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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련 송원그룹 회장 | “아버지가 일궈놓은 한국 1위 분야 글로벌 최고사업으로 키우겠습니다”
입력 : 2014.06.27 11: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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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열흘 후 송원그룹 회장실에서 만난 김 회장은, 바빴다. 시간을 쪼개듯 책상 위에 펼쳐놓은 커다란 다이어리엔 하루 스케줄이 빽빽했다. 김 회장은 “마지막 64일 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며 “보살펴 드린 유일한 시간이었다”고 아버지를 추억했다. 30년 전 미국 유학 후 한국에서 구입했다는 책상 한편엔 그녀가 아버지를 추억하며 직접 집필한 회고록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 놓여 있었다.
기업의 가장 큰 뿌리는 정신, 그걸 공유하고 싶다 회고록에서 아버지를 추억하며 점심은 4000원짜리 백반에 해외여행 한번 안 나가셨다고 돼 있던데요. 언뜻 일반적인 그룹 회장님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것 같습니다. 아, 100% 사실대로 썼어요. 아버지가 정말 그랬다는 걸 아무도 안 믿더군요. (책상 위에서 있던 식권을 내보이며) 저도 4000원짜리 백반 먹습니다.(웃음) <마켓3.0>을 쓴 필립 코틀러가 영혼이 있는 기업이 생존할 수 있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30년 전부터 그런 말씀을 실천하셨어요. 말뿐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창업했고 행동이 일치하셨지요. 그게 우리 송원그룹의 핵심역량이기도 합니다. 역시 기업문화는 리더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군요. 저 또한 창업의 경험이 있는데, 기업문화를 만드는 게 정말 어렵더군요. 그건 정말 창업자의 생각과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죠. 송원그룹 신입사원 면접에 나서면 우리 기업문화와 맞는 이들이 하나둘 눈에 보입니다. 인연이 있는지 그런 분들이 합격하더군요.(웃음)
아버지의 회고록을 딸이 쓴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인데요. 기업의 가장 중요한 뿌리는 정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통해 송원그룹과 관계하는 모든 분들과 그 정신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다면 필요 없었겠지만…. 저 또한 되돌아보고 싶었어요. 20년 간 같은 점퍼를 입고,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일하면서 나라 걱정에 잠 못 자고…. 토요일엔 꼭 공장을 돌아보느라 여행다운 여행 한번 못하고 사셨어요. 아버지만큼 그렇게 살 순 없겠지만 열심히 아버지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회장실로 출근한 지 열흘이 지났습니다. 어떠십니까. 달라진 건 없네요. 4일 장을 끝내고 바로 출근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미뤘던 일들을 진행했거든요. 12년 전부터 송원그룹의 주요회의에 참석했고 2년 전부터 총괄부회장으로 지냈기 때문에 전혀 생경한 건 없습니다. 생전에 아버지께서 늘 세상 사는 이야기부터 의사결정 내리는 법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셨어요. 제가 외동딸이라 부녀간에 대화가 많았지요. 그 덕에 제게 남겨진 가장 소중한 유산은 아버지께서 일러주신 확고한 가치관입니다.
요즘 종종 회자되는 밥상머리 교육인가요. 아, 비슷하네요.(웃음) 가치관이 확고하니 제 사업을 할 때도 주변사람에 대한 예의, 남을 더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혼내셨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구분이 명확했습니다. 스스로 자존심이나 자존감을 무너뜨리면서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을 좇지 않으니 사는 게 심플해지더군요.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사실 김해련 회장은 송원그룹 창업주의 외동딸이기 이전에 이미 IT와 패션업계에서 인정받은 사업가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이화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뉴욕 페이스대학 경영학 석사(MBA)를 마친 그녀는 패션 분야가 흥미로웠다. 김 회장은 뉴욕 F.I.T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후 1989년 29살의 나이에 여성복 브랜드 ‘아드리안느’를 창업했다. 당시 이 브랜드는 롯데, 신세계, 현대백화점 15개 매장에서 1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1999년 ‘에이다임’을 설립해 오픈한 패션전문 쇼핑몰 ‘패션플러스’는 국내 의류 시장의 첫 인터넷 쇼핑몰이었다. 첫 달 매출은 고작 800만원이었지만 매년 200% 이상 매출이 상승하며 월 매출 25억 원의 쇼핑몰로 성장시켰다. 당시 인수했던 ‘인터플래닝’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등 250여 개 회원사에 전문적인 컨설팅을 진행했다. 마켓 트렌드를 예측하고 제안하는 게 주업무였다. 이후 토종 패스트 패션 브랜드 ‘스파이시 칼라’를 론칭한 김 회장은 2012년 에이다임을 매각한 후 송원그룹에 합류했다.
