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chitect] 이타미 준의 딸, 건축가 유이화

    입력 : 2011.11.28 16:3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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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한국이 낳은 세계적 건축가 이타미 준(伊丹潤·본명 유동룡)이 영구 귀국했다. 고국에 묻히기 위해서다. 그런데 몸만 돌아온 게 아니다.그의 건축 사상, 철학도 함께 돌아왔다. 그것을 지금 딸 유이화 씨(ITM유이화건축사무소 대표)가 잇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건축현장을 누비며 아버지의 열정과 정신을 고스란히 받은 유 대표는 어떻게 그의 철학과 정신을 계승할까. 1988년 그의 아버지가 마련한 아틀리에 부지에 2007년에 그가 아버지가 함께 다시 지었다는 방배동 사무실은 고도제한구역에 있어 2층에 불과하고 넓지 않은 대지에 건폐율까지 맞추다보니 인근 단독주택보다도 작아 보였다. 게다가 상자 같은 건물의 외벽도 약간 바랜 흰색이라 두드러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안의 느낌은 전혀 달랐다. 2층 유 대표의 방에선 시선이 바로 우면산 자락으로 연결돼 사무실은 자연의 한 부분이 된다. 쇄석을 깐 옥상에 서면 우면산과 관악선이 좌우로 보여 그 사이를 흐르는 시내의 자갈밭에 있는 것 같다. 지하는 전체 대지를 최대한 활용해 제법 넓은데다 햇빛까지 적당히 들어와 쓰임새가 보통이 아니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이타미 준의 건축 경남 거창 출신인 유 대표의 할아버지가 일본에 정착하면서 그의 아버지는 자연히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활동하게 됐다. 유 대표는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처럼 불리는 ‘이타미 준’은 이름이 아닌 예명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처음 (일본에서) 해외로 나간 공항이 오사카 이타미 공항이었다. 그래서 이타미를 성처럼 썼고, 친구인 길옥윤 씨가 일본에서 요시다 준으로 활동했기에 자신도 “그럼 나도 준이다”라고 해 이타미 준이란 예명을 쓰게 됐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란 긍지가 강해 평생을 한국인 유동룡으로 사셨고, 한국 여권을 가지고 다니셨다.”

    일본 무사시(武藏)공대(현 도쿄도시대학) 건축과를 나온 이타미 준은 1968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뒤 한국 고건축에 매료돼 평생 자연미를 살린 건축을 추구했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책들을 냈으며 열정적으로 한국 고미술품 수집에 나섰다.

    그의 건축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로 유명한데 제주 핀크스 리조트의 포도호텔이나 물·바람·돌 미술관, 두손미술관, 비오토피아 타운하우스, 방주교회 등은 그의 건축 철학을 보여준다.

    유 대표는 “아버지는 감동을 주는 건축을 지향했다”고 설명한다.

    “건축가는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논리적 이성적으로, 또 다른 부류는 감성적으로 접근한다. 아버지는 후자다. 시를 쓰고 글을 쓰면서 마음으로 건축을 했다. 건축주에게도 그렇게 대했고 감동을 주는 건축을 추구했다. 주택이라면 들어와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건축을 대지의 콘텍스트(Context)를 추출해 건축가의 사상을 입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빛이 나야 하고 따뜻한 손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 철학은 세계에 알려졌다. 2003년 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이타미 준은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인 슈발리에상을 수상했고 일본에선 무라노고도상을 수상했으며 국내에선 김수근 문화상을 수상했다.

    딸을 건축가로 이끈 아버지의 열정 일본에서 태어난 유 대표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귀국해 외가에서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가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교육 받고 한국 대학엘 가야 한다며 보냈다”고 한다.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한 그의 아버지는 한 달에 3~4일 정도 한국을 방문하다 나중엔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건축을 했다. 유 대표는 한국말이 서툰 아버지의 통역을 위해 중고교 때는 물론이고 초등학교 때에도 현장에 다녔다고 회상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현장을 다녔는데 특히 현장에 섰을 때 행복감을 느껴 건축을 하게 됐다. 아버지가 열정적으로 하는 것을 보고 나도 열정적으로 할 직업을 갖고 싶었다.”

    그렇지만 한국 실정을 잘 아는 그의 아버지는 여자가 하기엔 쉽지 않다며 처음엔 딸이 건축을 하는 것을 반대했다.

