작업만 본 것이다.”

    그를 이끌었던 김수근은 ‘공학’에 머물던 건축을 ‘예술’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런데 김원은 그마저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디자인이 어떻고 하면서 사람의 눈길 끄는 테크닉을 가르치는 게 전부는 아니다. 예술적이고 시대의 작품을 남기는 게 건축가의 목표여선 안 된다. 건축가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행복한 그릇(집)에 담아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작더라도 좋은 집에 있으면 얼마나 행복한가. 고대광실에 살아야만 행복한 게 아니다. 그래서 인생을 달관하고 삶을 알고서 해야 하는 게 건축가다.”

    김 대표는 지금 서양도 현대건축의 딜레마에 빠졌다며 해답이 우리에게 있다고 했다. “동양의 건축 개념은 세우고 쌓는 게 아니다. 정도전이 한양을 세웠고 채제공은 수원화성을 만들었다. 이들은 최고의 인문학자였다. 인간과 땅과 하늘의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설계를 했는데 그게 정말 아름답다. 한양의 도성 설계나 경복궁 배치를 보고 세계가 놀랐다. 외국 건축가들이 종묘에 와보면 자지러진다. 새로운 콘셉트의 건축, 건축가를 서양으로 전파해야 한다.”

    그를 강하게 키운 어머니 김원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군정 때 외무부 부산출장소장이 된 부친이 6·25전쟁 때 돌아가셨다. 그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나는 오남매 중 넷째다. 위로 누나 셋이 있다. 공부도 잘했고 그림도 잘 그렸지만 병약한 게 흠이었다. 편식을 했고 늘 미열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사람으로 만들려고 극약처방을 하셨다. 경기중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당시엔 부산서 경기중학교를 가는 건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13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울며불며 매달리는 나만 남겨놓고 내려갔다. 어머니가 나를 버렸다는 배신감에 집에 가면 누나들이 안아줄 것 같은 그리운 마음에 밤새 울었다. 그러나 어쨌든 경기중학교에 들어갔다. 수성이나 덕수 같은 곳에서 50명 이상씩 보낼 땐데 부산 촌놈 하나가 됐다. 게다가 동기들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렇지만 그게 나를 강하게 했다. 하숙집에선 밥시간에 경쟁이 치열했다. 동물적 생존본능이 작동했고 그게 나를 건강하게 만들었다. 밥도 잘 먹고. 그렇게 만들려고 어머니는 나를 밀어냈다. 나중에 어머니가 내려가는 동안 내내 우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오남매를 키우셨다.”

    인생을 바꿔놓은 중학교 과외활동 김 대표는 중학교 때 과외활동이 인생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중학교 가니 선생님들이 “너희들은 건방지다”는 얘기를 귀가 닳도록 했다. 좋은 머리 잘못 쓰면 안 된다는 거였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선 과외활동을 강조했고, 문예와 체육 두 가지를 반드시 하라고 했다. 문예에선 내가 잘하는 미술반에 들었고 체육부는 희한하게도 산악반을 택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도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게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중고교 때는 산에 자주 다녀서 집에서 걱정할 정도였다. 친구들도 죽고….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게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 보는 눈을 기르는 시간이었다.”

    특히 중고교 내내 빠져들었던 등반은 그가 시운을 만나는 연결고리가 됐다고 했다. “경기중학에선 가까운 인왕산에서 록클라이밍 교육을 받았다. 거기 가면 슬랩이나 침니, 크랙, 오버행 등 바위기술을 다 할 수 있었다. 인왕산서 기술을 습득한 뒤 원정한다며 한라산 적설기 등반도 했다. 금강산이나 백두산 가는 게 꿈이라서 금강산 줄기인 설악산에도 갔다. 설악산은 포탄과 지뢰 사체를 제거하느라 막았다가 1955년에야 입산금지를 해제해 신나게 갔다. 거기서 심마니들을 많이 만났다. 한동안 출입을 막다보니 산삼이 많다고 해서 전국 심마니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달무리 지면 비가 온다, 어떤 나뭇잎을 씹으면 목이 마르지 않다, 어떤 버섯은 먹으면 안 된다’ 등등. 우리는 가지고 간 쌀과 통조림이 남으면 다 주고 왔다. 가볍게 움직여야 했기에 모든 걸 현지에서 조달하던 그들은 아주 좋아했다. 혈처를 아는 그들이 가르쳐 준 곳에서 자면 따뜻하고 개운했다. 그들이 치지 말라는 곳에 텐트를 치고 자면 온몸이 찌뿌듯했다. 그런 경험이 나중에 풍수를 연구하는 계기가 됐다.”

