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가 죽어야 K가 산다 」 펴낸 장준환 변호사, 콘텐츠는 한국이 만들었는데 자본과 데이터는 누가 가져갔나

    입력 : 2026.07.20 14:43:22

  • 사진설명

    “수위 많이 조절한 거예요.”

    장준환 변호사는 <K가 죽어야 K가 산다>의 문장이 지나치게 세지 않으냐는 질문에 웃으며 말했다. 책에는 ‘디지털 창씨개명’, ‘문화 식민지’, ‘미학적 주권’ 같은 날 선 표현이 이어진다. 그런데도 그는 원래 쓰려던 말보다는 상당히 순화했다고 했다.

    한국 콘텐츠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제다. K팝과 드라마, 게임과 웹툰은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들어갔다. 다만, 장 변호사가 문제 삼는 것은 K-컬처가 성공했느냐가 아니다. 그 성공을 누가 평가하고, 누가 유통하며, 누구의 IP와 데이터로 축적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뉴욕에서 프라이빗 웰스 변호사로 일한다. 뉴욕과 서울에서는 갤러리를 운영하고, 뉴욕주 미들타운에서는 옛 은행 건물을 문화복합지구로 바꾸는 The Bank Museum District를 추진 중이다. 미국에서 지역정치 참여도 준비하고 있다. 변호사와 갤러리스트, 도시개발자와 정치 지망생이라는 서로 다른 명함은 그에게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국은 세계가 소비하는 문화를 만들고도, 그 가치가 남는 구조에서는 여전히 ‘들러리’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 장준환 변호사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국 변호사이자 갤러리스트, 문화경제 기획자다. 프라이빗 웰스(Private Wealth) 분야에서 고액 자산가와 기업가의 해외 투자, 자산 이전, 부동산 개발과 비즈니스 구조 설계를 자문해왔다. 뉴욕과 서울에서 갤러리 장(Gallery Chang)을 운영하며, 더 뱅크 아트 파운데이션(The Bank Art Foundation)을 설립했다. 현재 뉴욕주 미들타운의 옛 은행 건물을 문화·교육·상업이 결합된 The Bank Museum District로 재생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충북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서 ‘미래설계’를 강의하고 있으며, 최근 <K가 죽어야 K가 산다>를 펴냈다. 그는 K-컬처가 세계적 흥행을 넘어 평가 기준과 지식재산권(IP), 데이터의 주도권까지 확보해야 지속 가능한 산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갤러리에서 로펌, 뮤지엄까지

    “사람들이 물어요. 성공한 변호사가 돈을 벌더니 갤러리 같은 고급 취미를 하는 것 아니냐고.”

    그가 직접 꺼낸 질문이었다. 이어진 답은 낭만적이지 많은 않았다.

    “문화를 발견하는 곳이 갤러리고, 그 문화를 지키는 곳이 로펌이고, 그 문화를 다음 세대에게 넘기는 게 뮤지엄이에요.”

    갤러리는 작가를 찾고 시장과 연결한다. 로펌은 저작권과 계약, 투자와 상속의 구조를 설계한다. 뮤지엄은 무엇을 보존하고 어떤 작품을 역사로 남길 것인지 결정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이력은 이 세 기능을 각각 수행하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서 장 변호사가 가장 오래 머문 단어는 ‘예술’보다 ‘자립’이었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재단과 미술관도 경제적 독립성이 없으면 오래가기 어렵다고 했다. 주요 기부자가 원하는 전시와 기관이 해야한다고 믿는 전시가 충돌하면, 돈을 내는 쪽의 의사가 결국 기준을 흔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인터뷰하고 사진 찍고 재미있죠. 그런데 1년 쯤 가면 힘이 빠져요. 경제적으로 자립되지 않으면 지속 가능성이 없습니다.”

    현재 뉴욕에서 진행 중인 ‘The Bank Museum District’ 역시 그가 ‘문화 사업’보다 ‘문화 인프라’라고 부르는 프로젝트다. 전시장 하나를 짓는 것이 아니라 레지던시와 공연, 식음료와 교육, 상업시설과 체류를 연결해 지역 안에서 돈이 순환하게 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는 문화적 당위만으로 주민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새로운 시설이 방문객과 소비, 고용을 실제로 만들 때 비로소 지역 사회가 변화를 받아들인다고 본다. 그의 문화론이 이상주의처럼 보이다가도 끝내 손익계산서로 돌아오는 이유다.

