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계의 돈키호테,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내 예술적 기질 이젠 제대로 팔 생각입니다

    입력 : 2012.06.01 17: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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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말, 서울 마포구에 자리한 홍익대학교에서 ‘융합’을 주제로 한 컨퍼런스가 진행됐다. 총 3일간 7개 세션으로 나눠 진행된 강연 중 단연 눈길을 사로잡은 건 프랑스 디자이너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Jean-Charles de Castelbajac)의 시간. 42년간 패션과 예술, 문화, 음악, 기술, 디자인을 융합해온 그는 무대 등장부터 퇴장까지 파격적인 연출을 선보였다. “40여 년간 실험적인 옷을 선보였는데, 오래전부터 내가 너무 앞서가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파격이라 외면당했던 작품들이 대중에게 회자되는 걸 보면서 내가 정상적인 게 아닐까 갸우뚱 합니다.”(웃음)

    강연회 전 무대 뒤에서 만난 까스텔바작은 그동안 선보였던 작품을 의식(?)했는지 평범한 포즈로 카메라를 맞았다. 하지만 여느 노신사와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은 딱 거기까지.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말머리를 뒤집어 쓴 여성 둘이 옆에 서자 “뿔 없는 유니콘이자 희귀종”이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마치 ‘내가 이럴 줄 몰랐지? 알았어? 난 지금부터 시작이야!’라고 말하듯 한껏 포즈를 취하더니 이것저것 강연회에 쓸 소품 가방을 분주히 챙기기 시작했다. 그의 파격은 최근 내한한 21세기의 아이콘 레이디가가의 실험적인 의상에서 방점을 찍었다. 2009년 독일의 한 토크쇼에 입고나온 ‘커밋 더 프로그’ 패션(일명 개구리 패션)이 그의 손을 거쳤고, 이듬해 ‘생고기 드레스’ 또한 그의 머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쯤되면 말머리를 뒤집어 쓴 유니콘 두 마리 쯤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강연이 시작되고 그의 소개가 끝나자 무대가 암전됐다. 그리고 여섯 개의 촛불을 든 까스텔바작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등장했다. 통역사에게도 최근 컬렉션 의상을 입힌 그는 강연 내내 코미디언처럼 웃음을 유도했고 강약을 조절하며 관객을 리드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좌충우돌한 그의 강연을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Jean-Charles de Castelbajac) 1949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 중반 가족이 프랑스로 이주하며 그곳에 정착했다. 의류업체를 경영하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패션 디자이너로 입문한 까스텔바작은 1970년 첫 컬렉션 라인을 출시하고 1980년에 남성복 라인을 선보였다. 만화 캐릭터 프린트와 군복 위장 패턴을 처음으로 패션에 접목한 그의 작업은 이후 수많은 셀리브리티의 지지를 받으며 승승장구한다. 1997년 ‘세계 기독 청년의 날’ 행사에 예술 감독을 맡으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성직자 5500명의 의상을 디자인했고, 2006년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주체로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팝 문화적이고 트렌드에 좌우하지 않는 디자인 덕분에 종종 안티 패션의 기수라 불리는 그는 ‘유행을 타지 않는 영속적인 옷’을 지향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까스텔바작 브랜드의 상표권은 지난해 국내 패션브랜드 ‘EXR’이 인수했다.

    1975년 스포트막스(SPORTMAX) 론칭을 위해 막스마라(MAX MARA)의 아킬레 마라모티(Achille Maramotti)와 협업 시작.

    1978년 본인 소유의 회사 ‘SOCIETE JEAN-CHARLES de CASTELBAJAC SARL’ 설립.

    1993년 앙드레 쿠레주(Andre Courreges)의 1994 SS 시즌 컬렉션을 공동 작업해 주목받음. UNICEF 인형 의상을 디자인.

    1994년 프랑스 예술 문화 훈장 수여로 작위를 받음.

    2006년 일본 고베 이진칸 지역에 단독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

    런던 콘딧(Conduit) 거리에 플래그십 숍 오픈.

    2009년 파리에서 개최된 MAISON & OBJET에 작품 전시. 런던에서 ‘JEAN-CHARLES de CASTELBAJAC TAKES’ 전시회 개최.

    아이디어와 재능은 환경과 상관없다 6개의 촛불을 들고 등장했다. 꽤나 드라마틱하다. 어떤 의도인가. 한 가지 행동은 그 행동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아름다움과 연결돼 있다. 난 오토바이를 즐기는데 선조들이 말을 타고 전쟁터에 나서듯 용사가 된 기분으로 타고 나선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행동에는 용감함이 묻어난다. 그런 작은 순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이라도 그걸 신선한 순간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기 이렇게 여섯 명(여섯 개의 초)의 친구들과 함께 등장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이 중요하다? 그렇지. 거대한 디지털 세계에선 복잡한 구조를 추구하는데, 덕분에 이렇게 작지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간단한 것들을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초를 들었다. 아, 사족하나. 18세기에는 여성들이 오로지 촛불에만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조명발이 없었다. 당연히 지금보다 예쁠 수도 없었고.(웃음)

    당신의 작업은 파격이란 단어를 동반한다. 언제부터 그런 상상이 시작된 건가. 음… 처음부터 다른 걸 추구했다. 기숙학교에 있을 때부터 상상력을 발휘했지. 머릿속에 작은 회사 하나를 차렸다. 생각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회사였는데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아이디어나 재능을 표현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여자 하나 없는 기숙학교에 오래도록 갇혀있던 고통,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기숙학교에 갇혀있던 고통,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억울함…. 그래서 기숙학교에 있는 동안 그 모든 걸 표현하기 위해 다재다능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재다능? 구체적으로 어떤 재능인가. 그곳에서 작은 와인의 코르크 마개, 성냥 케이스 하나도 보물이 될 수 있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곳을 나와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졌다.

