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로콜리가 숲이 되는 순간... 김인옥이 뒤집는 ‘사물의 위계’

    입력 : 2026.03.05 09:39:02

  • ‘김인옥의 풍경은 왜 늘 마음의 온도를 한 칸 올려놓는가?’

    양평의 한 동네 이름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목적지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항금리(황금리) 가는 길’이라는 제목을 따라, 실제로 그 간판을 보고 길을 들어선 사람들이 작업실 근처까지 찾아온다. “항금리에 왔는데요. 선생님이 여기 사신다는 소문을 듣고 왔어요.”

    전화를 받는 쪽도, 전화를 거는 쪽도 조금은 머쓱한데—그 순간이 김인옥 작가에겐 오래 남는 장면이라고 했다.

    “작품은 먼저 알고, 이름도 알고, 이제는 여기까지 방문을 하시는 거구나… 그럴 때 ‘아, 이 그림이 누군가를 정말 움직였구나’ 싶어서요.”

    실제로 그의 그림을 ‘소장’한 사람들의 고백은 더 생활적이다. “선생님 그림이 제 바탕화면이에요.” 휴대폰을 꺼내 저장해둔 화면을 보여주는 사람, 퇴근 후 씻고 소파에 앉아 그림을 바라보면 “스트레스가 사라진다”고 말하는 사람. 작가는 그들을 ‘따뜻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혹은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분들”이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이런 반응은 흔히 ‘힐링 아트’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김인옥 작가의 말과 시간은 그 단어보다 더 복잡하고, 더 단단했다. 그의 따뜻함은 ‘회피’가 아니라 ‘선택’에 가깝다. 현실의 고통을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한 사람이 끝내 붙잡은 방식. 그래서 김인옥의 풍경은 “예쁘다”를 넘어 “살아갈 힘”을 건넨다.

    김인옥 작가
    김인옥 작가
    ▶ She is
    김인옥(1955~)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한국화가로, 전통 채색 기법을 현대적 감수성으로 확장해 왔다. 한지 위에 얇은 색의 층을 수차례 쌓아 올리는 치밀한 과정으로 ‘기다림’과 ‘항금리(황금리) 가는 길’ 연작을 전개하며, 고향 부여의 기억과 양평의 풍경을 겹쳐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서정적 이상향을 그린다. 사계절의 빛과 여백, 작은 집·기차·새 같은 상징을 화면에 띄우고, 최근에는 브로콜리를 거대한 숲처럼 확장해 ‘하찮은 것의 귀함’을 환기한다. 2026년 3월 서울 갤러리 장 개인전에서 신작을 선보인다.

    ‘채색을 하라’는 유언 같은 한마디

    김인옥은 스스로를 “감성적인 화가”라고 평한다. 어떤 그림은 하루 종일 쳐다보기만 하고 붓을 못 대는 날도 있다. 한 번 옆에 세워둔 그림이 몇 년 뒤에야 완성되기도 한다.

    “처음 시작하면 아이디어는 구상하고 시작하지만, 그 과정에서 감성도 생각도 수없이 변해요. 몇 년 만에 완성하는 그림도 있고요.”

    하지만 그가 채색화의 길을 택하게 된 시작은 의외로 또렷한 ‘문장’ 하나였다. 대학 시절 은사였던 故 조복순 화가가 어느 날 그를 불러 말했다. “앞으로는 컬러 TV가 나와. 이제 컬러의 시대야. 주거 문화도 아파트로 바뀌고, 그림을 대하는 태도도 바뀔 거야. 너는 (채색화에) 재능이 있으니 꼭 해봐.”

    작가는 그 말을 “유언 같았다”라고 했다. 선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김인옥은 ‘채색’이라는 선택을 혼자 밀고 가야 했다.

    그 시절 미술 시장은 수묵 일변도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채색화를 잘 몰랐어요. ‘수채화도 아니고 유화도 아니고 이거 뭐죠?’ 물었던 때였거든요.”