    “일부에서 저를 민족주의자라고 하는 건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이 책도 결국 한국이 글로벌 시장에서 문화 콘텐츠를 통해 자립하고 돈도 많이 벌자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해야 100년을 이어가는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죠.”

    세계의 박수보다 무서운 것, ‘평가 기준’을 넘겨주는 순간

    <K가 죽어야 K가 산다>에서 죽어야 하는 것은 한국 문화가 아니다. 세계에서 인정받아야만 자신의 가치를 믿는 K다. 해외 시상식과 차트, 글로벌 플랫폼의 순위를 성공의 최종 판결문처럼 받아들이는 태도다. 장 변호사는 K-컬처가 널리 소비되는 것과 한국이 문화의 평가권을 갖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칸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에 좋은 영화가 되는 구조가 아니라, 한국에서 선택되고 논의된 작품이기 때문에 해외가 주목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BTS 역시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은 뒤 국내에서 위상이 다시 높아졌다는 점을 그는 불편한 사례로 들었다. 미술시장에서도 해외에서 이름을 얻은 작가를 한국에 들여오면 판매가 쉬워지는 현실을 자신을 포함한 미술계가 활용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자본은 국경도 없고 국적(Nationality)도 없어요. 자본은 자본인 거죠.”

    이 문장은 책의 성격을 가장 정확히 드러낸다. 그는 미국이나 글로벌 플랫폼을 도덕적 악당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자본은 수익을 내는 쪽으로 움직이고, 플랫폼은 사용자를 오래 붙잡는 콘텐츠를 앞에 세운다. 문제는 한국이 그 질서를 객관적이고 영원한 세계 기준으로 착각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플랫폼에서 세계적인 흥행을 거두더라도 IP와 시청 데이터, 팬과의 직접적인 관계, 후속 사업의 결정권을 충분히 남기지 못한다면 성공의 상당 부분은 외부 구조에 축적된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우리 플랫폼’은 넷플릭스와 맞서는 거대한 서비스를 당장 만들자는 구호와는 다르다. 글로벌 유통망을 적극적으로 쓰되, 일부 IP와 데이터, 비평과 교육, 국내 유통 경로를 축적해 선택권을 남기자는 주장에 가깝다.

    “쇄국하자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잘나가고 있으니까 시간을 벌고 있는 거예요. 잘나갈 때 빨리 우리 것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는 K의 현재 지위도 영구적이지 않다고 했다. 돈과 관심이 다른 문화권으로 이동하면 글로벌 자본은 망설임 없이 다음 공급자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K가 돈이 되지 않는 순간 V, I, C가 대신할 수 있어요. 베트남도 있고, 인도, 중국도 가능합니다.”

    표현은 도발적이지만 질문은 현실적이다. K-컬처의 경쟁력은 국적 표시인 K에 있는가. 아니면 제작 인력과 미학, 언어와 유통 구조, 그 성과를 다시 투자하는 산업 생태계에 있는가.

    AI가 기술을 평준화할수록 문화는 더 비싸진다
    사진설명

    장 변호사의 주장은 AI 이야기에서 더 거칠어진다. 그는 AI가 확산될수록 기술과 생산 능력만으로 차별화하기는 어려워지고, 국가 간 산업 경쟁도 더 노골적인 안보 문제로 이동할 것으로 본다. 공장은 보조금과 관세에 따라 옮겨갈 수 있고, 기술은 경쟁국이 따라잡을 수 있다. 반면 특정 사회의 이야기와 감각, 음식과 음악, 행동 양식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으면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문화를 ‘소프트파워’보다 ‘경제안보’에 가까운 개념으로 본다.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가 높아지면 자동차와 전자제품, 관광과 식품의 가격에도 프리미엄이 붙을 수 있다는 논리다. AI가 콘텐츠를 대량 생산하는 시대에는 이 문제가 더 중요해진다. 알고리즘이 무엇을 추천하고, 생성형 AI가 어떤 작품을 학습하며, 어떤 미학을 표준적인 것으로 재생산하느냐가 새로운 평가권이 되기 때문이다. AI는 창작 도구이면서 동시에 문화를 분류하고 노출하는 권력이 될 수 있다. 그의 처방은 논쟁적이다. 한국이 경쟁력을 얻으려면 AI 인재를 소수의 엘리트로 집중 육성하고, 일부 영역에서는 규제를 실험적으로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율주행과 데이터 활용도 사고 가능성만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기존 방식과 위험을 수치로 비교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생산성이 급격히 높아진 미래에는 소수의 엘리트와 기본 소득에 의존하는 다수가 공존할 가능성도 언급했다. 그 때 커지는 산업이 바로 사람들의 여가와 감정, 시간을 점유하는 엔터테인먼트라는 전망이다.

