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송을 찍는 사진작가 장국현 | 아름다움만 표현해선 좋은 작품이 될 수 없죠

    입력 : 2013.12.12 14: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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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8월 초순이었다. 7월 중순께 울진 소광리로 내려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소광리는 조선 숙종 때 벌목을 금하는 황장봉표를 세워 송림을 보존한 곳이다. 60도가 넘는 경사지가 첩첩이 이어지고 원시림이 빽빽해 조금만 들어가면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8년 전부터 매년 그곳에 두 달 정도 머물며 사진을 찍었다. 그날도 영감이 떠올라 마을 사람들과 소나무를 찾아 나섰다. 7시간쯤 올라갔을까,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능선을 올려다보니 멀리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무서울 정도였다. 커다란 호랑이 같았다. 조금 더 접근하니 숨이 막혔다.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소나무의 기운이 엄청났다. 무서워서 다가갈 수 없었다. 한 동안 혼절한 듯 멈췄다가 정신을 가다듬었다. 배낭에서 음식을 꺼내 놓고 예를 갖춘 뒤에야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대단한 나무들 다 봤지만 신송은 그렇게 무섭다는 느낌을 주었다.” 소나무 사진작가 장국현은 ‘울진대왕금강송’과의 첫 만남을 그렇게 회상했다. 이후 그는 4년째 춘하추동으로 대왕소나무를 찾아 사진을 찍고 있다. 그가 얼마나 이 신송에 매료됐는지는 40년 넘게 린호프 카메라(4×5) 한 기종만 쓰다 대형 중에서도 대형인 디어도프8×10 카메라를 새로 장만했다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대왕소나무는 경외감을 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둥이 온통 근육질로 우락부락하다. 얼마나 척박하고 바람이 강한 곳에 있는지 둘레가 5m나 되는데 키는 9m 남짓했다. 거기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난 가지들은 용트림하듯 하늘을 향하고 있고 끝에는 늘 푸르른 솔잎들이 앉아 있다. 놀랍게도 맨 아래 가지는 연리지였다. 태백산맥서 내려오는 강한 바람과 동해의 해풍이 맞부딪쳐서 수십만 수백만 번을 스치는 동안 송진이 엉겨 두 가지가 한데 붙었다. 신이 내린 선물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겠는가. 신송(神松) 중에 신송이다.”

    파리 이어 뉴욕 · LA 등서 전시 지난해 장국현은 정부 지원을 받아 이 신송을 비롯한 소나무 작품들을 파리에서 전시했다. 호평이 이어졌다. 작가는 특히 대왕금강송이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했다.

    “프랑스 사람들이 사진을 보고는 하나같이 ‘한국에 진짜 이런 나무가 있느냐, 진짜 이런 색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들 우리 소나무 색깔 보고 놀라더라. 그곳에도 소나무는 있으나 모두가 검은 색이다. 우리 금강송은 껍질이 벌건데 1년 내내 이 색이다.”

    장 루이 푸아트방 전 재독 프랑스문화원장은 그의 사진을 보고 “이것은 귀족의 색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장국현의 작품을 “희미한 빛이 맴도는 나무 기둥의 붉은 색이 왕족 귀족의 순수한 색깔인 초록색으로 된 솔잎을 도드라지게 하고, 또 천으로 감싼 듯 먼 곳을 덮고 있는 하얀 눈과 단순한 선 하나로 나뭇가지를 장식하고 있는 눈을 돋보이게 하면서 이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뚜렷하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신비한 힘을 부여한다”고 했다.

    파리 전시는 유럽인들에게 울진 금강송 숲의 매력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찬사가 이어진 덕에 장국현은 내년엔 미국 뉴욕과 LA에서도 대규모 전시를 하게 됐다. 그의 작품이 얼마나 감동을 주었는지 고어텍스사는 그를 광고모델로 기용했다.

