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ull Story] 격랑 속 신한 사태 3인방 풀 스토리
입력 : 2011.01.17 14:12:28
-
바람 앞의 촛불… 금융인생 40년‘금융인생 40년’으로 명예롭게 정리하는 게 나을 뻔했다. 결과적으로 ‘금융지주 사상 최초 4연임 회장’이란 ‘초유의 타이틀’은 구겨져바닥에 떨어졌다. 4연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될 것이 확실시되는 동시에 자신이 키워온 신한금융지주를 자신의 손으로 진흙탕에 밀어 넣었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됐다. 라응찬신한금융지주 회장 얘기다.지난 10월14일 신한금융지주 재일동포 주주들은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 이백순 신한은행장 등 신한 최고경영진 3명의 동반퇴진을 요구했다. 라 회장은 이미 ‘금융실명제 위반’ 혐의로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중징계를 예고 받았다.정부로부터는 물론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생각했던 주주들에게도퇴진 압박을 받고 있으니 사면초가다. “내년 3월 주총 때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신한금융지주의 경영권 공백을 막고 싶다”는 바람이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신세가 됐다.
‘게이트’로까지 비화될 가능성이 보이는 라 회장의 금융실명제 위반과 50억원 스캔들의 전말은 무엇일까.금융실명제 위반 내용은 간단하다. 라 회장이 자신의 돈 50억원을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 이름으로 넣어두었다는 게 골자다.즉 가•차명계좌를 보유하고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라 회장이 가명이나 차명으로 만들어놓은 계좌가 1000개에 달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50억원 스캔들은 이렇게 차명계좌에 넣어져 있는돈이 50억원이라는 것이다. 사실 50억원 스캔들은 이미 지난해 ‘라응찬•박연차 50억원 스캔들’이란 제목으로 공론화된 적이 있다. 지난해 3월 말, 검찰은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2007년 4월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50억원을 전달했다”고 발표했다. 처음에는 부인하던 라 회장은 이후 “돈을 보낸 것은 맞다”고 인정했다. 이와 관련, “가야CC지분을 사달라고 보냈지만 투자하지 않고 고스란히 통장에 넣어뒀다”는 말을 덧붙였다. 정규홀 45홀, 퍼블릭 9홀 등 54홀 규모인가야CC와 가야CC를 운영하는 가야개발이 다시금 관심의 대상이되고 있다. 경남 김해시 삼방동에 위치한 가야개발은 1984년 재일동포 주주 40명이 공동투자 해 설립한 골프장. 이후 부채비율이급등하는 등 경영난에 봉착하고(인수된 해인 2006년 가야개발 부채비율은 600%가 넘었다) 주주들이 연로해지면서 주주 중 상당수가 지분을 처분하고 싶어 했다. 그때 연결된 곳이 바로 같은 재일동포가 주주인 신한금융지주였다.신한금융지주는 신한캐피탈을 통해 가야개발을 인수하기로 결정한다. 신한캐피탈은 총 910억원 규모의 사모펀드(구조조정조합)를 결성했다. 이 돈으로 가야개발 지분 75%를 사들였다. 이때 몇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주가 지분을 넘겼다.신한캐피탈이 사모펀드를 통해 가야개발을 인수한 만큼 현재 가야개발의 경영권은 신한캐피탈에 있다.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
물론 사모펀드 910억원을 신한캐피탈이 홀로 조달한 것은 아니다. 신한캐피탈은 펀드에 104억원을 냈다. 신한은행도 비슷한금액을 냈다. 사모펀드에 가장 많은 돈을 낸 주체는 김해에 위치한 정산CC를 운영하는 정산개발이다. 정산개발은 270억원을 낸것으로 알려졌다. 이 정산개발 소유주가 바로 박연차 회장이다.2006년 신한캐피탈에 인수된 가야개발은 2007년 매출액이 328억원, 순이익은 45억원이다. 2008년에는 333억원 매출액에 순이익 26억원, 지난해에는 334억원 매출액에 순이익 68억원을 기록했다. 나쁘지 않은 실적이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턴어라운드도 아니다. 신한캐피탈이 인수한 시점인 2006년에도 300억원 매출액에 44억원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이와 관련, 신한캐피탈이 사모펀드를 통해 가야개발을 인수한다고 할 때도 의문스레 바라보는 시각이 다수였다. 과도한 부채를 안고 있는 골프장을 굳이 왜 인수하느냐 하는 게 포인트다. 한 CRC전문가는 “910억원을 투자해 연 40억원 수익을 얻는다는 것은 리스크가 큰 사모펀드 투자 대상으로 썩 매력적으로 보이는 내용이아니다.자산재평가 평가익 등 부수적인 내용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재무제표만 놓고 보면 은행 이자 수준 이익도 기대하기 힘든 투자”라고귀띔하기도 했다. 