    낯선 장르를 오래 끌고 가는 일에는 외로움이 따른다. 그는 그 외로움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꿋꿋이 오늘날까지 해온 것”이 결국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는 김인옥의 예술세계 전체에 깔린 태도와 닮아 있었다. ‘조용히, 오래, 끝까지.’

    항금리는 지명이 아니라 ‘마음의 고향’이었다
    사진설명

    ‘항금리 가는 길’은 자주 ‘양평의 풍경화’로 이해되지만, 김인옥이 말한 탄생 배경은 더 개인적이고 더 복합적이다. 결혼 이후 현실의 어려움이 닥쳤고, 남편인 작가 김광용과 “나이 들면 시골에서 조용히 그림 그리며 살자”라는 마음으로 양평에 한옥 터를 마련했다. 그러나 처음엔 ‘거처’가 아니라 ‘왕래의 장소’였다. 주말마다 오가며, 길을 보고, 공기를 마시고, 개발이 거의 되지 않았던 동네의 낯선 고요를 통과했다.

    당시 항금리는 “서울에서 오는 길도 제대로 없고, 포장도 안 된 농로” 같은 곳이었다. 그 불편함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그때의 김인옥은 마음이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 저를 위로하고자 항금리 가는 길을 그리게 됐어요.”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눈을 감고 상상했다고 했다. 그러면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부여의 시골이 떠올랐고, 항금리의 기억과 겹쳐졌다.

    “부여군 세도면… 벌판 끝에 금강이 보석처럼 반짝반짝해요. 하늘은 뭉게뭉게 구름이 막 피어나고… 버스가 지나가면 하얀 먼지가 일고,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뿜고. 그게 제 그림 속에 나타나요.”

    항금리의 길은 결국 ‘특정 장소’가 아니라 ‘시간의 겹침’이 됐다. 과거의 고향과 현재의 거처가, 기억과 상상이 한 화면에서 만나면서 ‘마음의 고향’이 만들어진다. 김인옥의 풍경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의 고향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내 기억과 연결되는 풍경. 그래서 사람들은 제목의 지명을 따라 실제 항금리까지 찾아가게 된다. 그림이 장소를 만들고, 장소가 다시 그림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항금리 가는 길, 2025년, 120x120㎝, 한지에 채색
    항금리 가는 길, 2025년, 120x120㎝, 한지에 채색

    IMF의 겨울, ‘완판’이라는 기적이 남긴 것

    김인옥이 ‘위로’라는 단어를 꺼낼 때, 그것은 미학적 수사가 아니라 삶의 체험에 가깝다. 항금리 연작을 한참 그리던 어느 날, 인사동에 액자를 맡기러 갔다가 우연히 갤러리 관계자를 만났다. 몇 점을 보여달라는 요청, 곧바로 개인전 제안. 그렇게 잡힌 전시가 IMF 한복판이었다.

    “그 시절 청담동에 갤러리가 굉장히 많았는데… 그 힘들었던 시절에 완판이 됐어요.”

    그는 그 일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남긴 ‘확신’이었다.

    “제가 힘들어서 저를 위로하려고 그린 그림이 남을 위로해 줄 수 있겠구나란 생각에 감격스러웠죠.”

    그의 말은 단순한 미담이 아니다. 김인옥의 화면이 계속해서 ‘따뜻함’을 선택해 온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그는 그 시기를 기도로 버텼다고 했다.

    한편, ‘기다림’이라는 키워드는 김인옥 작품을 따라다니다 보면 가장 자주 마주친다. 그러나 그 단어가 태어난 장면은 예상보다 구체적이었다. 어느 날 작업실에서 마당을 바라보는데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고 한다. 그때 나무가 “너무 불쌍해 보였다.” “쟤는 죽을 때까지 수백 년을 저렇게 살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왠지 약간 저 같기도 했어요.”

