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스타CEO]⑧ 마윈 알리바바 회장…가장 큰 실패는 ‘포기’ 100년 성장 자신있죠

    입력 : 2013.03.07 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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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최대 온라인 쇼핑몰인 타오바오(淘寶·www.taobao.com)는 지난해 11월 11일 광군제(光棍節)를 맞아 대대적인 할인 판매 행사를 실시했다. 한국에서는 ‘빼빼로 데이’로 불리는 이날을 중국에서는 ‘광군(짝 없는 남녀 싱글)’을 위한 날로 기념하면서 유통업체들 간 판촉 전쟁이 벌어진다. 타오바오는 이날 하루 100억위안(1조73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려 오프라인 유통업체들과의 승부에서 완승을 거뒀다. 타오바오를 비롯한 여러 온라인 거래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전자상거래 분야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기업이 바로 알리바바그룹이다.

    알리바바의 창업자 겸 회장인 마윈(馬雲·49)은 ‘광군제 대전’에서 승리한 직후 “전자상거래 경제 방식이 전통적인 산업 생태계를 먹어 치웠다”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알리바바의 인터넷 쇼핑몰 거래액이 지난해 처음으로 1조위안(173조원)을 돌파했다. 이는 중국 소비재 총 매출액의 5.4%, 국내총생산(GDP)의 2%에 달하는 규모다.

    마 회장은 “전자상거래는 더 이상 ‘가상경제’가 아닌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새로운 경제영역”이라며 “소비자들이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중국 경제 구조의 전환을 촉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조위안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우리는 10조위안 시대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ET 같은 나의 뒤를 이으려면…” 은퇴 선언 마 회장의 이런 자신감은 1억위안(173억원)짜리 내기로도 이어졌다.

    마 회장이 중국 최대 부동산 기업인 다롄완다그룹의 왕젠린 회장과 1억위안 내기를 한 사실이 지난해 12월 중국 CCTV의 ‘올해의 경제인’ 시상식에서 공개됐다. 두 최고경영자(CEO)의 내기는 ‘오는 2020년까지 중국 전체 소매시장에서 전자상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을 것이냐’는 것이다. 전자상거래 비중이 50%를 넘어서면 마 회장이 왕 회장으로부터 1억위안을 받는다.

    마 회장은 “전자상거래는 새로운 비즈니스 차원이 아니라 생활 방식의 변혁이므로 반드시 전통산업을 대체할 것”이라며 강한 승부욕을 드러냈다.

    화제를 몰고 다니는 마 회장은 얼마 전 파격적인 발표로 또 다시 관심을 끌었다. 타오바오 창립 기념일인 오는 5월 10일에 CEO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는 지난 1월 15일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인터넷 업계에서 48세의 나이는 이미 젊은 나이가 아니다”며 “나처럼 ET(외계인) 같고 성격이 강한 사람의 뒤를 이어받으려면 용기와 희생정신이 필요할 것”이라며 은퇴를 공식화했다. 그는 이어 “알리바바는 최소 102년은 가야 할 기업이므로 아직 88년이나 남았다”며 “알리바바 사람들이여, 나가자”라고 끝을 맺었다.