    풍수 연구로 이진희 장관과 인연 대학 졸업 후 김원은 김수근 건축연구소에서 일을 배웠다. 초기엔 누구도 일을 시키지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그는 매일 (선배들을 위해) 수십 자루의 연필을 깎아놓고 외국 서적을 파고들었다.

    그런 그에게 김수근은 몬트리올 엑스포 한국관 설계 업무를 맡겼다. 첫 작품서 인정을 받은 김원은 여의도 종합개발계획에 참여하고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 설계를 맡는 등 김수근 사무소의 잘나가는(?) 건축가로 성장했다. 그런데 김원은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사표를 던졌다. 한동안 반추의 기간을 보낸 뒤 설계사무실을 차려 독립했다.

    “사무실을 차렸지만 월급 줄 만큼 벌지를 못했다. 그래서 후배 대학원생들에게 사무실에 와서 놀라고 했다. 그 아이들이 무슨 논문을 쓰면 좋으냐고 묻기에 풍수를 해보자고 했다. 건축의 첫걸음은 좋은 집터를 잡는 것이다. 나쁜 집터엔 아무리 집을 잘 지어도 행복하지 않다. 예전엔 어느 집에나 지가서(地家書)란 게 있었는데 거기에 그런 게 다 나온다. 매주 수요일에 저녁 사주며 풍수를 연구했고 자연히 내가 회장이 됐다. 거기서 논문이 여러 편 나왔다. 다 산악반 활동을 한 덕이다.”

    풍수는 그에게 새로운 운명을 만나게 했다.

    “정부가 미신이라고 할 때였는데 풍수 연구하는 모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KBS에서 연락이 왔다. 이 시대에 누가 미신을 믿느냐는 거였다. 그런데 나가서 얘기하니 반응이 뜨거웠다. 도포 입은 사람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젊은이가 풍수도 과학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게 그를 고위 공무원과 연결해줬다.

    “당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정통성을 꿰맞추려고 국풍운동을 일으켰다. 마침 일본이 교과서를 왜곡해 항일 극일운동이 들끓었다. 이때 만난 사람 중 한 사람이 독립기념관을 짓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극일 분위기에 5공을 넣자는 거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기발한 아이디어라며 빨리 지으라며 두 가지 지시를 했다. 국민모금으로 500억원을 모으고 서울과 대전 사이에 100만평 부지를 찾아 거기에 지으라는 거였다. 이진희 공보부 장관이 이 일을 맡았다. 조선, 동아가 경쟁적으로 모금에 나섰다. 두 신문이 민족지 경쟁을 할 때라서 두 달도 안 돼 500억원 모금이 끝났다. 그때까지 땅을 구하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이진희 장관이 나를 불렀다. 이 장관이 육군에 얘기해 헬기를 타고 다녔다. 이곳저곳 다니다 흑성산을 찾았다. 완벽한 남향에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했고 물길이 휘돌아갔다.”

    이 장관이 대통령에게 터를 찾았다고 보고했고 대통령은 바로 가자며 나섰다고 했다.

