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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아홉 청년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 떠난 자리로 돌아오는 게 등반의 완성이요 살아오는 게 등반의 미덕이다
입력 : 2015.04.02 16: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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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교재조차 제대로 없던 나라에서 피땀 흘려 갈고 닦은 기술로 세계적 등반 강국이 됐음을 선언한 것이다.
“내가 배울 때인 1960~1970년대엔 등반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없었다. 등반을 뭐 하러 돈 내고 배우냐고 할 때였다. 선배들은 실전에서 익힌 것만을 강조했다. 선배가 흰 콩을 검다고 하면 검은 거였다. 그런 데서 독학하며 배웠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교장은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산 인수봉의 궁형길과 동양길, 노적봉의 형제길 등을 개척할 만큼 뛰어난 기량을 가졌다. 중국과 수교 전 백두산 장백폭포를 올라 교포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산에만 다니면 발전이 없다. 끊임없이 책을 읽고 연구해야 한다.”
그렇게 산에서 기량을 연마하고 외국 서적을 번역하며 지식까지 쌓은 그는 한국산악회 학술편집위원과 강사를 하다가 1985년 코오롱등산학교가 문을 열면서 대표강사로 합류했고 1997년부터 교장으로 이 학교를 이끌어 왔다.
“올해가 개교 30주년이다. 1985년 6월 5일 개교했는데 그날이 내 생일이라서 결혼기념일과 개교기념일만큼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동안 교육시켜 내보낸 인원이 1만8005명이다.”
그는 단지 알고 있는 기술과 지식을 후배들에게 전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가리킨 벽엔 ‘敎學相長(교학상장)’이란 글귀가 걸려 있었다.
“나는 강사들에게 항상 알량한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고 끝내선 안 되고 학생과 강사가 소통하며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0년사의 제목도 교학상장이다.”
말로 강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런 노력을 쉬지 않고 점검해왔다.
“강사의 자질 향상을 위해 워크숍을 하고 매년 과제발표를 한다. 거기서 제대로 못하면 탈락한다. 단순히 기술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론적 바탕이 확립돼야 한다. 실기만 할 줄 안다면 ‘장이’에 불과하다.”
졸업생들이 최종학력 란에 ‘등산학교 졸업’이라고 적을 만큼 명실상부한 전문 등산교육기관으로 학교를 이끌었다는 얘기다. 그렇게 전 강사진이 향상시킨 기량과 지식이 한국을 등산 강국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등반 기술 못지않게 지식 강조 그에게 코오롱등산학교의 강점을 물었다.
“우리 학교는 6개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완전 초보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초반부터 정규반, 암벽반, 동계빙벽반, 동계설상반, 해외고산반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토털 알피니즘을 추구하며 전인적 산악인을 만드는 정규반이 가장 강점을 가진 과정이다. 여기선 등산기술에다 등산문화를 접목시켜 이론과 실기를 균형 있게 가르친다. 등산문학이나 알피니즘, 역사, 세계 등반사 등 인문 강좌도 있는데 특히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한다. 북리뷰를 통해 산악인들의 교양수준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강점은 조별 분임교육이다. 우리는 강사 1명당 학생 4명 비율로 조를 편성해 강사들의 체험을 직접 습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특히 졸업생과 재학생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줘 계속 등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강점이다.”
그는 특히 책 읽기가 중요하다고 했다.
“등산서적을 읽으면 남의 경험을 추체험하게 된다. 그것을 소화시켜야 성장할 수 있다. 책 읽기와 산악문학을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다. 등산서적은 전 세계적으로 1만종이 넘는다. 대단하다. 게다가 소설 이상으로 감흥이 크다. 산 사람들의 우정과 사랑,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등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며 책 읽기를 재차 강조했다. 그가 <등산교실>을 비롯한 등산서적을 4권이나 낸 것도 그래서다. “북한산의 역사를 알고 북한산에 가면 감흥이 남다르고 들어오는 게 다르다. 알프스도 마찬가지다. 1786년 발마와 빠가르가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을 오르면서 근대등반이 시작됐다. 이후 등반가들이 3000~4000m급 미등정봉을 차례로 올랐으나 알프스에서 가장 멋진 마테호른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1865년 에드워드 윔퍼가 7전8기 끝에 마테호른을 등정해 근대등반의 황금기를 마치게 된다. 그런데 윔퍼와 함께 정상에 올랐던 4명이 하산 길에 로프가 끊어지면서 추락했다. 체르마트 산악박물관에 가면 당시 끊어진 로프가 전시돼 있다. 그런 역사를 알고 가면 더 많이 보이고 더 많이 알 수 있다.”
“등산을 하다 보면 예기치 않게 조난이나 재난에 직면할 수도 있다. 8월엔 낙뢰도 많이 일어나는데 특히 적란운(뇌운)이 몰려 있으면 위험이 크다. 1969년 2월엔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대형 눈사태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눈이 쌓였을 때 진동음 같은 충격파가 가해지면 눈사태가 발생한다. 제트기가 음속을 돌파할 때 충격파가 생겨 눈사태를 일으키기도 한다. 눈사태는 해마다 같은 곳에서 일어나므로 처음 가는 경우라면 원주민에게 어느 곳이 위험한지 정보를 알고 가는 것도 필요하다.”