    그는 CEO에서 물러나고 이사회 의장직을 유지하면서 그룹의 사업 전략 수립에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서는 마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퇴임하기 위해 상당 기간 준비를 해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미 2008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후계 구도를 미리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일부 임원들에게는 휴식과 재충전, 교육 목적의 장기 휴가를 주기도 했다. 퇴임 이후를 미리 대비하라는 뜻으로 해석됐다. 2010년 9월엔 공개석상에서 “후계자가 나를 초월해 알리바바를 더 잘 경영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해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2011년부터 회사 사업구조를 연이어 개편한 것도 퇴임을 염두에 둔 조치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마 회장은 2011년 6월 타오바오 사이트를 타오바오와 톈먀오, 이타오 등 3개 독립 사이트로 분사시켰다. 이어 2012년 7월 사업군을 7개로 늘렸다가 지난 1월에는 25개의 사업부로 최종 조정했다. 이처럼 사업부제로의 개편은 자신이 물러난 뒤 책임 경영을 강화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특히 그는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GE)으로 대표되는 서구 기업의 사업부제 경영 방식을 선호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마 회장의 퇴임은 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1960년대 생 다른 임원들도 그와 함께 물러나고, 1970년대와 80년대 생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회사가 다시 젊어지는 셈이다. 임원들 대다수는 지난 2007년 알리바바의 홍콩 증시 상장 때 이미 떼돈을 벌었기 때문에 이들의 조기 은퇴가 반드시 아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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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협소설 좋아하는 괴짜 마 회장은 눈에 띌 정도로 깡마른 체형 못지않게 행동도 파격적이다. 그가 종종 ‘괴짜 CEO’로 불리는 이유다. CEO 치고는 취미부터 남다르다. 그는 유명 소설가 진융(金庸)의 무협소설 읽기를 가장 좋아한다. 그 다음으로는 찻집에 가서 소설 내용에 대해 얘기하고 옛날 고사를 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언젠가 “무협소설을 통해 가상의 세계를 탐미한 것이 나에게 사유의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알리바바의 직원들은 무협소설 등장인물에서 따온 예명을 자주 사용한다. 사무실에도 무협소설에서 따온 이름을 붙였다. 마윈 집무실은 도화도(桃花島)다. 회의실은 광명정(光明頂), 화장실은 청우헌(廳雨軒)으로 불린다.

    그는 태극권 광이기도 하다. 그는 “태극 문화를 접하면서 기업 경영에도 음과 양이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사업의 발전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침체가 뒤따르고, 무엇인가를 거둔 다음에는 반드시 풀어야 할 때가 온다”며 “기업 경영에도 태극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알리바바 직원들 중 1500명 이상이 태극권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마 회장은 이들을 위해 국제적인 태극권 대가를 직접 모셔오기도 했다.

    그는 1964년 저장성 항저우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서 생계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잡지사에서 발간된 서적을 삼륜자동차에 싣고 배달하는 일이었다. 이때 우연히 저장성 무용가협회장을 도와 서류를 정리하다가 작가 루야오의 대표작 <인생>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다. ‘인생의 길이 비록 느리고 길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몇 걸음 만에 결판이 난다’는 문구에 감명을 받아 일을 바로 그만두고 다시 대학 입학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두 번째 대입도 실패였다. 정규 대학에 갈 성적이 안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삼수를 감행했다. 다양한 수준의 대학이 공존하는 중국에서는 삼수를 하면서까지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는 삼수를 했음에도 4년제 대학에 갈 성적이 안돼 전문대로 분류되는 항저우사범학원 영어과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 입학 전까지 성적이 신통치 않았지만 영어는 무협지만큼이나 좋아했다. 유명 관광지인 항저우 서호를 일부러 찾아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말을 걸면서 실전 영어도 익혔다. 나중에는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는 영어로 말대꾸를 하는 기행도 일삼았다. 덕분에 그는 1988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항저우전자과기대학 야간부에 영어교사로 취업할 수 있었다.

    사업가적 기질을 갖고 있었던 마 회장은 7년간의 영어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30세의 나이로 첫 창업을 했다. 자신의 특기인 영어를 살려 항저우에 첫 전문통역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그는 이미 항저우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미국 유학을 거치지 않은 토종 영어 실력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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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에게 뒤지고는 절대 못살아 마 회장이 인터넷 업계에 발을 디디게 된 계기도 그의 영어 실력이 만들어줬다.

