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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or] 국내 최고의 번역가 `정영목` 이화여대 교수…단어 하나 찾으려 며칠씩 몸살 치르죠
입력 : 2012.02.29 11: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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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정 교수는 알랭 드 보통의 책은 신작은 아니라면서 프로이트Ⅰ·Ⅱ권 및 퍼거스 플레밍과 애너벨 메룰로 공저 ‘탐험가의 눈’,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 등을 최근 번역했다며 근황을 소개했다. 그 중 먼저 프로이트부터 설명했다.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Ⅰ·Ⅱ권(교양인)이 최근 나왔다. 이 책은 프로이트 전기의 결정판이다. 나는 정신분석 전문가는 아니니 잘은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노출하지 않으려고 자료를 태운 프로이트의 전기란 점이다. 프로이트는 몇 번에 걸쳐 자신의 편지나 원고 초고 등을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프로이트에 대한 칭찬으로 이유를 덧붙였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대부분 자신의 꿈을 해석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기를 객관화하고 분석해 자기개선을 함으로써 학문을 개척했다. 개인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태운 것도 더 드러낼 게 없을 만큼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많이 까밝혔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 교수는 특히 프로이트를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기를 객관화해 분석한 것도 대단하지만 남들이 주시하는 유대인인데도 사회의 통념을 깨고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어 극한에 도전하는 탐험가들의 1차 기록을 발굴해 저술한 ‘탐험가의 눈’에 대해선 공교롭게도 이 책이 박영석 씨가 작고할 무렵 출간됐다며 뒷이야기를 밝혔다.
최근 나온 재미있는 책으로 그는 20세기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를 들었다.
“이 책은 내가 태어나던 해인 1960년에 나왔는데 지금 봐도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변함없이 젊은 느낌을 주고 있다. 번역가 입장에선 상당히 어려운 책이기도 했다. 줄거리는 통속적인 내용인데, 오페라가 줄거리는 통속적이라도 음악이 받쳐줘 예술이 되는 것처럼 이 책 역시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통속적 이야기가 문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너무 잘 썼다. 그래서 번역하기가 쉽지 않았다.”
존 업다이크의 토끼 시리즈는 ‘달려라 토끼’와 ‘돌아온 토끼’ ‘토끼 잠들다’ 등 4부작으로 된 소설인데 이번에 1부를 냈고 2부 ‘토끼 잠들다’를 번역 중이며 3, 4부는 다른 사람이 번역할 예정이라고 했다.
정 교수는 그와 상대되는 인물인 필립 로스로 설명을 이어갔다.
“존 업다이크가 (앵글로 색슨이 주도하는) 미국 사회의 주류였다면 상대되는 인물은 유대인인 필립 로스일 것이다. 코맥 매카시와 함께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그는 (소수민족으로서) 옆에서 본 사람의 시각으로 책을 썼다. ‘에브리맨’과 ‘울분’을 번역했고 앞으로 몇 권을 더 할 것이다. 필립 로스는 글쓰기에 아주 엄격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 보석상이었는데 형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등을 담았다.”
이야기는 ‘로드’의 저자 코맥 매카시로 이어졌다. 정 교수는 매카시의 다른 책을 번역하는 중이라고 했다.
“매카시의 ‘더 선셋 리미티드(The Sunset Limited)’는 미니멀리즘의 대표작이다. 그는 이 글을 희곡처럼 대화체로 썼다.(실제 The Sunset Limited는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으나 미국에서도 희곡보다는 드라마 형식의 소설이란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 외에 헤밍웨이 단편을 작업 중이다. 헤밍웨이는 최근 저작권에서 해제돼 새로 번역이 시작됐다.”
그는 매카시와 헤밍웨이가 비슷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문체도 비슷하다. 생략을 통해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게 많다는 게 그렇다. 매카시는 말없음을 통해 표현한 것이 많다. 터프한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도 같다. 두 사람의 작품에선 송어낚시나 황량함 등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유년기 자연 속에서 송어낚시를 한 향수를 담고 있다.”
번역은 아직도 어려운 작업
20년 이상 번역을 했으니 쉬워질 때도 됐을 법한데 또 다른 이유로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고수라고 하니 출판사들이 어려운 책들을 들고 찾는다는 것.그래서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책들을 포함해 연간 4~5권 정도를 꾸준히 번역한다. 대학 다닐 때부터 번역 일을 했으니 얼마나 많은 책을 옮겼을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여러 곳에서 몇 권이나 번역했냐고 묻는데 나도 정확히 모른다. 100권은 이미 넘었고 200권은 아직 안됐고…. 양이 문제가 아니라 책의 난이도가 다르다. 문학과 인문학 범주의 책 번역을 계속 해왔는데 앞으로도 이 부분 번역을 계속할 것이다.”
좀 어렵더라도 그가 번역한 책들엔 많은 독자들이 빠져든다. 베스트셀러도 수두룩하게 냈다. 그래서 출판업계에서 그는 웬만한 작가보다 더 유명하다. 그렇다면 그 역시 번역하면서 같은 재미를 느꼈을까.
“‘기술적인 일’이라 재미고 뭐고 없이 빠져든다. 하는 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데 뒷맛은 각각 다르다. 남이 재미있어 하는 것도 나에겐 다르게 다가온다.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이고 도전이고 과제다.”
북한산을 자주 찾는 등산 마니아인 그는 등산에 비유해 이를 설명했다.
“산에 오를 때는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땀을 흘리고 헉헉거리며 올라간다. 산에 올라가서야 이곳저곳 돌아보며 참 좋다고 하는데 번역도 끝나고 나면 참 좋다는 것을 느끼지만 번역하는 중엔 얘기가 다르다. 그게 삶이기도 하다.”
