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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Banker] 금융 4대 천황 해부
입력 : 2011.09.28 16: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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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
“취임할 때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고 욕을 많이 먹었다. 그런데 내가 실력으로 부족한 게 뭐가 있느냐. 내가 못난 고려대를 나와서 문제가 되는 것이냐.”
어 회장은 이 발언을 시작으로 당초 10분 정도로 예정됐던 인사말을 한 시간 가까이 했다. 이에 따라 예정됐던 질의응답은 거의 하지 못했고 오후 1시쯤 끝내려던 행사는 오후 2시가 다 돼서야 끝났다.
당시 어 회장의 돌출 행동은 금융권에서 큰 화제였다. 특히 고려대 총장까지 지낸 사람이 본인 출신 학교를 비하한 데 대해 뒷말이 무성했다. 금융권은 이를 두고 ‘4대 천황’이라 불리는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겠냐고 분석했다.
가히 4대 천황의 시대다. 4대 천황은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을 일컫는 말이다. 모두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이란 공통점이 있다. 이 가운데 어윤대 회장, 이팔성 회장, 김승유 회장은 고려대를 나왔다는 공통점까지 있다. 한국 금융 역사에서 이처럼 대통령의 최측근들이 금융지주 최고 수장을 동시에 장악한 일은 없었다. 특히 특정 학교 출신으로 줄줄이 채워진 적도 없었다.
이에 대해 금융권은 예전과 달리 금융지주 회장의 위상이 대폭 올라갔기 때문으로 본다. 예전 금융기관 수장은 재무부 과장, 심지어 사무관 앞에서도 쩔쩔 맸다. 하지만 경제 중심축이 민간으로 넘어오면서 금융기관 수장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기획재정부 장관을 맡았던 강만수 회장이 산은금융지주를 이끌고 있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산은 회장(옛 산업은행장)은 원래 재무부 차관이 갈 곳이 없어 밀려나던 자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대통령의 경제교사이자 최고 서열의 장관을 지낸 인물이 이끌고 있다. 어윤대 회장도 한국은행 총재,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등의 자리에 거론되다 KB금융 회장이 됐다.
4대 천황의 위세는 대단하다. 일반 경제 관료는 물론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도 이들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금융당국이 정책을 펴려면 이들의 눈치부터 봐야 한다. 4대 천황. 그들은 누구일까.
소탈하면서도 다혈질…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기획재정부 장관시절 판교지역 건설현장을 방문해 현장소장 등 공사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재무부 관료로 있으면서 금융·세제 전문가로 불렸고 구체적인 수치를 그대로 외울 정도로 머리가 좋다는 평을 들었다. 또 외환위기가 발발할 때부터 수습 과정까지 모두 지켜보고 관리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후 강 회장은 오랫동안 야인으로 지냈다. 이에 마지막 직함인 ‘강만수 차관’으로 흔히 불렸다.
하지만 이것이 득이 됐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소망교회에 나가는 것을 낙으로 삼다 이명박 대통령과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이다.
강 회장은 교회에서 매주 이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경제철학을 설파했고 이것이 이 대통령을 매료시켰다. 강 회장이 이 대통령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1년께부터지만 야인 생활을 하면서 보다 가까워졌다. 결국 강 회장은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인 2005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으로 복귀했다. 이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거쳐 2008년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화려하게 재등장했다. 차관이 된지 11년만에 드디어 장관의 꿈을 이룬 것이다. 강 회장은 이 대통령 대선 레이스 기간 ‘747’ 등 주요 경제 공약을 창조하는 등 경제 부분에 있어 이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중간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강 회장의 공직 생활은 전반적으로 화려했다. 하지만 매번 끝이 좋지 못했다. 차관 시절엔 외환위기를 겪었고 장관 시절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에 처음 장관을 할 때 세간의 예상과 달리 1년밖에 장관을 지내지 못했다.