    “당시 안춘생 씨가 추진위원장이었다. 청와대 마당에서 헬기가 뜨기로 했고, 그런데 대통령이 안춘생 씨에게 깍듯이 거수경례를 하는 게 아닌가. 전 대통령이 생도 시절 그가 육사 교장이었다. 거기서 전 대통령의 다른 모습을 봤다. 전 대통령은 정보통이라 흑성산 정상에 미군 헬기장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흑성산 정상에 내렸는데 이 장관이 갑자기 나에게 설명을 지시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은 낯모르는 민간인으로부터 보고를 받았으니 기가 막혔을 거였다. 거기서 남쪽을 보면 산들이 겹겹이 보이는데 안산(案山)이 조배하는 격이라고 했더니 대통령은 ‘설명은 잘하네…’라고 했다. 그러더니 이 장관에게 ‘조경만 잘하면 되겠다’ 정도로 흘리라고 했다. 전 대통령은 선무공작 전문가였다. 언론 반응을 보라는 거였다. 그것도 김원이 주장한 걸로 해서. 다 된 거였다. 서울로 돌아와 장관이 사는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니 기자 20여 명이 집안의 술이란 술은 다 꺼내 마시며 버티고 있었다. 김원 건축가가 풍수적으로 좋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얘기를 들으려 몰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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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이권을 포기하다 모든 언론이 긍정적으로 보도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문공부는 물론이고 청와대에서도 인정한 건축가가 된 것이다. “이진희 장관이 나에게 설계까지 다 하라고 했다. 사실 나는 그때 고생을 많이 했다. 직원 월급도 제대로 못 주고 처가에서 돈 얻어 쓸 때였다. 그런데 나이 40세에 이게 얼마나 영광인가. 대통령과 장관이 다 인정했으니…. 그런데 거기서 들뜨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들에게 물었더니 의견이 갈렸다. 인생에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으니 좌고우면 마라거나, 정치 프로젝트는 아무리 잘해도 50%는 질시한다며 하지 마라는 거였다.”

    김 대표는 거기서 돈을 포기했다.

    “곰곰이 생각하다 이 장관에게 공명정대한 현상공모로 진행할 테니 맡겨 달라고 했다. 당시 현상공모는 거의 짜고 치는 거였다. ‘당선자 없음’이라고 해놓고 수의계약으로 넘겨주기 일쑤였다. 그걸 모범적으로 바꾸는 선례를 보이겠다고 했다.”

    장관은 거대한 이권을 거부한 김원을 믿게 됐고 이후 여러 일을 맡겼다.

    “이 장관은 프랑스 문화부장관이던 자크 랑의 5개 그랑프로제를 참고해 올림픽을 앞두고 문화시설을 확충한다는 다섯 가지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독립기념관과 중앙청 국립박물관, 과천 현대미술관, 예술의전당, 국립국악당 등이다. 당시는 그게 가능했다. 극장 입장료에 붙는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이들 프로젝트에 자문위원이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그를 ‘5공 건축가’라고 부르지만 그는 “나라를 망치지는 않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일할 때는 사무실에도 가지 못해 직원들 얼굴조차 잊을 정도였다. 직원들은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일 배우러 왔는데 대표가 없으니 불만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내 방에 오더니 ‘5공 정당화’하는 독립기념관 사업서 손을 떼라고 했다. 그를 앉혀놓고 ‘내가 안 하더라도 누군가는 한다. 나는 적어도 잘못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니 지켜보라’고 했다.”

    당시 5공 정부는 독립기념관 메모리얼홀 뒤에 6개의 전시관을 짓고 다섯 개 전시관엔 독립 관련 전시를 하고 마지막 관은 5공 홍보관으로 꾸밀 구상을 하고 있었다. 김 대표는 테헤란 팔레비왕 기념관의 사례를 들면서 그것은 아니라고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독립기념관은 이미지를 지키게 됐다.

    환경 지킴이로 변신 풍수를 인연으로 도약한 그는 친환경 건축가를 거쳐 환경운동가 대열에 끼게 됐다.

    “김수근과 김중업은 ‘건축은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건축을 잘 몰랐을 때 그런 주장은 사회의 이해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나 역시 미술반을 했기에 처음엔 건축은 예술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오래 걸렸다.”

    그는 굿 디자인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자연에 거스르는 건축은 좋지 않다. 친환경으로 사람을 건강하게 하는 게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건축가의 직무다.”

    풍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주변의 모든 개발행위는 과잉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정부 시책에 반대하다보니 어느 새 환경운동가처럼 됐다.

