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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머 뉴욕대 경영대학원 교수 | 창의력 50~100년 뒤 한국 미래 좌우
입력 : 2014.05.16 10: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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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경제성장 과정에서 아이디어·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아이디어·지식이 창조경제 활성화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아이디어라는 것은 요리로 따지면 레시피(요리법)와 같은 것이다. 레시피를 어떻게 활용하고 어떤 레시피를 쓰느냐에 따라 이전에 볼 수 없는 창의적인 요리를 만들거나 훨씬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대로 틀에 박힌 반복적이고 일상적인(routine) 일에 익숙해져 있는 대다수 사람들은 대개 기존에 있는 레시피를 따라간다. 하지만 지적인 도전을 즐기고 창의적인 사람은 기존 레시피를 따르기보다는 새로운 레시피를 만든다.
창조경제는 바로 이처럼 새로운 레시피를 찾는 아이디어와 지식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지식집약적이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일은 개인에게도 큰 보상이 따르고 이는 결국 국가경제에도 좋다.
한 가지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대다수 의사들은 매일 수십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일상적인 의료활동을 한다. 하지만 일부 의사들은 단순히 환자치료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치료법 등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모두 적용돼 수십만~수백만 명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단순히 기존 관행을 반복하는 것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새롭게 찾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데 비용이 많이 들거나 엄청난 인프라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방글라데시 의사 한 명이 있다. 방글라데시는 공중보건이 좋지 않아 질병에 시달리다 탈수증상을 보이는 아이들이 많다. 이때 아이들을 병원으로 데려가 포도당 정맥주사(IV)를 놔줘야 위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후진국에서 병원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내가 아는 방글라데시 의사가 물에다 소금과 설탕 등을 집어넣어 직접 마시게 하면 탈수증상을 완화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오럴 디하이드레이션 테라피로 불리는 이 같은 아이디어 덕분에 이제는 집에서 부모가 쉽게 아이들의 탈수증상을 해소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수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의사는 아이디어를 무상으로 제공했기 때문에 큰돈을 벌지는 않았지만 영웅이 됐다.
아이디어를 더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인 환경을 조성하려면. 한국 학생들을 보면 수학·과학 성적이 뛰어나다. 하지만 정말 한국경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고 창조경제를 일구려 한다면 학생들의 창의성을 측정할 수 있는 테스트 수단을 만들라고 한국 정책결정권자들에게 주문하고 싶다. 학생들의 수학·과학 성적을 시험으로 측정하듯 창의성 시험을 통해 학생들의 창의성이 얼마나 높고 낮은지 평가, 창의성이 낮으면 창의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학생들을 독려하거나 교과과정을 수정하는 조치를 취하면 된다. 한국경제가 장기적인 경쟁력을 높이기를 원한다면 창의력 측정수단에 대한 리서치를 강화하고 적절한 창의력 측정수단을 마련할 수 있도록 교육예산을 늘려야 할 것이다.
폴 로머 교수는 기타 연주자 지미 핸드릭스를 가장 창의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꼽았다. 백업 뮤지션 생활을 통해 기본을 다져 그 위에 창의적 아이디어를 집어넣은 선율을 만들어 냈다고 극찬했다.
자동차를 생각해보자. 한국이 자동차를 생산하는 게 처음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글로벌 자동차업계에서 명함을 내밀 만큼 자동차를 잘 만들고 있지 않은가. 이미 있던 자동차 제조기술을 모방했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지만 단순히 모방이 아니라 더 개선하고 발전시켰다고 본다. 일부 사람들은 미국에서 창의성 테스트를 만들면 나중에 이것을 받아들여서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경제가 어느 정도 기반에 올라선 만큼 한국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은 너무 겸손하게 생활해온 것 같다. 너무 겸손하면 거대한 야망과 야심이 줄어들고 움츠러들게 된다. 창의력이 있는 학생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당장이 아니라 50~100년 뒤 한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커다란 일이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공포심부터 갖는 것은 창의성 확보에 도움이 안된다. 흥분을 느끼면서 뭔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기회를 엿보는 것이 바로 창의성을 키우는 드라이버가 된다고 본다.
로머 교수는 학생들의 창의성 강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나는 학생들을 교수이자 부모입장에서 대한다.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조언은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책을 많이 보라는 것이다. 경영대학원 학생이기 때문에 비즈니스 서적을 많이 보겠지만 나는 책을 많이 읽되 매우 폭넓게 읽으라고 권유한다. 사고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면 어느 한쪽에서 봤던 아이디어와 다른 쪽에서 봤던 아이디어를 합칠 수 있는 역량이 커진다. 이를 통해 예사롭지 않은 창의적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신문, 잡지, 책, 웹사이트 등 다양하게 읽는 게 좋다. 동영상을 통해 뭔가 배운다고 하는데 별로 사고확대에는 도움이 안된다.