번역한 책 가운데 재미있는 책을 꼽으라고 하자 그는 프로이트를 들었다.
“프로이트는 뒷맛이 좋다. 하는 동안엔 일이지만…. 가치 있는 책을 선택해서 하는 것이라 의미가 있다. 어려운 책은 많이 팔리지는 않으나 (저자가) 힘들게 쓰고 (번역자가) 힘들게 번역하고, 또 출판사도 큰 맘 먹고 낸다. 경제적으로 이익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사회라면 그런 게 대접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번역·출판을) 공적으로 받쳐줘야 한다. 소비에만 맡겨선 안된다. 잘 된 사회라면 당장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도 존중하고 관심을 갖고 지원해야 한다.”
그는 언젠가 그런 게 받아들여질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다.
“(지금도) 소설은 무게가 있는 것도 받아들여지지만 인문학 쪽은 아직 어렵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부활할 것이다. 어려울수록 바탕을 본다. 시간이 지나면 더 깊은 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FTA 번역 오류는 너무 서두른 탓 그에게 최근 불거진 한·미 FTA 번역 오류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국익이 걸린 번역이니 찬반을 떠나서 차근차근 했어야 했다. 너무 서둔 감이 있다. (그런 것은) 우리 언어로 완결된 것을 갖고 있어야 했다.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다. 단어 선택도 중요하다. 개념 하나하나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종교적으로 해석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게 번역이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 번역할 때 ‘종교적 이해와 신념에 따라서 해석했다’고 한다. ‘오로지’라는 단어가 원문에는 없었지만 그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라는 식으로 그것을 읽어냈다.”
그러면서 (번역은) ‘곳곳에 지뢰밭’이라며 자신의 실수담도 들려줬다. “아주 오래전 ‘LA레이커스’를 야구팀이라고 번역한 적이 있다.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레이커스가 어떤 팀인 줄도 몰랐다. 나중에 어느 스포츠 기자가 지적하더라.”
그 역시 문제는 시간이라고 했다.
“번역하다 보면 늘 쫓긴다. 계약기간 내에 책을 내야 하니 늘 어렵다. 아무리 봐도 또 고칠 게 나오는데 그만큼 부족하다. 그렇지만 어디에선가 타협을 해야 한다.”
다만 ‘잘못된 경우’는 언제라도 고쳐야 한다며 지금은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늘 어딘가 그런 부분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빤한 오역도 있고 미흡한 부분도 있다. 영어책과 우리 책의 느낌이 차이가 난다면 그 부분은 잘못된 것이다. ‘편집자’가 (교정을) 보아도 늘 오탈자가 나오는 것처럼 번역도 항상 그럴 가능성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미흡함이다.”
와인과 관련해 산초를 감초라고 오역한 게 많다고 하자 그는 “동식물 번역은 특히 어렵다”고 맞장구를 쳤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음식이나 동식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나 의미를 전달하기가 어렵다. 헤밍웨이나 매카시의 ‘송어’가 그렇다. 그들에겐 ‘송어’라면 확 뒤집어지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 느낌을 살려내기가 어렵다. 와인에서 ‘드라이’하다고 하는데 그것을 또 어떻게 번역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번역의 꽃은 단어번역이라고 하지만 개념을 응축해서 표현하는 것은 난해한 과제”라고 밝혔다.
“(나는) 저자의 단어 선택을 존중한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말로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 거기엔 ‘온도’가 있다. 단어 막히는 것을 늘 달고 살아야 하는 업이다. 운이 좋으면 바로 떠오르기도 하고 한두 시간 뒤 떠오르기도 하지만 며칠 뒤에도 떠오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게 사실 이 직업의 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최근 고민하는 단어를 하나 사례로 들었다.
“숲이 ‘perfectly quiet’하다고 하는데 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완벽하게 고요하다’라고 하면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나. 만족하지 못해서 이틀째 고민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잘된 번역은 무엇일까.
“경제서적이라도 좋은 번역이라면 쓴 사람의 냄새가 나야 한다. 그 냄새까지 전해줘야 읽는 사람도 좋아한다. 쓴 사람의 체취를 전해주는 일은 사전만으로는 안된다. 피하라는 게 아니라 글을 문맥에서 제대로 다뤄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또 기준도 높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번역을 발전시킨다는 것.
이런 이유에서 좋은 번역엔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이쪽에선 그걸 돈으로 환산하는 경우도 드물다. 다만 (잘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보람이다.”
번역료 역시 최고 대접을 받는 그조차도 아직은 만족할 수준이 아니라고 했다.
“만족하지 못한다. 다만 (내가) 어떤 인더스트리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거기에 맞춰 산다. 이 산업의 위치를 알기에 인정하는 것이다. 출판 자체가 기준은 높고 진입은 어렵고 그러면서도 보수는 적고…. 군대에서 줄을 잘못 섰다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번역에 대한 공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번역을 지원하는 것은 미술관 지원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대우학술총서가 좋은 예인데 당장 눈앞에 부를 불려주지는 못하더라도 공적 지원이 돼야 한다. 아울러 출판사업 자체가 소중하게 여겨져야 한다. 출판업계도 나무 한 그루라도 아깝지 않을 만큼 좋은 책을 내야 한다.”
좋은 번역가는 겸손해야
“소설 쓰는 것은 다른 영역이다. 우리는 배우처럼 (각본에 따르듯) 한다. 창작하면 번역해선 안된다. 이것은 빠지기 쉬운 덫이다.”
[정진건 기자 borane@mk.co.kr / 사진 =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8호(2012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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