등산학교에선 등산기술뿐 아니라 낙뢰나 낙석, 눈사태를 피하고 태풍이나 폭우를 만났을 때 체온보존법 같은 생존기술도 가르친다고 했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려내는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법, 골절환자 처치법도 물론 교육한다. 그래서인지 학생층도 다양하다고 했다.
“개교 때는 20~30대가 주류였는데 지금은 40대 이상이 많고 70대도 들어온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경제적 기반을 닦은 사람들이 산을 배우러 온다. 요즘엔 여자도 많다. 주부가 30%를 차지한다. 부인이 건강해야 가정이 화목하다며 남편들이 적극 지원하고 졸업식 때 꽃을 들고 오기도 한다. 어느 종합병원 원장은 제대한 아들을 끌고 왔다. 군대까지 갔다 왔는데 나약하다는 거였다. 그의 아들은 교육을 마치고 나서 ‘평생 좋은 경험을 했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젊은이 도전정신 약화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젊은이들이 줄어드는 것은 안타깝다고 했다.
“일본의 경우 1970년대엔 세계적 등산 강국이었으나 이후 힘들고 어려운 모험을 하지 않아 위축됐다. 한국은 어찌됐든 세계적 등산 강국이 됐는데 요즘 등반을 배우는 젊은이들이 상당히 줄어든 것 같다. 먹고 살기 바빠서 산을 모르기도 하지만 3D 현상도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예전엔 고교나 대학 산악부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런데 지금은 산악부 입부하고 하계훈련 끝나면 거의 탈퇴한다고 한다. 산악부가 쇠퇴하다보니 아예 부를 폐쇄한 대학도 있다.”
그는 젊은이들의 약해진 도전정신이나 개척정신이 경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
“요즘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 회장이나 현대그룹을 세운 정주영 회장 같은 도전적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안전을 이유로 무조건 통제만 하려는 정책은 재고해야 한다고 했다.
“알프스에선 1년에 300명 이상 사망한다고 한다. 그래도 알프스 인근 어느 나라도 등산을 규제하지 않는다.”
산에서 건강을 다지며 도전정신과 진취적 기상을 배양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졸업했을 때는 변변한 기업이 없어 사시가 최고의 입신출세 길이라는 생각으로 매달렸지만 일곱 번이나 낙방했다. 지겹기도 하고 좌절감마저 들 때 도성암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산에나 가자고 해서 노적봉을 오르게 됐다. 어깨너머로 바위를 배운 친구였는데 그보다 내가 더 잘 올라갔다. 첫 경험은 황홀했다.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한강은 환상적이었다. 대단한 성취감과 해방감을 느꼈다. 숨어 있는 천재적 자질을 발견했고 이게 내가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시를 접은 그는 체신공무원을 거쳐 한국통신(현 KT) 창설멤버로 30년을 봉직했다. 그런 안정 속에 그는 중독이라도 된 듯 바위에 빠져들었다.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등반을 했다. 원래는 신당동에 살았는데 산이 너무 좋아 1970년에 이곳으로 이사 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아침에 북한산을 등지고 출근하고 북한산을 보며 퇴근하니 얼마나 좋은가.”
그는 에세이집 서문에 “치기 어린 젊은 시절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바위뿐이었고, 어리석게도 바위를 오르는 것만이 알피니즘의 진정성이라고 착각했다”고 적었을 정도다. 그러나 인수봉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며 한창 바위에 재미를 붙일 무렵 비극적 사고가 발생했다.
“1973년에 막내가 도봉산 선인봉에서 떨어졌다. 대학산악부에서 리더까지 했을 정도로 출중한 아이였는데 사월 초파일에 선인봉을 단독 등반하다 사고를 당했다. 단독 등반은 살아날 확률을 포기하는 것인데….”
바위가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사고 뒤엔 집에서 배낭 메고 나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 그를 다시 산으로 이끈 이는 그의 어머니였다.
“안달하는 걸 눈치 챈 어머니는 ‘사람은 하고 싶은 것 하며 살아야 한다’며 배낭을 챙겨서 현관에 내놓으셨다. 대단한 분이셨다. 그 때문에 고부갈등도 심했다.”
신식교육을 받은 그의 어머니가 오늘날의 산악인 이용대를 만든 셈이다. 그런데 그 역시 큰 사고를 당했다. 1975년의 일이다.
“빗물에 젖은 인수봉 슬랩에서 확보용 피톤을 1m가량 남겨놓고 수십 미터를 굴러떨어졌다. 마지막 순간 바위를 밀쳐내며 방어동작을 취해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두 달 가량을 병상에서 지내야 했다. 사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걸 극복하려면 산에 대한 도전의지와 집념이 필요하다.”
그는 금속 보디캐스트를 차고 빙벽을 마주할 정도의 강한 의지로 다시 등반의 길로 돌아왔다.
“등반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상을 버리지 않는 게 산악인이다.”