    브로콜리, ‘하찮은 것’이 거대한 숲이 되는 순간
    기다림, 2026년, 162.5x130.5㎝, 한지에 채색
    기다림, 2026년, 162.5x130.5㎝, 한지에 채색

    김인옥의 최근 작업에서 가장 눈에 띄는 오브제는 ‘브로콜리’다. 평범한 식재료가 한지 (혹은 캔버스) 위에서는 거대한 나무처럼 서고, 그 안에 작은 집과 사다리, 빛의 통로가 들어선다. 시작은 아주 생활적이었다. 마트에서 브로콜리를 고르다가 갑작스럽게 ‘거대한 나무’처럼 다가왔다고 한다.

    “잊어버릴까 봐 집에 오자마자 큰 종이를 꺼내 스케치를 해놨어요.”

    그는 왜 하필 브로콜리였을까. 대답은 오래된 취향으로 이어졌다.

    “저는 꽃을 좋아해도 장미나 백합 같은 화려한 것보다, 길가의 제비꽃 같은 들풀을 가만히 쳐다보면 너무 예뻐요.”

    어린 시절 그는 낙도나 산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었고, 수녀원 이야기를 들을 만큼 ‘도움’에 마음이 기울던 사람이었다. 길에서 만난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밥을 먹여 보낸 기억도 있다. 그러니 브로콜리는 ‘새로운 기교’가 아니라 ‘오래된 마음’의 연장이다.

    그 마음은 결국 세계관이 된다. “브로콜리를 나무로 봤잖아요. 그러니까 얘는 거대한 나무고, 그 안에 인간이 만든 것들은 자연 앞에서 보잘 것 없다. 그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없는 이유

    김인옥의 화면에는 기차가 멀리 지나가고, 오래된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작은 집이 숲 위에 놓인다. 그런데 그 풍경은 어느 순간 우주선이 등장하며 ‘미래’ 쪽으로도 튄다. 이번 브로콜리 작업에서는 비행접시(우주선)가 처음으로 더 또렷하게 등장한다고 했다. 그는 우주에 관심이 많고, 외계인을 “두려움의 존재로만 대하지 말자”라고 말한다. “거기도 지적 생명체라면 따뜻한 마음이 있을 텐데, 같이 공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상상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항상 머릿속에 같이 있다”라고 말했다. 결정된 미래는 없고, 상상하는 미래가 오히려 우리를 살게 한다는 믿음. 그래서 김인옥에게 환상과 현실은 구획되지 않는다.

    “제 머릿속에서 그게 맨날 왔다 갔다 하니까요.”

    전통은 재료에 있고, 동시대는 태도에 있다

    김인옥을 설명할 때 자주 붙는 문장은 “한국 채색화의 맥을 잇는다”라는 평가다. 흔한 보도자료 역시 그를 천경자·이숙자의 계보로 언급한다. 김인옥은 그 프레임을 “고맙다”라고 받으면서도, 단정적인 ‘영향 관계’로 묶이는 건 경계했다. “너무 훌륭한 두 분은 구상성이 강했고, 저는 구상과 추상을 믹스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편입니다. 찍기도 하고 긁어내기도 하면서, 채색화지만 조금 더 현대적 감성을 넣는 기법을 다양하게 쓰죠.”

    이 지점에서 김인옥에 대한 한 가지 오해가 풀린다. ‘전통 채색화’라는 말이 종종 ‘보수적’이라는 인상으로 이어지지만, 그의 채색은 전통이면서 동시에 실험적이다. 또 다른 오해는 “녹색의 작가”라는 단정이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임팩트가 세면 그것만 기억해요. 어떤 분은 노란색 나무만 좋아한다고, 노란 나무를 사겠다고도 해요.”

    김인옥의 팔레트는 넓다. 다만 관객이 ‘기억하는 색’이 각자 다를 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재료의 확장도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해외 전시가 잦아지며 운반 문제를 겪었고, 그래서 아크릴·캔버스 작업도 시도 중이라고 했다. 다만 그 변화는 ‘기존 세계를 버리는 새로움’이 아니라, ‘기존 세계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한 방법’에 가깝다.

    [박지훈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6호 (2026년 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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