게다가 라 회장과 박 회장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라 회장은 아들만 셋을 뒀다. 이 중 셋째아들 라성현씨가 2004년 1월부터 2년간 태광실업 중국 자회사인 청도태광 간부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금융인생 41년째에 엄청난 폭풍을 맞고 있는 라 회장은 1938년 경상북도 상주 산골짜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셈이 빠르고 똘똘하다는 평판이 자자했지만 가난으로 인해 제대로 공부를 할 수없었다. 상주중학교를 마치고 치기공소에 들어가 조수로 일하며기술도 배우고 돈도 벌었다. 그렇게 한 해를 보냈을 때 중학교 선생님이 라 회장 집을 찾아와 “재능이 아까우니 야간고등학교라도다니라”고 설득했다.선린상고 야간부에 합격한 후 서울로 올라왔다. 신설동 판자촌 쪽방에 기거하며 낮에는 동아통신사 통신문을 배달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그야말로 ‘주경야독’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야간부동기생이 남궁석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다.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은행에 들어갔다. 타고난 수리력과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습득한 성실성은 행원 라응찬을 눈에 띄게 했다. 농업은행에서의 경력은 곧 지금의 라 회장을 만든 기반이다.1968년 함께 있던 간부가 대구은행 상무로 자리를 옮기면서 라 회장을 대구은행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대구은행 입성은 곧 신한은행 입행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됐다.대구은행에서 라 회장은 승승장구했다. 대구은행으로 옮긴 지 7년 만에 비서실장까지 올랐다.
1973년 대구은행장을 수행해 일본에 출장 갔다가 후에 신한은행 설립의 주역이 되는 이희건씨를 만나게 된다. 이날의 만남이 라 회장을 신한은행맨으로 만드는 단초가 됐다. 1977년 제일동포 사업가들이 신한은행 전신인 제일투자금융을 설립한다.그러나 단자회사였던 제일투자금융은 은행 기능을 할 수 없었다.제일투자금융은 은행 설립을 추진했다. 은행 설립 실무를 총괄한인물이 바로 라 회장이다. 1982년 7월 그렇게 순수 민간자본에 의한 국내 최초 은행인 신한은행이 탄생했다. 달랑 ‘점포 3개’의 규모로. 10년 뒤인 1991년 라 회장은 드디어 신한은행장에 취임한다.행장 취임식 날 회식자리에서 라 회장이 한 얘기는 아직도 유명하다.“상고 졸업하고 은행원이 돼서 최고 자리에 올랐는데 더 이상 뭐를 바라겠는가? 내 몸을 다 태워 신한은행 발전에 기여하겠다. 떠날 때는 재가 돼서 떠나겠다.” 1999년까지 세 차례 행장을연임하고 2001년 신한금융지주가 출범하면서는 초대회장으로 등극했다. 이후 2010년인 올해 4연임에 성공한다. 그렇게 신한금융CEO만 19년째 해왔다.
라 회장 시대의 신한은행과 신한금융은 승승장구했다. 1991년부터 1996년까지 신한은행은 은행감독원 평가에서 6년 연속 1위를차지했다. 신한금융은 조흥은행, LG카드 등 한국의 대표적인 금융기업 인수에 연달아 성공하면서 한국 최고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신한은행이 짧은 시간 내에 대한민국 대표은행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패러다임’을 바꾼 덕분이다. 소위 ‘신한 Way’다. 그 신한 Way를 구축한 사람이 바로 라 회장이다.
신한 Way의 실체는 ‘영업제일주의’와 ‘능력제일주의’로 요약된다. 예전 은행원들은 공무원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고압적인 자세로 유명했다. ‘은행 문턱이 높다’는 얘기가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라 회장은 ‘은행은 기업이고 은행에 오는 사람들은 고객’이라 생각했다. 기업이 고객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만들고 고객에게 팔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은행도 고객 마음에 드는 금융 상품을 만들고 고객이 그 금융 상품을 선택하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고객 중심 영업 마인드’를 전 행원에게 주문했다. 행원들은 고객을 찾아가 대출 영업을 하고 저녁이면 혹독한 인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1993년에는 국내 은행 최초로 ‘고객만족센터’를 열었다. 당시 이를 바라보는 은행권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러나 라 회장은 계속 밀고나갔고 결국 모든 은행이 다 신한은행 방식을 따라하게 됐다. 영업제일주의라는 신한 Way는 그렇게 탄생했다.