    “대학에선 실내디자인을 전공했다. 아버지는 졸업 후에도 건축을 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워낙 좋아한 일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집을 나가듯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건축을 전공한 유 대표는 뉴욕의 건축사무소에서 5년여를 일했다.

    “처음엔 서양 건축이 멋진 것 같아 뉴욕에 머물렀으나 차츰 동양 건축이 낫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러던 차 9.11테러가 발생하자 아버지가 위험한 곳에 머물지 말고 귀국하라고 했다.”

    2001년 돌아온 그는 아버지의 프랑스 개인전 준비를 도우며 ITM건축연구소 한국지사를 운영했다. 그가 독자적으로 건축사무소를 운영한 게 벌써 10년이 된 셈이다. 2004년 무렵엔 직원이 25명이나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타미 준의 후계자 유이화
    서울 종로구 평창동 Oboe hills -SATO shinichi
    서울 종로구 평창동 Oboe hills -SATO shinichi
    어려서 아버지의 열정을 배웠다면 2001년 이후 유 대표는 아버지의 철학을 배웠다. 그것은 설계기법 같은 게 아니라 ‘사상적인 것’이라고 했다. “건축은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다만 가슴으로 하라고 하셨다. 온 열정을 바치지 않을 것이라면 아예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프로젝트만 한다. 워낙 책임이 막중한 일이니….”

    이타미 준은 딸에게 컴퓨터를 버리고 손으로 그리라고 했다.

    “뉴욕에서 CAD를 배웠다. 그런데 아버지는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2001년 귀국한 뒤 손으로만 하고 있다. 스태프들은 CAD를 쓰지만….”

    그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버지는 그래야 건축가가 고민한 흔적이 묻어난다고 했다. 컴퓨터는 현장 없이도 할 수 있기에 현장을 다 반영하지 못한다. 그러나 손으로 하다보면 현장의 미묘한 차이를 가감할 수 있다. 이게 컴퓨터와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설계도면을 납품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했다.

    “도면납품 후에도 현장을 보고 가감을 계속한다. 플러스알파의 작업이다. 우리는 건축주가 관리까지 맡기지 않으면 설계를 맡지 않는다. 미묘한 차이를 반영하기 위해서다. 법정 감리가 아닌 디자인 감리라고나 할까.”

    그는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 따뜻한 건축을 추구할 것이라고 했다.

    “자연 소재로부터 나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나무나 돌 등 같이 늙어가는 것들은 눈에 잘 띄고 손에 닿기 쉽게 배치한다. 자연을 최대한 살리는 아버지의 건축 정신은 계속 이어갈 것이다. 건축가로서 아버지를 진정으로 존경했기에 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마무리 지어야 할 유작들
    서울 용산구 한남동 b shop -Jung Taeho / 서울 신사동 PODO PLAZA
    서울 용산구 한남동 b shop -Jung Taeho / 서울 신사동 PODO PLAZA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게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다고 했다. “2010년 말에 위암 선고를 받았고 올 4월 위절제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어서 기력을 회복하면 여행도 가고 이것저것 하자고 했는데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믿기지가 않는다. 회복되던 중에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일본에서 혼자 계실 때 쓰러지셔서 응급조치가 늦었다.”

    갑자기 홀로서기를 하게 된 그의 기분은 어떨까.

    “심각하게 생각을 해봤다. 아버지도 육십 넘고 칠십 넘어서야 건축을 알 것 같다고 했는데, 나만의 건축, 나만의 사상을 갖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설렁설렁 넘어갈 수 없는 직업이기에 정신 차려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보게 되더라.”

    유 대표는 당분간 아버지의 유작을 완성하는데 주력할 생각이다.

    “일본 프로젝트는 초기 단계에 있던 것이라 스톱시키고 한국 프로젝트에 올인하고 있다. 유작을 잘 마무리 짓는 게 지금 할 일이다.”

    유 대표 방엔 이타미 준이 작고하기 닷새 전에 그린 아일랜드리조트의 성극장 스케치가 놓여있다. 그게 마지막 작품이다. 그의 유작 가운데 제주영어교육도시는 작고 후 한 달 만에 완공됐다. 현재 시공 중인 서원밸리 클럽하우스와 아일랜드리조트의 클럽하우스와 빌리지, 성극장, 교회 등이 유 대표가 완성해야 할 일들이다.