    그 감동은 국내에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11월 20일부터 광주비엔날레에서 열린 ‘2013 대한민국 아트 페스티벌’에 파리에선 축소본으로 전시했던 울진대왕금강송을 실물 크기로 내걸어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가로 5m 세로 3.7m로 인화된 이 사진은 대왕소나무의 하단부만을 담았지만 관람객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장국현은 내년엔 서울과 안동에서 더 큰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다. 안동 전시는 경북도청 신청사 이전 기념전으로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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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으로 얻는 단순함의 미학 소나무 찍는 많은 이들이 몽환적 정경을 담아낸다. 장국현의 작품은 그런 류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살아있는 소나무를 바로 앞에서 보듯이 생생하다. 대형 카메라로 찍었기에 더 정확하고 더 생생하다. 그 정직함과 단순함이 오히려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많은 내용을 함축한 게 좋은 사진이다.”

    그가 사진을 대하는 태도다. 다만 그는 단순함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담아낸다.

    “소나무에 광솔이 있는가를 본다. 나무가 오래됐다는 증거다. 잘려나간 죽은 가지는 구도를 단순화시키며 여백의 미를 살려준다. 내 사진의 소나무는 죽은 가지가 많은 게 특징이다.”

    죽은 가지는 소나무가 살아남는 비결이라고 한다.

    “괴산의 왕소나무는 죽은 가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밑동이 부러져 죽었다. 울진대왕금강송은 둘레가 5m나 되는데도 키는 10m도 안 된다. 살아남기 위해 가지를 적게 가졌다. 그런 소나무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는 작품에 인내와 절제를 담고 있다. 그의 작품들이 감동을 주는 것은 기교적 멋이 아닌, 남들이 갈 수 없는 곳에서 담아낸 전혀 다른 차원의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소광리는 2274ha나 된다. 산림청에 따르면 이곳엔 200~300년 된 소나무만도 8만 그루나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애송이다. 내가 찍는 나무들은 적어도 수령 500년 이상으로 아주 척박한 곳에서 자란다. 바위 위나 암벽 꼭대기에서 자라기에 멋이 있다. 그런 소나무만 300여 그루 이상을 봤다. 적어도 두세 아름 이상이고 키는 30m까지 된다. 내가 지금까지 확인한 게 반 정도쯤 될까. 300그루 가운데도 찍은 것은 일부이다. 소광리 밖에는 500년 이상 된 그런 소나무가 채 50그루가 안 될 것이다.”

    마을 주민도 모르고 삼림청 직원들도 전혀 보지 못했던 나무들을 찾아내 찍은 것이다. 게다가 온난화와 재선충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나무들이다.

    “50~100년 뒤엔 온난화로 그 소나무들이 모두 사라질 지도 모른다. 경주 흥덕왕릉 소나무는 재선충 때문에 절반 정도를 베어내야 한다. 그러니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찍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의 사진의 진짜 가치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것 같다.

    “소광리 산들은 60도가 넘는 경사를 기어올라야 한다. 거기 소나무들은 그래서 살아남았다. 높은 곳 척박한 곳이기에 살아남았다. 사람들이 접근 가능한 곳은 일제 때, 한국동란 때 거의 다 베어냈다. 이곳은 베어도 가져올 방도가 없어 원시림 상태로 보존됐다. 우리나라의 보배다. 세계 어디 가도 이런 곳이 없다.”

    그의 작업은 그 오지를 엄청난 무게의 카메라와 식량까지 짊어지고 며칠씩 기약 없이 헤매야 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장국현은 생식하는 것으로 식량 무게를 덜었다.

    “집에서 밥 먹은 지 15년 됐다. 손님 와서 외식할 때 외엔 생식을 한다. 과일 먹고 청국장가루와 송화가루 현미가루를 타서 마신다. 물만 있으면 된다. 산에 가면 한 달씩 있다가 돌아오곤 하는데 음식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힘들여 가지만 셔터조차도 절대 성급하게 누르지 않는다. 울퉁불퉁한 둥치와 용트림하는 가지 파란 솔잎 하나하나까지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지 보고 계곡의 바람과 운무까지 때가 되기를 기다린다.

    “아름다움만 표현해선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모든 대상에서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소나무에선 기상, 기운을 중시한다. 그래서 정성스레 예를 갖추고 마음을 비운 뒤 정신을 집중한다.”