    “내가 이상한 놈, 삐딱한 놈이 됐단 걸 처음 의식한 게 동강댐에 반대했을 때다. 영월 일대에 수해가 나자 정부는 높이 100m, 길이 400m의 댐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렇게 막으면 그 일대는 다 물바다가 돼버린다. 춘천은 연중기온이 내려가기까지 한다. 그걸 알기에 반대운동에 나섰다. 특히 설악산을 좋아하기에 더욱 반대했다.”

    여기서 그는 환경운동의 새 이정표를 찍었다.

    “당시 김진선 지사는 환경운동가라면 누구도 안 만나더니 김원이 간다니까 만나줬다. 아마 나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거기서 동강위원회에 참여하는 조건을 걸었다. 첫째, 민관 동수의 위원으로 조사하고, 둘째, 예산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조사하며, 셋째, 조사단의 결론이 최종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그걸 받아들여 조사단에 참여했고 역사상 처음으로 조사단이 국책사업에 ‘불가’ 결정을 내렸는데, 그걸 대통령이 받아들여 백지화했다. 그때 건설부 추천 교수들을 설득해 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김원의 작품들 김원 건축가는 A4지 10여 페이지를 꽉 채울 만큼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무엇인지 물었다. 하나하나 고생한 것이기에 모두 애정이 가지만 그렇다고 아주 뛰어난 것은 없다고 했다. 시간 독촉하며 돈 깎는 오피스빌딩은 대부분 하다가 그만뒀고, 작품 대부분이 돈 적게 받는 종교시설이나 교육· 문화시설이라고 했다. “특히 종교 시설을 많이 했다. 김수환 추기경 계실 때 불러서 가면 ‘야, 돈 없다, 네가 해라’며 맡기신 게 많다. 순교자 기념시설도 많이 했는데 그중 공주 황새바위 순교지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10명이 겨우 들어가는 작은 경당인데 거기 온 사람들이 많은 것을 느끼고 간다고 한다.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사실 그곳은 사형장 자리다. 사형장에서 감동을 강요하는 건 잘못이다. 그들의 느낌을 최대한 허용하려면 내 주장을 낮춰야 했다.”

    광장 홈페이지를 보면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 정경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올해가 미당 100주년이다. 미당기념사업회 이사장도 맡고 있다. 친일을 했다지만 시가 매우 좋아 사람들이 미당을 무시하지 못한다. 건축가가 시인을 추모하는 사업회의 이사장이 됐는데 제자나 추종자들 모두 당연하다고 한다. 문학관 지을 생각을 하게 한 게 미당(未堂)이란 호였다. ‘모자란 집, 덜된 집’이란 뜻이다. 덜된 집을 내가 완성하겠다며 달려갔다. 미당 생전에 기념사업회를 맡게 돼 찾아가니 미당이 화를 벌컥 내며 쫓아내기까지 했다. 기념관 만들면 육필원고니 지팡이 같은 걸 얻어다 전시해야 하는데 그걸 보고 또 친일이라며 손가락질 할 게 싫었던 것 같다.”

    문학관 설계를 맡은 것은 은사와의 인연 때문이라고 했다. “우연찮게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 고창군수가 됐다. 그분은 훌륭한 문화군수로 고창읍성을 개발하고 판소리 신재효 기념관도 지었다. 미당 생가도 문화상품으로 띄우겠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전화를 받고 내려가겠다니 돈 없다며 밑에 직원이나 보내라고 했다. 그래도 제가 가야 한다며 내려갔다. 예산은 설계비와 건설비를 합해 4억원 뿐이었다. 그런데 건축가가 돈 없다고 안 할 수는 없지 않겠나. 마침 군수가 폐교를 잡아놨기에 폐교 건물을 활용키로 했다. 긴 학교 건물 가운데에 전망대 하나 세운 게 미당 시문학관이다.”