글쓰기(writing)도 중요하다. 글쓰기를 통해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모호한 생각을 구조적으로 정치하게 만들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과 합칠 때에도 글쓰기는 소통의 폭을 더욱 넓혀주고 명확하게 해준다. 이처럼 읽기와 글쓰기가 창의성의 토대가 된다고 본다. 학교에서 너무 공부만 시켜서 창의성이 줄어든다는 이야기가 가끔 나오는데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읽기와 쓰기와 같은 기본을 갖추고 있어야지 이 위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기타 연주자 지미 핸드릭스를 가장 창의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생각한다. 핸드릭스는 백업 뮤지션을 오랫동안 하면서 기본을 다졌고 이 위에 창의적 아이디어를 집어넣어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선율을 기타에서 만들어냈다.
한국정부는 창조경제를 통해 국가경제를 업그레이드하려 한다.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기술적으로 최고의 혁신성과 기술적 우위를 장기간 유지할 수 있는 기업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컴퓨터산업을 보자. IBM은 메인프레임 분야에서 엄청난 혁신성을 발휘했지만 PC가 확산되면서 뒷전으로 밀렸다. PC시대를 맞아 운용프로그램 윈도우를 내세워 컴퓨터 산업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마이크로소프트(MS)가 승승장구했지만 이제는 모바일 기기를 앞세운 애플과 삼성이 최고의 기술력을 발휘하는 기업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삼성과 애플의 위치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또 다른 혁신적인 기업에 의해 정상의 자리가 교체될 수 있다.
국가가 할 일은 바로 한때 최고의 혁신을 자랑했던 기업이 시간이 갈수록 혁신성이 떨어지더라도 또 다른 혁신적인 기업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건강한 기업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보통 이야기하는 창조적 파괴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다. 특정 산업이나 기업의 혁신성이 떨어지면 새로운 기업과 산업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지속적인 혁신문화를 만들어야만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삼성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게 커지면서 삼성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느냐는 불안감이 적지 않다. 삼성이든 또 다른 기업이든 간에 국가 경제가 특정 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은 국가경제가 건강하지 않다는 신호다. 삼성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혁신성을 발휘하며 글로벌 파워브랜드 위치를 유지해 나간다면 좋겠지만 삼성이 삐걱거리더라도 국가경제가 흔들리지 않고 다른 기업들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기업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창조경영이라고 본다.
한국의 경우 재벌그룹들이 이미 뿌리를 강하게 내리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페이스북과 같은 창업기업이 나타나기 쉽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도 변화할 수 있다고 본다. 창업기업이 많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면 법·금융시스템을 개선해 창업기업들이 중견 대기업으로 커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 일단 보틀넥(병목지점)을 찾아야 한다. 수많은 규제가 있겠지만 우선 창업과 혁신을 막는 요인이 무엇인지 한번 집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불필요한 규제를 한꺼번에 다 풀려면 너무 일이 많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 창업기업 성공의 길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막는 것은 없는지, 자금조달은 왜 어려운지, 그리고 기업공개(IPO)가 왜 어려운지, 진입장벽은 없는지 등을 살펴보고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실패를 용인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통해 혁신이라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고 실패하더라도 전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칭찬 받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면 기업가정신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당신은 개발도상국에 기존체제와 전혀 다른 일종의 경제특별구역이자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인 차터시티(CharterCity) 성장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 최초로 온두라스에서 차터시티 건설에 들어갔지만 온두라스 정부와의 이견으로 중단됐다. 대신 다른 개도국과 차터시티 건설을 논의 중이다. 최근에는 차터시티의 낮은 버전으로 볼 수 있는 도심확장프로젝트(urban expansion project)를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에서 진행 중이다. 도심확장프로젝트는 신도시 개발모델인 차터시티와는 달리 앞으로 50~100년을 내다보고 기존 도시 규모를 확장하는 도시계획을 짜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프로젝트다.
미국 경제가 강한 성장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보는가. 미국경제 회복속도가 느리기는 하지만 회복세는 꾸준히 지속될 것이다. 다만 경기가 안 좋을 때 미국정부가 보다 더 공격적으로 인프라에 투자하는 등 경기대응적(countercyclical) 정책을 써야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미국정부가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쳤다면 경기회복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었다. 다만 중장기 미국경제 전망은 좋다고 본다.
최근 자산거품 붕괴 등 중국경제 비관론이 비등하고 있다. 중국경제 경착륙 이슈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일부 지역에 주택이 잘못 들어서는 등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택에 대한 과도투자는 사실이 아니다. 주택을 너무 많이 지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중산층 확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주택구매에 나서면서 과잉공급 논란은 잦아들 것이다.
위안화 환율변동폭 확대조치와 관련해 대다수 사람들은 환율변동폭 확대를 투기세력에 대한 경고로만 보는데 투기세력 외에 위안화 거래를 하는 모든 경제주체에게 위안화 거래 위험성을 일깨워준 것이다. 위안화 가치가 항상 상승만 하는 게 아니라 떨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줘 경제주체들에게 환위험 방지를 위한 환헤지 필요성을 주지시켜줬다는 데 의미가 있다.
[뉴욕 = 박봉권 특파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4호(2014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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