    찰나의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오랜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성찬을 멀리하고 그 험한 산을 기어올라 진득하게 기다리는 절제심이 그의 사진을 만드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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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왕소나무와의 인연 소나무 기운이 가장 왕성한 여름철 두세 달 소광리에 머물며 사진을 찍던 그는 대왕소나무를 만난 뒤로는 철마다 달려간다. 대왕소나무를 신처럼 받들게 된 그는 이 나무가 두 번이나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줬을 뿐 아니라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준다고 했다.

    “작년 겨울 한 방송사가 구정 특집으로 울진금강송 다큐멘터리를 내는데 꼭 눈 덮인 대왕금강송을 넣겠다고 했다. 그곳은 너무 험해 눈 올 때는 올라가는 게 불가능하다. 우리 집에서 10시간을 가야 한다. 그래서 눈 올 것 같은 날을 계산해 미리 올라갔다. 새벽 4시쯤 되니 텐트에 사박사박 눈 쌓이는 소리가 돌렸다. 아침부터 일어나 3일간 찍었다. 필름이며 먹을 것, 물까지 모두가 동났다. 여차하면 119에 구조요청을 하자며 내려왔다. 그런데 눈이 깊어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걸렸다. 전화도 터지지 않았다. 대왕금강송 근처에서면 겨우 연결됐던 것이다. 원래 길 없는 산인데다 눈까지 오니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저녁이 가까워지니 산봉우리만 보였다. 일행 중 젊은 친구가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 전화를 했지만 허사였다. 모든 스태프가 나만 바라봤다. 임도 가장 높은 곳에 대놓은 차까지 가야 했다. 나는 대왕금강송을 믿었다. 나에게 사진까지 찍게 했는데 저버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몰두하니 영감이 왔다. 앞에 보이는 능선까지만 올라가자고 했다. 그곳으로 가니 갑자기 살길이 생겼다. 임도가 나타났다.

    전날 저녁 먹고 아침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지옥 같았는데 이제 사는 게 확실했다. 그 길을 따라 4시간을 걸으니 차가 나왔다. 웬만큼 험한 길은 다 갈 수 있는 성능 좋은 차였다. 그런데 시동 걸고 출발하자 갑자기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빠져나오려 할수록 점점 미끄러져 나중엔 길옆 나무에 가서 붙었다. 문이 다 찌그러졌다. 나와 PD만 남고 젊은 친구들에게 걸어서 내려가라고 했다. 이튿날 이장이 큰 트랙터를 몰고 왔다. 그가 “밤에 내려왔다면 다 죽었다”고 했다. 길이 온통 빙판으로 변해 트랙터조차 간신히 왔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두 번이나 생사의 기로에서 빠져나온 셈이다.”

    대왕소나무의 보살핌이었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그 사건 이후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된데다 특히 연리지 나무의 기를 받아서인지 하는 일마다 다 잘 된다고 했다. 험로를 다닐 차가 있었으면 했는데 그런 차가 생겼고 파리 전시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은 뒤 미국 전시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니 고어텍스가 모델을 제의해왔고 당국의 지원으로 전시 계획까지 일사천리로 풀리고 있다는 것이다.

    영감을 담는 사진가 장국현은 원래 약사였다. 1970년 우연한 기회에 사진에 입문해 이후 평생 사진만 찍고 있다. 처음엔 취미로 시작했는데 자제가 안될 만큼 심하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전생에 인연이 있었나보다. 내가 사진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인생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돈은 벌었을지 모르나 인생에 덕 되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예술은 영적인 세계인데 그 세계를 모르고 짐승 같은 삶을 살았을 게 아닌가.”

    그는 당시 최고의 예술사진가로 꼽히던 신형국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으로부터 사사했다.

    “신형국 선생은 보도사진 하면서 예술사진에 심취했는데 휴먼 다큐멘터리만을 고집했다. 그 분은 결정적 순간을 잡아내는데 천부적 소질이 있었다. 그 분으로부터 결정적 순간을 잡아내는 법을 배웠다. 지나고 보니 생활사진 뿐 아니라 산 사진도 결정적 순간이 있더라.”

    그도 처음엔 ‘사람 사진’을 찍었다. 휴먼 다큐멘터리로 홍콩 국제사진전서 최고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산 사진으로 돌아섰다.