장관 시절 강 회장은 금융위기에도 고환율 정책을 펴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바 있다. 강 회장은 환율이 높아야 수출이 잘돼 경제도 성장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강 회장은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금융위기 기간 환율 급등에 따른 국가 부도 위기설의 배경 중 하나로 지적되면서 장관 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비교적 짧은 장관 생활을 마친 강 회장은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과 대통령실 경제특별보좌관을 거쳐 올해 3월 산은금융지주 회장이 됐다. 당시 강 회장이 어떤 곳을 맡을지 금융권에선 큰 이슈가 됐다. 내분 사태로 공석이었던 신한금융지주를 비롯해 현 회장들을 밀어내고 우리 또는 하나금융지주 회장으로 갈 수 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하지만 대통령 측근이 무리까지 하면서 금융지주 회장을 맡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다수 제기되면서 강 회장은 결국 국책은행인 산은 회장을 선택했다. 산은 회장은 민간금융지주 회장과 비교해 연봉이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며 할 수 있는 일도 제한적이다. 전체 은행 규모나 영역 모두 작은 편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강 회장은 산은을 확장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 당초 우리금융지주와 합병을 추진했지만 ‘대통령 측근이 힘으로 밀어붙여 대형 은행을 탄생시키려 한다’는 여론에 밀려 무산됐다. 이에 대해 강 회장의 추천을 통해 복귀한 것으로 알려진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후선에서 많은 지원을 했지만 여론 앞에 백기를 들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강 회장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금융지주 인수 무산에도 다른 경로로 은행 확대를 지속적으로 모색 중이다.
강 회장은 자신의 신조로 ‘믿음, 사망, 사랑’을 얘기할 만큼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소망교회에서는 금융권 인사들이 따로 모여 만든 ‘소금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평소 녹차를 즐겨 마시며 서예를 좋아한다. 글 쓰는 것을 즐겨 신문에 좋은 칼럼을 쓰기 위해 논술 과외를 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스스로 청설(聽雪)이란 호를 갖고 있다. 눈 내리는 소리까지 듣는다는 뜻이다. 세심하게 모든 면을 살피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강 회장은 사석에서 문학적 표현을 즐기는 ‘문학청년’으로 알려져 있다. 야인 시절이던 1999년 '시조문학' 겨울호를 통해 문단에 등단했을 정도다. 기획재정부 장관을 그만두면서 퇴임사를 발표할 때는 러시아 문호 푸시킨의 시를 인용했다.
“지나간 것은 그리우나 새로운 내일을 위해 가는 것이라는 말도 있듯 아쉬워하진 않겠다.”
좋아하는 가수는 조용필이다. 금융위기가 절정일 때 퇴임 논란이 불거나오자 직원들 앞에서 조용필의 '허공'을 열창한 일이 있었다. 당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끝까지 참고 견뎌라. 그러면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란 시 구절을 읊었다는 얘기도 있다.
강 장관의 취미가 정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운동도 좋아한다. 살을 빼기 위해 서울시정개발원장 시절 배운 인라인스케이트 실력은 수준급이다. 또 신세대 공무원에 뒤지지 않는 컴퓨터 문서 조작 능력을 갖고 있다. 특히 파워포인트와 엑셀 프로그램을 잘 다뤄 중요한 보고서는 본인이 직접 작성하거나 수정한다. 가방을 손수 들고 운전도 자주 직접 하는 등 소탈한 면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본인에게 불리한 기사가 나오면 불같이 화를 내며 바로 담당 기자나 데스크에 전화하는 다혈질 성격도 갖고 있다.
강한 승부욕과 추진력…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40여 개가 넘는 다양한 이력을 자랑하는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고려대 경영대를 졸업하고 필리핀으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2년간 미국국제개발처(USAID) 경영감사관을 맡은 게 이력의 시작이다. 이후 석·박사 과정을 마친 뒤 박사학위를 따자마자 1979년 고려대 경영대 교수가 됐다. 이후 2010년까지 22년간 고려대 경영대 교수로 있으면서 각종 직위를 맡았다. 상근이 필요할 때는 휴직도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 하와이대 객원교수, 재정경제원 금융발전심의위원회 위원, 국제경제학회 감사, 산업은행 비상임이사, 고려대 교무처장, 한국국제경영학회장, 한국은행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 외무부 외교정책자문위원, 한국금융학회장, 고려대 경영대학원장, 국제금융센터 소장, 한국경영학회장, 고려대 총장, 미시간대 한국총동문회장,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 초대 위원장 등 주요 이력을 열거하기가 숨이 찰 정도다.
어 회장은 이 모든 일을 고려대 경영대 교수를 맡으면서 계속했다. 2010년 7월 KB금융지주 회장이 돼서야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어 회장은 평소 승부사 기질이 투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마닐라 아시아경영대학원 캠퍼스에서 팔씨름 대결이 벌어졌을 때 연승하다가 너무 힘을 줘 팔이 부러진 적도 있었다. 당시 어 회장은 왼손잡이인데 왼손으로 하면 게임이 너무 싱겁다는 이유로 오른손으로 팔씨름을 했다. 학창 시절엔 술을 입에도 못 대다 지금은 폭탄주까지 들이킬 수 있는 주량이 된 것도 그의 승부욕에서 기인했다.