    디자이너가 된 계기가 궁금하다. 기숙사에서 나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직업을 찾았다.(웃음) 할머니가 방직공장을 운영했고 어머니가 디자이너셨다. 어머니가 그러셨지. 용돈을 줄 테니 디자인을 해보라고. 자연스럽게 입문했고 그때부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머리에 상상력과 창의성 두 단어를 새겨라 어린 시절이 평범하지 않은데,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장난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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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것인데(새총을 꺼내 들며), 간단해서 굉장히 좋아했다. 무엇보다 기술력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게 좋았고 덕분에 창의성을 끌어낼 수 있어서 좋았다. 어떤 일을 하건, 특히 디자이너라면 이 두 가지 단어를 머리에 새겨야 한다. 상상력과 창의성. 기술력이 떨어진다고 혹은 아직 그러한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건 ‘유행을 타지 않는 영속적인 옷’을 지향하는 당신의 디자인 모토와 맞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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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 있는 재킷을 집으며)이 재킷은 1969년에 만들었다. 기숙학교에서 집에 올 때마다 탔던 기차가 있는데 그 기차 안에 이불을 담던 가방이 이 재킷의 재료다. 그때 하나 슬쩍했지.(웃음)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재킷도 바로 이러한 형태다. 난 20년 동안 이 형태를 고수하고 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편안함을 생각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한국의 디자인은 어떠한가. (어린이용 한복을 짚어들며) 이건 한국 시장에 갔다가 지름신이 발동해서 산 것인데.(웃음) 허리 라인도 그렇지만 색의 조합이 굉장하다. 가슴부분에 놓인 수도 한없이 아름답다. 한복을 다루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만났는데 재능이 굉장하다. 오늘날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의 과제는 이러한 전통을 이해하고 현대에 접목해 새로운 의상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상상력과 창의성? 너무 뜬구름 잡는 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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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가.(웃음) 기숙학교에 다닐 때 야구팀이 있었는데 난 디자이너가 되고나서 그때 봤던 글러브를 떠올렸다. 내 첫 가죽옷의 영감은 글러브다. 상상력과 창의성은 그런 관찰에서 나온다. 지나치며 그저 보기만 하는 걸로 만족해선 안 된다. 좀 더 유심히 관찰할 줄 알아야 무엇이든 눈에 들어온다. 21세기 예술은 서로 경계가 모호해졌다고 하던데. 그렇지. 오늘날 디자인의 영감은 미술에서 온다. 그만큼 내 젊은 시절에 쌓여있던 장르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미술과 의상 디자인, 음악과 미술이 모두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바스키아의 작품 한 점이 200만달러인 시대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바스키아의 작품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가리키며) 그런데 그 작품을 단돈 20유로에 편의점에서 살 수 있다.(웃음)

    그렇다면 경계가 모호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오늘날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늘 창조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확실한 건 단 한 가지뿐이다. 창조해야 한다는 것.

    지난해 한국의 EXR과 손을 잡았다. 예술가가 되고 싶어 실험적인 옷을 만들었고 대중성 사이를 줄타기해왔다. 이젠 내 예술적 기질을 제대로 팔아줄 파트너가 필요하다. EXR에 늘 감사하고 있다.(웃음)

    까스텔바작 ·까스텔바작 리니에(Castelbajac Lign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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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SS시즌에 새롭게 론칭된 까스텔바작 리니에는 ‘대를 잇다’는 의미의 프랑스어로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과 그의 아들 루이마리의 합작 디자인 프로젝트다. 럭셔리 트래디셔널 캐주얼로 ‘기사도정신+펜싱’을 모티브로 한 젊은 감성의 프레피 룩이다. ·까스텔바작 르싹(Castelbajac Le Sac) 새롭게 선보인 핸드백, 주얼리 라인. 첫 컬렉션의 콘셉트는 ‘City Traveler’다. 남녀노소 구분을 두지 않고 현대적인 메트로폴리탄의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디자인됐다. 클래식하고 모던한 실용적 구조에 프랑스 명품 디자이너의 섬세한 디테일을 가미한 ‘Long Run Bag’을 지향한다.

    ·까스텔바작 골프(Castelbajac Golf) 여유를 표현한 고감도 감성의 스포츠 캐릭터 캐주얼이다.

    1996년 국내에 소개됐다. 기존 골프웨어의 한계성을 벗어나 일상생활의 여유를 표현한 고감도 감성의 스포츠 캐릭터 캐주얼이다.

    ·까스텔바작 JCC(Castelbajac JCC) 클래식한 디자인에 좀 더 집중하는 프리미엄 라인이다. 케이티 페리나, 레이디 가가 등 젊은 뮤지션과 팬들이 열광하는 대중성, 예술성이 접목됐다. 국내에 직수입되는 까스텔바작 JCC는 단순한 파격보다 인공적이고 변형적인 요소의 수용을 통해 패션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1호(2012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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