    “1989년 한중수교가 있기 3년 전 우연히 백두산 사진을 찍을 계기가 생겼다. 백두산을 처음 대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한 장소서 꼼짝 않고 8시간이나 찍었다. 백두산에 빨려 들어갔다. 극적인 상황이 일어났다. 밤새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벅찬 감동이 넘쳤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백두산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고 열이 났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는 산 사진에 빠져 들었지만 그 때문에 신형국 씨와 멀어졌다. 그가 산 사진에 입문하자 이후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것. 그렇지만 그는 아직도 신형국 씨를 평생의 스승으로 떠올리고 있다.

    어쨌든 이후 장국현은 매년 백두산에 가서 짧게는 보름, 길게는 두 달간 머물며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17년 동안 백두산과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등 다섯 산만 찍었다.

    “연간 반은 산에서 살았다. 텐트 치고 대피소에 머물러 결정적 순간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처음 3~5년은 헛방을 쳤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늘 헛방이었다. 산에 가서 그 순간을 못 잡으면 돌아오지 못한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있어도 그 순간을 못 잡으면 다음 해 다시 가야 한다.”

    그러다 어느 기회에 한 스승을 만나 결정적 순간을 만나는 게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됐다고 한다.

    “처음엔 우연한 일치라고 생각했는데 그 분으로부터 백두산의 경험이 우연이 아니라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됐다. 그 스승 밑에서 공부하니 묘한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산에 가선 만나는 게 힘든 결정적 순간을 알게 됐다.”

    이후 그는 사진 찍기 전 기도하면서 마음을 집중한다.

    “상상도 못할 세계가 펼쳐지더라. 그 현상은 봐야 믿는다.”

    그러면서 용아장성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했다.

    “봉정암에서 미역국 한 그릇 얻어먹고 제자 3명과 함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고 비가 왔다. 처음엔 부슬부슬 내리더니 나중엔 시커먼 먹구름이 끼었다. 그 순간 영감이 왔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거길 가야 할 것 같았다. 제자 3명을 데리고 용아장성엘 갔다. 카메라가 젖으면 안 되니 봉정암 스님께 우산을 빌려갔다. 비는 점점 쏟아지고 안개는 자욱하게 끼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전혀 가본 적도 없는 곳으로 들어갔다. 10분 정도 가다보니 이건 아닌 것 같더라.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였다. 그래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고 2분 정도 지나 돌이켜보니 돌아가자는 것은 내 생각이었고 된다는 것은 하늘에서 온 영감이었다. 언뜻 내 생각이 아니라 영감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가자고 했다. 조금 가니 겨우 카메라 한 대 설치할 수 있는 바위가 나타났다. 거기에 카메라 설치하고 우산으로 가리고 있는데 5분도 안 돼 갑자기 앞이 확 펼쳐졌다. 기적 같은 장면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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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찍다 앞을 보는 눈 떠 그는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래로 대형 카메라인 린호프만을 썼다. 험한 산속을 헤매다보니 그 튼튼한 카메라를 세 대째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카메라가 그에게 앞을 보는 눈을 틔워줬다고 했다. 몰입하다보니 잠재의식 단계로 넘어가 초능력이 나온다는 것.

    “이 카메라를 쓰려면 15분 전에 알아야 한다. (설치하고 준비하는 데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 15분 전 예측해야만 결정적 순간을 잡아낼 수 있다. 그걸 수없이 연습하다보니 하루 이틀로 늘어나고 그걸 확대하니 10년 20년을 보게 됐다.”

    그는 결정적 순간을 잡아내는 것을 집중력과 하늘이 주는 영감으로 설명한다.

    “집중이 잘 될 때는 여기 앉아서 한라산과 지리산의 변화가 보인다. 그럴 때 거기 있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빨리 찍으라고 하면 어떻게 아느냐고 깜짝 놀란다.”

    영감은 기도하면서 얻는다고 했다. “소광리에선 새벽 2~3시면 일어난다. 주로 여름에 작업하는데 소나무가 가장 왕성할 때다. 그곳에 가면 땅기운이 워낙 좋아 잠을 안자도 된다. 그 때가 되면 눈이 떠져 일어난다. 산 사진 찍으며 터득한 영감이 있다. 영감은 하늘의 파장이 맞아야 온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면 파장이 온다. 그 뒤 소나무를 찾아 나선다.”