라 회장은 또 은행 설립 초기부터 ‘파벌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신생은행인 만큼 여러 금융기관에서 사람들이 모였고 이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은행이 제대로 성장해 나갈 수 없으리라 봤다. 전 직원이 똘똘 뭉쳐 일하려면 능력에 따른 인사가 필수이므로 모든 것을 ‘능력’으로만 판단했다. 이런 문화가 있었기에 조흥은행과의 합병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2003년 조흥은행을 인수한 후 라 회장은 “적자, 서자를 구별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실제 다른 합병은행들이 합병 후 오랜 기간이 지난 지금까지 ‘OO은행 출신’ 하며 제대로 섞이지 못하는 데 반해 신한은행은 화학적 합병을 가장 잘 이뤄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능력제일주의라는 신한 Way 덕분이다.
이처럼 신생 은행을 한국 제일의 금융지주사로 성장시킨 라 회장의 41년 금융인생이 이제 풍전등화가 됐다. 20년 전 라 회장이 신임행장 자리에 오르면서 ‘재가 되어 떠나겠다’고 한 말이 그대로 되고 있는 것인가.
동반사퇴라는 또 다른 동행라응찬 회장과 대척점에 서게 된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 그는 30년 가까이 몸담았던 신한은행에 고소당하면서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신 사장과 라 회장의 인연을 생각하면 최근 일련의 사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신 사장은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고향에 있는 군산상고를 졸업한 뒤 1967년 산업은행에 들어가면서 금융계에 투신했다. (신 사장은 상고를 나왔지만 산업은행 재직 시절이던 1976년 야간으로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1987년에는 연세대학 경영학과 대학원을 나왔다.) 이후 1982년 신한은행에 합류했다.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
당시 신한은행은 이제 막 설립된 꼬마은행으로 신 사장 입장에서는 과감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꿈을 펼칠 수 있다는 판단에 신한행을 결정했다. 이를 즈음해 제일투자금융 상무로 있던 라응찬 회장이 신한은행 상무로 전입하면서 둘은 본격적인 동행을 시작했다. 신 사장은 입행 이후 라 회장과 동고동락하면서 승승장구했다. 1986년 영동지점장을 거쳐 1989년에는 신한의 뿌리나 다름없는 일본의 오사카 지점장을 맡았다. 현재 탄탄하게 구축돼 있는 신 사장의 일본 내 주주와의 인맥은 이때 형성됐다. 이후 국내로 들어온 신 사장은 1994년 자금부장, 1997년 영업부장을 거쳐 1998년 이사대우가 되면서 드디어 임원 타이틀을 달게 된다. 공교롭게도 신 사장이 영업부장으로 있을 때라 회장의 차명계좌가 처음 만들어지면서 신 사장은 라 회장과 더욱 공고한 운명공동체가 된다. 1999년 상무로 승진한 신 사장은 신한금융지주가 출범한 2001년 신한지주로 옮겼고 2003년 3월 신한은행장에 오른다.
신 사장은 조흥은행과 합병한 후에도 통합 신한은행장을 맡아 2009년 3월까지 은행장직을 수행했다. 은행장을 이백순 행장에게 물려준 신 사장은 바로 ‘세자’나 다름없는 신한금융지주 사장에 오르면서 차기 회장임을 ‘대외’적으로 공인받았다.
신 사장은 금융계에서 대표적인 덕장으로 통한다. 특유의 포용력으로 부하직원은 물론 상사들의 마음까지 쉽게 사로잡는다. 금융계에서는 ‘신상훈을 한 번 만나면 바로 그의 팬이 된다’는 말까지 있다.그랬던 신 사장이 물러설 수 없는 대결 전선에 서게 됐다. 그것도 오랜 동지인 라 회장과의 대결이다. 표면적인 모습은 투모로 그룹에 대한 950억원 대출 부실에 대한 배임과 이희건 명예회장에게 지급하려던 자문료 15억5000만원 횡령 의혹이 있다며 신한은행(라 회장 측)이 신 사장을 고소한 상황이다. 이후 쟁점을 둘러싸고 여러 얘기가 오가고 있다. 자문료 횡령에 신 사장뿐 아니라라 회장과 이백순 행장이 가담했다는 정황이 있고, 투모로그룹 대출금의 용처에 의심 할만한 사실이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 같은 의혹을 놓고 라 회장 측과 신 사장 측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일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 일이 과연 둘이 대결할 만한 일인가에 대해 의심이 많다. 이에 사태의 본질은 권력투쟁이며 나아가 대결 양상의 이면에 복잡한 외부 요인이 끼어 있을 것이란 분석도 많다. 현재의 싸움은 처음부터 누구 하나가 승리할 수 없는 대결이었다. 결국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양측은 동반사퇴라는 또 다른 동행을 할 것이란 게 대체적인 예상이다.