    “소위 말하는 AI 디스토피아 상황에서, 높은 엘리트층이 있고 나머지는 기본소득을 받으며 사는 사회가 올 수 있다고 봐요. 그러면 먹고 놀고 즐기는 영역이 남습니다. 우리나라는 그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충분히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주장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규제를 줄이는 과정에서 개인정보와 노동, 저작권과 안전이 훼손될 수 있고, 엘리트 중심의 전략은 사회적 이동성을 오히려 막을 수 있다. 국제기구들이 AI 시대에 인권과 창작자의 동의, 보상, 문화적 다양성을 함께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만 장 변호사의 거침없는 전망은 한국의 AI 전략이 반도체와 모델 성능만을 이야기할 때 빠뜨리는 질문을 남긴다. AI가 생산한 결과물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가.한국어와 한국적 감각은 학습 데이터와 추천 알고리즘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그리고 그 가치가 만들어낸 수익은 어느 기업과 어느 국가의 자산으로 쌓이는가.

    정치도 결국 먹고사는 문제 — 결과를 들고 지역으로 간다

    장 변호사는 미국에서 지역정치 참여를 준비하고 있다. 그가 정치 이야기를 꺼낼 때 반복한 말은 이념보다 ‘먹고사는 문제’였다. 한국에서 바라보는 미국 정치는 대통령과 연방정부, 민주당과 공화당의 충돌에 집중돼 있지만, 지역 유권자의 관심은 일자리와 세금, 개발과 주거, 학교와 상권에 더 가깝다고 했다. 그가 공화당 인사들과 대화를 시작하게 된 배경 역시 자신의 핵심 의제가 개발과 지역경제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그가 문화와 인권의 가치를 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려면 문화적 명분을 경제적 결과로 번역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The Bank Museum District’는 그 번역을 시험하는 현장이다. 문화시설이 낡은 건물을 아름답게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상권의 매출과 청년 고용, 주민의 자부심과 도시의 재방문율을 높일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에 앞서 결과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말로 문화경제를 설명하기보다 실제 공간을 운영하고 숫자를 확인한 뒤, 그 모델을 법과 예산으로 확장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동시에 그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을 돌려준다. 외부 투자자와 개발자가 만드는 문화지구가 주민의 도시를 빼앗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는가. 개인의 사업적 성공과 도시의 공공적 성공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겠다는 사람이 정작 지역사회의 기존 기억과 목소리를 밀어내지는 않을 것인가. 그가 정치로 가기 전에 증명해야 할 것은 건물의 완공 자체가 아니다. 방문객과 투자액 같은 큰 숫자보다 지역 안에서 누가 돈을 벌고, 누가 일자리를 얻으며, 누가 오래 머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될 것이다.

    <K가 죽어야 K가 산다>는 결국 K-컬처를 덜 사랑하자는 책이 아니다. 사랑한다면 박수와 자부심에 머물지 말고 소유권과 평가권, 현금흐름과 다음 세대까지 계산하자는 책이다. 장 변호사는 인터뷰 내내 날카로운 표현을 거두지 않았다. “K가 없어져도 글로벌 자본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우리죠.”

    책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지는 이제 결과에 달렸다. 한국 콘텐츠 기업이 IP와 데이터를 얼마나 남길 수 있는지, AI 시대의 규칙에 문화적 다양성을 얼마나 넣을 수 있는지, The Bank Museum District가 지역의 삶과 경제를 실제로 바꾸는지가 그 결과다. 세계의 박수는 충분히 받았다. 이제 확인할 것은 박수가 멈춘 뒤에도 남는 구조다.

    [박지훈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