    그만큼 하늘의 도움을 받아 찍는다고 한다. 자신은 카메라만 설치할 뿐 하늘에 맡긴다는 것.

    “예술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신들림의 경지까지 가야 한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대작까지는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시공을 초월해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불후의 명작은 신들림의 경지가 되어야 한다.”

    신들린 듯 사진을 찍지만 그 역시 처음 소나무 사진을 찍을 땐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17년간 1년의 절반 이상을 산속에서 살며 산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소나무로 전향한 후 앞이 캄캄했다. 나중에야 감을 터득했다. 소나무는 햇빛의 각도와 강약, 계절 시간대에 따라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햇빛 없는 곳에서 농담을 표현한다.”

    소나무에서 배운 행복론 어렵게 다가간 소나무는 그의 삶 자체를 바꿨다. 육체의 건강 뿐 아니라 정신적 안정까지 찾은 것이다. 무거운 짐 지고 높은 산 오르내리는 만큼 힘이 더 생기고 마음을 비우니깐 더 행복해진다고 했다.

    “소나무의 맑은 기운이 내 안의 탁한 기운을 몰아낸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다. 재작년보다 작년이 좋아졌고 작년보다 올해가 좋아졌다. 그곳에 머물면서 병이며 피로가 없어졌다.”

    특히 소나무 사진 찍으며 집중하다보니 예술의 영감이 하늘에서 신송을 타고 내려온다고 했다. 거기서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만물의 이치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사진 찍으며 건강 찾았고, 절대 무한의 행복을 찾았으며, 예술까지 하니 천하를 얻은 것 같다. 사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다.”

    그러기에 집중력 키우고 싶은 사람은 사진을 하라고 했다.

    “집중력 키우는 데 사진 이상 가는 게 없다. 사람 사는 게 마음먹기 달렸다는데 사진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1초에 승부를 내야 한다. 그 집중력이 모이면 기운이 된다. 마음먹은 게 현실세계 물질세계로 나타난다.”

    이렇게 무아지경에 빠져드니 재벌총수보다 낫다고 한다. 그 만큼 사진에 빠져들면 안 하고는 못 배기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경제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 무엇인지 아나. 진정한 행복은 마음을 비웠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돈으로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만족이다. 그 만족감은 수시로 변한다. 한국 최고 부자라고 그걸로 만족할 수 있나. 이에 비해 진정한 행복은 변하지 않는다. 내 안에 소나무 기운을 채우면 나와 소나무가 일체가 된다. 그게 행복이다. 내가 소나무를 좋아하고 소나무 작가이니 소나무 기운을 채우면 된다.”

    소나무 사진을 찍을 때 그와 소나무가 일치된다는 애기다. 그만큼 사진에 혼을 담는지도 모른다.

    “내가 찍고 싶은 것은 정기요 기상이다. 그래서 산의 기, 소나무의 기를 찍었다. 그걸 다른 사람이 느꼈다면 성공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내가 잘못했거나 아니면 상대가 짐승 같아서 느끼지 못하는 거다. 내 사진 본 화가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하겠다고 하니 이러면 된 게 아닌가.”

    장국현 작가는 호는 고송(古松)이다. 어린 소나무는 단순한 소나무일 뿐인데 늙으면 노송이 되고 거기에 개성이 있으면 고송이며 그 다음이 신송이라고 했다. 신송은 인간이 숭배할 대상이란다.

    칠곡 출신으로 영남대 약대를 나와 약국을 운영하다 1970년부터 사진에 심취해 이후 사진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1989년까지 휴먼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었고 이후 2001년까지 산 사진을 찍다가 이후엔 소나무 사진에 주력했다. 홍콩국제사진전 최고상을 두 차례 탔고 이탈리아 국제사진전 은상, 미국 국제사진전 동상 등 다수의 상을 탔다. 작품은 송도 UN사무국 로비를 비롯해 국회의사당, 통일부, 산림청, 주불OECD대사관 등에 소장돼 있다. 수익금 가운데 3억원을 경상북도와 대구시, 대구교육청에 성금으로 기탁하기도 했다. 원래 집은 대구이나 13년 전 부인의 요양을 위해 마련한 청도 자택과 울진 소광리에서 머물며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9호(2013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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