    그는 당시 저장성 교통청의 위탁을 받아 미국의 한 기업에 채무를 독촉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돈을 받아내는 데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인터넷과 운명적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MS) 본사가 있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로 출장을 가서는 처음으로 인터넷을 접한 것이었다. 사업적 감각이 있었던 그는 자신이 설립한 통역회사의 광고를 곧바로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 첫 광고가 오전 10시에 사이트에 게재됐는데 점심식사를 하기도 전에 미국과 독일, 일본 등에서 6통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그 순간 마 회장은 “중국 기업 자료를 수집해 인터넷으로 판매하면 장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시애틀에 있는 친구와 함께 B2B 전자상거래 사이트를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차이나 페이지’라는 사이트 이름도 지었다.

    중국으로 되돌아온 그날 밤 그는 무역 계통에 종사하는 친구 24명에게 새 사업모델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23명이 반대하고, 1명이 찬성했지만 그는 사업을 진행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당시를 두고 마 회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인터넷에 대해 큰 자신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한 번 해보고 안되면 돌아오면 그만 아닌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 회장은 자신의 안목보다는 용기에 대해 스스로 높은 점수를 매겼다.

    마 회장은 1995년 4월 31세의 나이로 7000위안의 자기 자금과 여동생과 매형, 부모 등 친척에게 빌린 2만위안으로 하이보넷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중국 최초의 인터넷 회사로 평가받는 곳이다. 하이보넷은 B2B 전자상거래 사이트 ‘차이나 페이지’ 운영에 들어갔다. 창업 이듬해 700만위안의 매출을 올리는 작은 성과도 거뒀다. 그에 힘입어 항저우전신으로부터 140만위안의 투자를 받으면서 지분 70%를 내주었다. 그러나 대기업과는 경영이념이 너무 달랐고, 합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차이나 페이지를 포기하고 나오면서 자신의 보유 지분을 창업에 참여한 직원들에게 분배했다.

    이후 그는 중국 대외경제무역부가 설립한 중국국제전자비즈니스센터(EDI)에 30% 지분으로 참여했다. 그는 온라인 무역거래를 지원하는 이 사이트를 통해 다양한 B2B 비즈니스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유기업 역시 그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 1999년 회사를 박차고 나온 그는 다른 인터넷 기업인 시나닷컴 등에서 많은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더 이상의 속박은 안될 말이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일하던 핵심 동료들도 그와 뜻을 같이해 함께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들은 마윈의 집에 모여 새로운 인터넷 기업을 설립하는 방안을 놓고 격정적인 토론을 벌였다. 마 회장은 “앞길이 컴컴하지만 함께 전진한다. 우리가 뜻을 모았는데 뭐가 걱정이냐”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마윈과 동료들은 이 자리에서 50만위안의 자본금을 모았다. 이들은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회의라고 생각해 회의 진행 상황을 전부 녹화하기도 했다.

    이들의 결론은 전자상거래 회사를 새로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세 가지 목표가 세워졌다. 첫째, 102년간 생존할 회사를 만든다. 둘째, 중소기업을 위해 일한다. 셋째, 세계 톱10에 들어간다.

    회사 이름을 알리바바로 지은 마 회장은 1만달러에 캐나다인으로부터 사이트 주소를 사들였다. 사무실은 그의 집이었다. 많을 때는 35명이 그의 집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하루 16~18시간 미친 듯이 일하던 시기였다. 동료들 모두 일하다가 지치면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잠들었다. 마 회장은 “가장 큰 실패는 포기”라면서 직원들을 독려했다. 이렇게 해서 1999년 3월 알리바바 사이트가 공식 출범했다. 이후로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출범 5개월 만에 한 대형 펀드로부터 500만달러를 투자받은데 이어 이듬해는 일본 소프트뱅크로부터도 2000만달러를 유치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알리바바의 성공에는 남에게 뒤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마 회장의 성격도 큰 몫을 했다. 주변에서는 그에 대해 절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대담하고 추진력도 강하다. 동시에 세상의 변화를 재빠르게 파악하고,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는 이성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혁훈 매일경제 베이징 특파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0호(2013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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