넘버 1 손잡고 넘버 2 밀어내려던 넘버 3이백순 신한은행장은 이른바 ‘넘버 3’다. 그동안 신한이라는 거대한 조직에서 라응찬 회장, 신상훈 사장의 뒤를 잇는 실력자면서 차기 넘버 1 후보로도 거론됐다. 하지만 그런 그가 지금은 사면초가에 빠졌다. 조직의 ‘넘버 2’인 신상훈 사장을 고소한 후 내부에서 상사를 내쫓은 ‘배신자’라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재일동포 주주로부터 5억원 수수 사건에 휘말렸고 국감에서는 라 회장의 차명계좌 관리인으로 지목됐다. 신한 사태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넘도록 그의 입은 굳게 닫혀 있지만 신한 내부에서는 이 행장이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고 뒷감당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이 행장은 행장 취임 초기 공공연하게 라 회장과 신 사장을 가리켜 ‘나와 운명공동체인 인물들’이라고 표현했다. 신한의 넘버 1, 2, 3가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 발언을 했던 이유는 그의 과거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백순 신한은행장
이 행장은 과거 라 회장이 신한은행장이던 시절 비서실장을 했으며 지주 부사장으로 근무하면서도 라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이 행장은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라 회장과 처음 악수했던 장면을 이렇게 회상했다.“제가 신한은행에 처음 들어왔던 1982년 12월이었습니다. 여의도 지점 개설을 앞두고 지점 홍보차 여의도 일대를 돌아다녔습니다. 추운 날씨였는데 코트도 없이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배포하고 있는데 라응찬 회장(당시 상무)이 현장 격려차 나타났습니다. 제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덥석 제 손을 잡고서 ‘이 대리 춥지? 고생이 많아’라고 말하더군요. 저 같은 말단 직원을 알아주는 것을 고마워하던 순간 라 회장은 다시 한 번 손에 힘을 꽉 주며 저를 격려했습니다.”
이 행장은 그때 이런 사람 밑에서라면 최선을 다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신 사장과의 인연 또한 남다르다. 이 행장이 오사카 지점에서 대리로 근무하던 시절 신 행장이 지점장으로 발령받으면서 둘의 첫 만남이 시작된다. 1월1일 설날인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지점장 전화였다. “설날인데 세배나 가지.” 이 대리가 운전을 하고 신 지점장이 옆자리에 탔다. 2시간30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한 재외동포 주주의 자택. 그 주주는 며칠 전 세상을 떠났고 집에는 고인을 위한 위패가 놓여 있었다. 신 지점장은 미망인에게 술 한 병과 향을 건네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신 지점장의 정성에 감동받은 유가족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유산으로 남겨진 현금을 지점장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 행장은 “오사카 지점장 당시 신 사장의 열정과 부지런함을 직접 옆에서 지켜보면서 인생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됐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넘버 1과 손잡고 넘버 2를 밀어내는 권력투쟁의 한 가운데 서있다. 더욱이 신한금융지주 주주들은 이 행장에 대해 이사 해임 청구소송과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해놓은 상태다. 넘버 3의 입지가 크게 약화된 것은 물론 조만간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위기에 처한 것이다. 고뇌와 회환, 분노와 슬픔이 그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교차하리라.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 박유연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손일선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호(2010년 11월) 기사입니다]
▶ [화보] '하의실종' 김소연, 각선미-외모 '모두 퍼펙트!'
▶ 정신나간 농협…이 와중에 약관변경?
▶ 노래 + 게임 + DVD방 한곳에…멀티방이 뜬다
▶ 프랑스 '누드 골프장' 세계 10대 골프장 꼽혀
▶ 20대 트럭커피男 "트위터 마케팅"으로 월500만 '만지작'
▶ 엄태웅 트위터로 애견 순산사실 알려 눈길
▶ 이외수 "전라로 다니라는 뜻?" 신라호텔에 일침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