도움이 전혀 없었다면? 제 주변분들도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으니…. 최근에 알게 되곤 왜 속였느냐고 묻더군요. 물어보지 않으니 말하지 않은 것뿐인데, 아무리 친해도 아버지가 뭐하시냐고 묻진 않잖아요.(웃음)
그 시절 사업가로서의 포부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은 아버지 사업을 하고 싶기도 했고, 아버지가 창업하신 모든 걸 할 수 있을 거란 자만심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있었죠. 그때가 인터넷 기업을 상장하면서 큰돈을 벌 때였는데, 저 역시 빨리 상장해서 아버지 기업을 사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송원그룹의 신규 사업 분야에 패션과 IT 분야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요. 패션플러스는 이미 매각했고, 컨설팅회사는 계속 운영 중입니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인 ‘스파이시 칼라’는 단독 매장 중심으로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합니다.
2020년 그룹 비전에는 7개의 제품을 세계 최고 키우겠다는 계획이 포함돼 있습니다. 분야가 굉장히 다양한데요.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게 쉽지만은 않겠습니다. 사실은 처음엔 저도 잘 몰랐어요.(웃음) 7개 분야 선정은 제가 직접 했습니다. 세계 최고 상품은 우선 국내 최고가 돼야 하는데, 우리 그룹의 7개 제품은 이미 국내 최고 수준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는 핵심 역량이죠.
일상에선 남영전구의 LED 조명이 인지도가 높은데요. 남영전구는 역사가 53년이나 된 우리나라 최초의 전구회사예요. 부도 위기에 있던 거래처를 아버지께서 인수하셨죠. 지금은 자동차 할로겐 전조등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완성차에 장착되는 할로겐 전조등 회사는 전 세계에 필립스, 오스람, GE밖에 없거든요. 그 외엔 자동차 회사에서 납품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남영전구가 르노에 납품하기 시작했고, 최근엔 일본 글로벌 메이커에 납품이 결정됐습니다. 이건 <LUXMEN>에 처음 공개하는 사실이네요. 또 하나 우리 경쟁력 중 하나가 중탄산 슬러리입니다. 종이를 만들 때 첨가되는데, 스위스의 오미야가 이 분야의 글로벌 톱이죠. 최근 저희가 오미야 대신 베트남 최대 제지회사와 협력해 현지에 공장 설립을 논의 중입니다.
아버지의 노하우에 자신감을 더해 도전한다 송원그룹은 전혀 다른 사업군, 또 소비재 사업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사업 분야는 유효한 겁니까. 우선해야 할 일은 7대 아이템의 세계 1위 도약입니다. 글로벌화 한다는 건 글로벌 경쟁력이 선행돼야 하는데, 앞서도 말했지만 송원그룹에는 그런 아이템이 7개나 있습니다. 이 부문이 더 시급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룹 차원의 사업 아이템이 탁월한데요.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버지가 일궈놓으신 사업군을 보면 정말 훌륭하신 분이란 생각이 들어요. 대기업이 들어오자니 시장이 작고 중소기업이 들어오기엔 초기 투자비용이 너무 많이 들죠.