이용대 교장 팔순을 지척에 둔 지금도 선등을 서고 있는 만년 청년이다. 1985년부터 대표강사로, 1997년 이후 교장으로 코오롱등산학교를 이끌어왔는데 특히 전인적 등산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특임교수, 한국산악회 자문위원 겸 종신회원, 한국산서회 창립 멤버이자 고문. 한국 암벽의 고전적 코스로 꼽히는 북한산 인수봉의 동양길과 궁형길, 설악산 장군봉의 남서면 등을 개척했다. 요세미티와 마운트 쿡, 알프스의 몽블랑과 마테호른, 이탈리아 돌로미테 산군의 트레치메 및 셀라 타워 등을 올랐으며,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드리피카와 네이저 피크 등을 등반했다. 여러 언론에 수많은 등산 칼럼을 연재했고 11쇄까지 찍은 <등산교실>을 비롯해 <그곳에 산이 있었다>, <등산상식사전>,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 등을 저술했다. 공저로 <한국산악회 50년사>, <등산>, <즐거운 암릉길> 등이 있다. 이용대 교장이 말하는 등산의 본질 수많은 위험을 만났지만 이용대 교장은 고봉을 오르는 등정주의가 아니라 어려운 길을 오르는 등로주의를 신봉한다.
“네팔 가면 상업등반 에이전트가 100개가 넘는다. 그들이 고봉을 오르려는 사람들을 끌고 정상으로 간다. 5월엔 하루 200명씩 에베레스트에 오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정상 직전 힐러리 스텝엔 정체현상까지 벌어진다고 한다. 1억원 내면 셀파들이 산소며 식량이며 다 날라주고 정상까지 끌고 가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것보다는 어떤 태도로 가느냐가 중요하다. 21세기 등산의 화두는 앨티튜드(Altitude; 높이)가 아니라 애티튜드(attitude; 태도)를 추구하는 것이다. 1953년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를 오른 뒤엔 높이 추구는 의미가 없게 됐다.”
그러면서 철학적 의미에서 등산의 본질을 설명했다.
“등산의 본질은 우선 편의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백운대를 가다보면 편하게 가라고 철계단 놓고 나무 데크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 계단을 거부하고 길이 나지 않는 곳으로 가는 게 등산이다. 곤란성을 추구하는 게 등산의 본질이다. 또 불확실성을 추구하는 것도 등산의 본질이다. 새로운 루트를 뚫고 창의적으로 가는 게 등산이다. 거기에 덧붙여 공정한 방법으로 올라가는 게 등산이다. 장비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산의 높이를 낮추는 게 된다. 8000m급 고봉도 산소를 쓰면 6000m급이나 마찬가지다.”
알피니즘은 무상의 행위 그는 특히 알피니즘은 대가나 순위를 따지는 스포츠와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과거 동양에선 산을 수양의 장소로 삼았고, 서양에선 도전의 대상으로 여겼다. 서양에서 근대 알피니즘이 시작된 것도 그래서다. 18세기 초까지만 해도 알프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신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인본주의가 확산될 때 소쉬르가 악령을 부정하고 알프스를 오르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고 내걸었다. 1786년 몽블랑 등정에 성공하면서 신의 세계라던 알프스가 인간의 세계로 들어왔다. 거기서 근대등반이 시작됐고 알피니즘이란 용어가 생겼다. 스포츠에서 이즘(-ism)이 붙은 것은 등산이 유일하다.”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인간성을 찾고 그것을 확대하는 것이란 얘기다. 그런 점에서 알피니즘은 경쟁하는 게 아니고 보상받는 행위도 아니라고 했다.
“스포츠 클라이밍은 승부의 세계다. 관중이 있고 상금이 있고 순위가 있고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알피니즘은 보상이 없는 무상의 행위다. 관중이나 심판이 없는 자유로운 세계다.”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온 때문인지 그는 후배들에게 어려운 루트를 오르고 정상에 서는 게 등반의 끝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죽고 다치는 것은 완성한 게 아니다. 떠난 자리로 돌아오는 게 등반의 완성이요, 살아오는 게 등반의 미덕이다.”
이용대의 등산복 단상 과거엔 등산복이 없어서 미군 군복을 물들이고 개조해 입었다. 전투화를 잘라서 신으면 그게 최고였다. 거기에 군용 요대와 수통을 차고 다녔다.
그래도 도전의식이나 성취감이 커서 더 없이 행복했다.
요즘은 온통 화려하게 입고들 다닌다. 산이 패션무대가 됐다.
옷이 주는 기능도 제대로 모르면서 수백만원짜리 고산 등반용 옷을 입고 둘레길이나 약수터에 다니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강남 사람들 많이 가는 청계산에선 싼 옷이 오히려 안 팔린다고 할 정도다. 그러다보니 한국 아웃도어 시장은 7조원대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보다 훨씬 큰 미국 시장이 7조원이고, 프랑스나 이탈리아, 독일 등 세계적 산악 국가들이 즐비한 유럽 시장도 7조원이라고 한다.
단일 시장으론 우리가 세계 최대다. 그렇지만 그렇게 차려입고 가서 무얼 배우는지 궁금하다.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5호(2015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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