어 회장의 추진력은 실제로 남다르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고려대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발전기금 4700억원을 모금했다. 고려대뿐 아니라 한국 대학 역사상 없던 기록이다. 고려대 개교 100주년 기념을 위해 각종 난관을 극복하고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PSV에인트호벤과 고려대 축구팀의 시범경기를 성사시킨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뚝심이 때로는 고집이 강한 사람으로 비치기도 한다. 또 지나치게 이미지를 강조하는 측면도 있다. KB금융지주 회장이 된 후 로고를 변경하고 주요 대학교 앞에 수익이 나지 않는 ‘락스타’ 지점을 개설한 게 과연 잘한 결정이었는지는 계속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뜨거운 업무 수행 열의…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명동에 있는 우리금융프라자를 방문해 일선현장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이팔성 회장.
그리고 나름 성공적인 경영으로 서울시향의 체질을 효율적으로 변화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이 회장은 서울시향 대표로 재직하면서 마에스트로 정명훈 씨와 공연기획 전문가인 마이클 파인 등을 영입해 음악의 질을 제고한 대신 공짜 표를 과감하게 없앴다. 그러자 연간 2만여 명이던 관람객은 16만5000명으로 늘었다. 자체 수입은 2004년 6억7000만원에서 2007년 33억원으로 24배 정도로 증가했다. 유료 관람객 비율은 30%에서 80%로 증가하면서 관련 내용이 미국 콜롬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재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2008년 6월 이 회장은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되면서 꿈에 그리던 목표를 성취했다. 우리금융도 처음으로 내부 출신 회장을 맞았다. 강 회장이나 어 회장과 달리 이 회장은 평소 몸담았던 조직의 최고 수장 자리에 오르는 것이 최고의 꿈이었다. 이에 이 회장의 업무 수행에 대한 열의는 무척 뜨겁다. 이 회장은 1급 바둑 실력을 자랑하며 등산을 즐긴다. 현장에 있을 때는 최고의 영업맨으로 통했다. 국내뿐 아니라 일본 등 해외 지점을 넘나들며 부임하는 지점마다 1등을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6년 이사가 될 때는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붉은 계열의 넥타이를 즐겨 매며 흰머리와 충치 하나 없을 정도로 건강 체질이다.
관습과 틀에 얽매이지 않은 도전정신…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매일경제] 주최 ‘금융경제 세미나’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는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
한국투자금융은 흔히 단자회사로 불리는 단기금융 전문 회사였다. 짧은 만기에 거래가 종료되는 금융상품을 취급하는 회사다. 김 회장은 창립 10년 만인 1980년 부사장이 됐고 외부 투자를 받아 윤병철 전 하나은행장과 함께 1991년 한국투자금융을 하나은행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하나금융=김승유’라는 공식이 만들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하나은행 설립 후 초대 행장은 윤병철 전 행장이 맡았다. 김 회장은 1997년까지 하나은행 전무를 지냈다. 그리고 김 회장은 1997년 은행장이 됐고 2005년 3월까지 행장직을 수행했다. 김 회장의 성공방정식에서 빠지지 않는 변수는 M&A다. 1998년 충청은행, 1999년 보람은행, 2002년 서울은행, 2005년 대한투자증권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오늘의 하나금융 그룹을 만들었다. 이후 시장은 김 회장을 ‘합병의 귀재’로 평가하고 있다.
2005년 3월 행장직을 김종열 현 하나금융지주 사장에게 물려준 김 회장은 하나금융지주가 정식 출범하면서 지주 회장에 올라 지금까지 회장직을 맡아 오고 있다.
김 회장은 평소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몸에 밴 절약 습관도 갖고 있다. 이에 최근까지 가까운 출장길은 이코노미석을 이용했다. 종종 수행원 없이 홀로 출장을 떠나 직원들을 당황시키기도 한다. 김 회장은 또 관습과 짜인 틀에 갇히기를 싫어해 그 흔한 행가나 행훈도 만들지 않았다.
하나은행 창립 30주년에 백남준 씨의 작품을 은행 로비에 설치한 것도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도전을 해온 그의 정신을 배우라는 의도였다고 한다.
김 회장은 또 목표한 일은 거침없이 처리하는 스타일이다. 계속되는 M&A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외환은행 인수 계약에 성공한 뒤 투자자 유치를 위해 12월4일부터 12일까지 뉴욕, 런던, 홍콩을 숨 가쁘게 순회한 것은 그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그는 출장 기간 지구 한 바퀴를 돌면서 비행기 안에서 사흘 밤을 지내는 강행군을 했다. 하지만 피곤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은 채 계속 일 생각만 했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박유연·석민수 /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ecocean@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1호(2011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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