송원그룹은 설립 이후 단 한번도 노사분규가 없었습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까. 아버지는 직원들이 일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보셨어요. 자식 공부시키고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었죠. 이 두 가지가 해결되면 정말 열심히 일하지 않겠냐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가장 먼저 사내 장학금 제도를 만드셨고 공장 주변에 직원들의 사택을 마련했습니다. 현재 저희 직원이 1000여 명인데, 공장 주변 아파트 200채가 모두 사택입니다. 그런점에서 송원그룹은 가족기업이에요. 해마다 설이면 임원 분들이 저희 집에서 떡국을 드시곤 세뱃돈으로 화투를 치셨는데, 이번엔 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그러질 못했네요.
창업을 꿈꾸는 여성 후배들에게 조언하신다면. 여성들이 똑똑한 시대라고 하는데, 막상 직장생활을 하면 똑똑한 것 외에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딸이 올해 포스코에 입사했는데, 면접할 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기에 CEO가 되겠다고 답하랬어요. 대기업 임원들이 면접을 보면 남성 지원자는 임원이나 사장을 꿈꾸는데, 여성들은 그렇지 않다더군요. 직장인이 아니라 창업을 꿈꾼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해보면 굉장히 많은 것을 얻고 배우게 됩니다. 유(有)에서 시작하는 것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죠. 제겐 자신감이 재산입니다. 그런데 그건 한순간에 생기는 게 아니죠. 창업이 밑거름이 됐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아버지의 노하우를 글로벌화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신, 있습니다.
김영환 회장의 투명하고 정직한 경영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건이 있다. 한때 식품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던 김 회장은 1981년 초반 국내 최초로 수원에 냉동만두 공장을 건설해 사업(사슴표 한록식품)을 개시했다. 그런데 2년 후인 1983년 말, 사업철수를 선언한다. 모두가 의아해 했다. 납품을 원하는 곳이 줄을 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원인은 무자료 거래에 있었다. 김 회장은 “무자료 거래는 정상적으로 거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니 한두 푼 이득 때문에 양심을 속이는 일은 할 수 없다”며 결국 사업에서 손을 뗐다. 또 다른 일화는 1984년 경인화학을 인수할 때 일이다. 경인화학은 기회된 가스를 가스 실린더에 담아 판매하는 가스회사. 그런데 제품을 살펴보니 업계 관행 상 4kg 통에 2.5kg이나 3kg을 채우는 게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김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경인화학은 이후 정량을 채우는 가스회사로 업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러한 신뢰가 바탕이 돼 인수 당시보다 현재 약 20배나 성장했다.
김영환 회장은 업종을 키우거나 관련 계열사를 늘리는 데는 거부감이 없었지만 유독 건설업에는 종사하지 않겠다는 경영 원칙이 있었다. 경영 전선에서 숱하게 건설업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마다했다. 이유인 즉, 건설업은 회사의 풍채를 키울 수 있고 겉이 화려해 외형적 이득만 놓고 보면 솔깃할 수도 있지만 투명 경영, 윤리 경영과는 입장이 맞지 않는 업종이란 것이다. 김해련 회장은 “아버지는 늘 입버릇처럼 죄많은 사람이 제조업을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다같이 잘사는 법을 늘 고민하셨다”고 전했다.
여성 후배를 위한 김해련 회장의 핫 멘토링 “슬럼프에 빠졌다는 판단이 서면 더 이상 슬럼프에 깊이 빠지지 않도록 마음가짐을 단단히 해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살려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더 깊이 빠지지 않도록 내면에서 불안하고 불쾌한 기운과 싸워야 한다.”
“여성 직장인들과 만날 기회가 적지 않다. 그런데 꿈이 큰, 아니 꿈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 놀라곤 한다. 특히 최고 경영자를 꿈꾸는 여성 직장인은 거의 없었다.”
“작심삼일에 너무 좌절하지 말자. 아무 결심도 안 하고 ‘나는 원래 그렇지 뭐’라고 자포자기하는 것보다 사흘에 한 번씩 작은 것이라도 새롭게 결심하는 것이 좋다.”
“가치관과 원칙이 흔들려 우왕좌왕하고 있다면 앞으로 나를 지켜줄 원칙을 세우자. 뿌리를 튼튼하게 하여 더 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하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긍정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김해련 지음, <멘토가 간절한 서른에게> 중)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6호(2014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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