    아이디어는 미당의 시에서 얻었다고 했다. “미당은 <자화상>이란 시에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썼다. 학교 앞 바다에서 불어오는 그 바람을 제대로 맞게 전망대를 세웠다. 그 전망대에 올라 시인이 느꼈던 바람을 느끼고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학교 뒤 질마재도 바라보게 하자는 거였다. 그해 국화 축제에 이어령 선생께서 오셨다. 선생은 내 고교 국어선생이시기도 하다. 선생께서 ‘김원이 생각한 거구만’하시며 ‘바람의 전망대’라고 명명했다. 정말 돈 안 들이고 지었지만 마을에 잘 어울리는 건물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김 대표는 수많은 종교시설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헐린 한강성당에 애착을 가졌다.

    “종교시설로는 첫 작품이다. 진짜 돈이 없어 폐공장의 벽돌을 날라다 지었는데 거기서 미사를 하면 신부나 신자들 모두가 매우 좋았다고 했다.”

    문화시설 가운데 대표작은 ‘국립국악당’일 것이다. “이 장관이 독립기념관 때 고생했다며 수의계약으로 맡겼다. 민족문화의 결정체로서 접근했다. 우리 음악인 ‘국악’은 서양 음악과는 다르다. 조선에선 음악을 예로 가르쳤다. 종묘제례악은 예의를 가르치는 음악이다. 국악당에 몰아넣고 시작하면 박수 치는 그런 음악이 아니다. 거기서 국악합주곡인 수제천이나 농악, 해금산조 등도 모두 다뤄야 했다. 그래서 예술의 전당 마스터 플랜을 세우면서 가람을 배치하듯 국악당을 제일 위에 배치했다.”

    김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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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대표의 명함엔 ‘金 洹’ 이란 이름자가 크게 인쇄돼 있다. 그 밑엔 孤雲 崔致遠 雙溪寺碑 集字(고운 최치원 쌍계사비 집자)라고 적혀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인 쌍계사비에서 탁본했다. 거기에 내 이름자가 있어서 그걸로 썼다.”

    그의 이름 원(洹) 자는 흔치 않은 글자다. “중고교 6년 동안 한문 선생님 한 분만이 이름자를 알아봤다”고 한다. 그 희귀한 글자를 쌍계사 진감선사비에서 찾아 명함에 넣은 그의 안목이 대단했다. 김 대표는 이 대목에서 진감선사비 관련 사연 하나를 들려줬다.

    “어느 날 쌍계사에 갔더니 진감선사비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었다. 1500년 된 최치원의 명필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비석이다. 워낙 명필이라 날카로운 획을 살리려고 벼룻돌 같은 수성암에 새겼는데 최근 10여 년간 산성비에 마구잡이로 삭아내려 밖의 석 줄이 안 보이는 걸 발견했다. 주지스님 찾아가 비각 세우거나 실내로 옮겨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문화재이니 정부가 해야 한다고 했다. 복원하는 데 3억원이 든다고 했다. 그래서 문광부에 얘기했더니 ‘그 절이 얼마나 돈이 많은데 그러느냐, 우리는 못 한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명함 건넬 때마다 부탁해 모금한 돈을 건네줬다.”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나와 김수근 건축연구소에서 수업했고(6년) 네덜란드 바우센트룸 국제대학원 과정을 수료했다. 1976년 건축환경연구소 광장과 도서출판 광장을 설립해 건축과 출판 작업을 동시에 해 왔다. 한강성당(1979), 쌩폴수도원(1982), 국립국악원(1984), 주한 러시아대사관(2002) 등 종교, 문화, 교육, 비즈니스 시설은 물론이고 다양한 단독주택도 설계했다. 건축가로는 드물게 인테리어에도 많은 족적을 남겼다. 한국 건축가협회 명예이사, 한국 실내건축가협회 명예회장, 김수근 문화재단 이사장 및 부설 서울건축학교 운영위원장, 건국대 건축대학원 겸임교수로 있다.

    평론집 <빛과 그리고 그림자>, <한국현대건축의 이해>, <우리시대의 거울>, 수상집 <건축은 예술인가>,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새 세기의 환경 이야기>, <우리시대의 건축 이야기> 등을 냈고 <건축예찬>, <마천루>, <건축가 없는 건축> 등을 번역해 소개했다. 사라지는 고건축물을 기록으로라도 남기자며 사진가 임응식 씨와 함께 <한국의 고건축>이란 책도 냈다.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5호(2015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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