    게다가 서울에 11명, 일본에 6명이 있는 ITM건축연구소도 이끌어야 한다. 유 대표는 아버지가 그랬듯이 한 달의 반은 일본에서 활동한다. 한동안 하던 강의는 모두 끊고 지금은 건축 일에만 주력하고 있다고 했다.‘여자가 건축사무소를 꾸려가는 게 대단하다’고 하자 그는 “희소가치가 있죠”라며 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러면서 현재 건축과 학생의 절반이 여학생인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여성 건축사사무소는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거친 건설현장의 남성들을 상대하는 게 걱정이 됐다.

    그런데 그는 “남자들이 거꾸로 더 말을 잘 듣는다”며 밝게 웃었다. 영업에 대해서는 “영업하러 다닌 적은 없다. 건축주들이 해놓은 것을 보고 찾아와서 맡긴다. 현재에 충실하는 게 곧 영업이다. 영업은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건축에 대한 생각은 자연을 최대한 살린 건축,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건축을 추구한 이타미 준의 정신을 계승한 유 대표가 보는 한국의 건축물은 어떨까.

    “한마디로 과도기인 것 같다. 외국 것 카피한 게 많고 서로 튀려고 아크로바트를 해 조화를 모른다. 쓴 것 단 것 다 먹고 난 뒤 자기 맛을 찾을 것이다.”

    불쾌감을 주는 건축물로 그는 강남의 한 건물을 예로 들면서 “건축물은 공공재다. 땅은 개인 소유지만 건축물은 누구나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화가 날 만큼 시각적 폭력을 가할 수도 있다. 건축주는 책임이 있어야 한다. 사람의 눈이 편하게 향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괜찮은 건축주로 아일랜드CC와 서울 적선동 고도빌딩의 오너를 예로 들었다.“아일랜드CC에선 오너와 직접 교감하면서 조율하고 서로가 만족하는 프로세스를 이어가고 있다. 적선동 1번지 고도빌딩 건축주는 경복궁을 끼고 청와대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수시로 외국 귀빈들이 드나드는 자리라서 겁이 나 마음대로 짓지 못하겠다며 일을 맡겼다. 그는 ‘최악의 건물이라면 공원이 낫다. 최대한 경복궁과 조화를 이루도록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건축주는 그런 사회적 의식을 갖고 건물을 지어야 한다.”

    구상 중인 이타미 준 박물관
    이타미 준이 설계한 방주교회(제주도 서귀포시 소재) -SATO shinichi
    이타미 준이 설계한 방주교회(제주도 서귀포시 소재) -SATO shinichi
    이타미 준은 생전에 일본에서 작은 박물관 하나를 차릴 정도의 골동품을 모았다. 그 중엔 국보급 불상이나 달항아리 등도 있다. “아버지는 평생 일본에서 골동품을 모았다. 그림 서화 골동품 등이 1200여 점에 달한다. 민화와 도자기 불상 등이 특히 많은데 건축가의 눈으로 컬렉션 한 것이란 특색이 있다.”

    몇몇 금동관음불상이나 석불 도자기 등은 대충 보더라도 예사 보물은 아닌 듯했다.“생전에 그것으로 박물관을 만들자고 해서 리스트를 만들던 중 돌아가셨다. 내가 마무리를 해야 한다. 우선 문화재단을 만들고 이곳 1·2층을 기념실로 세팅할 생각이다.

    그러나 개인이 하는 박물관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공공박물관에 보관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박물관은 작더라도 제주도에 짓고 싶다. 아버지 작품이 많은 곳이고 오래 활동하신 곳이라서 그렇다.”

    ■ 건축가 유이화는
    사진설명
    현 ITM유이화건축연구소 대표. 이화여대에서 실내환경디자인을 전공했고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건축학과를 나왔다. SK 기흥아펠바움과 양지 발트하우스, 신사동 포도플라자 등이 그의 작품이다. 그의 한남동 카페 비숍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의 컨셉트를 살리고 주위와 교감하는 건축을 추구한다. 인테리어와 소품까지 함께 하는데 건축 프로젝트에 어울리는 가구와 조명 등을 직접 디자인해 납품한다. 2006년 결혼했고 패션디자이너인 남편과의 사이에 다섯 살 난 딸이 있다. [정진건 기자 borane@mk.co.kr│사진 =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5호(2011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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