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거장의 대결장 ‘한강변 재건축’ “비용 늘고 실속 없다” 우려도 솔솔

    입력 : 2026.06.24 11:22:30

  • 서울 압구정 일대 아파트 단지 모습. <사진 연합뉴스>
    서울 압구정 일대 아파트 단지 모습. <사진 연합뉴스>

    최근 서울 재건축·재개발 수주전에서 해외 설계사가 시공권 획득의 새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아파트 단지 고급화와 차별화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가운데 ‘하이엔드 브랜드’가 등장한 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며, 이제는 글로벌 건축 거장과의 협업이 차별화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실제로 서울 압구정과 반포 등 일부 주요 정비사업장에서 이뤄지던 해외설계업체의 사업 참여가 서울 전역으로 확대되는 중이다. 수주전이 치열한 만큼 차별화를 위해 해외 유명 건축가가 연신 호명되는 모습이다. 양쪽으로 갈라진 독특한 외관으로 ‘모세의 기적’이라 불리는 이화여대 캠퍼스 복합단지(ECC)를 설계한 도미니크 페로, 벌집을 닮은 미국 뉴욕 허드슨야드 전망대 ‘베슬’의 토머스 헤더윅 등 해외 유명 건축가를 아파트 단지 설계사로 앞세우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놓고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외관에서 벗어나 ‘유일무이’한 아파트가 되려는 새로운 시도라는 평가와 실속 없는 장사라는 비판이 엇갈린다.

    압구정 일대, 헤더윅 vs 페로
    압구정2구역 조감도.
    압구정2구역 조감도.

    ‘해외 설계 거장 모시기’가 가장 치열한 곳은 역시 압구정 일대 재건축 단지다. 이곳에선 해외 건축가와의 협업이 사업 단계별로 거론된다. 예를들어 이 지역에서 속도가 가장 빠른 압구정2구역(신현대)은 2023년 6월 프랑스 건축가인 페로와 협업한 디에이그룹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사무소(디에이건축)를 설계사로 선정했다. 페로는 ECC, 영동대로 광역복합환승센터 등을 설계했다.

    이후 시공사로 선정된 현대건설은 또 영국 건축가인 헤더윅이 이끄는 헤더윅 스튜디오와의 설계 협업을 강조하고 나섰다. 헤더윅은 뉴욕 맨해튼 베슬과 허드슨강 인공섬 프로젝트인 ‘리틀 아일랜드’, 일본 도쿄 내 8만 1000m² 용지에 조성하는 복합시설인 아자부다이 힐스 등을 설계한 건축가다.

    압구정3구역(UN스튜디오)과 4구역(칼리슨RTKL)도 설계사 선정 과정 부터 글로벌 업체와의 협업을 내세웠다. UN스튜디오는 세계적 건축가 벤판베르켈이 설립한 곳으로, 독일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과 로테르담 에라스무스 다리 등을 설계했다. 국내에서는 갤러리아명품관 설계로 유명하다. 칼리슨RTKL은 미국 아마존 본사 디자인에 참여했고, 국내에서는 더현대서울 등을 설계했다. 공교롭게도 이들 구역에서 이후 진행 중인 시공사 선정 절차에서도 건설사들이 해외 설계를 강조하는 모습이다.

    반포·서초·대치 등 다른 강남권 일대에서도 설계 경쟁은 한층 치열해지는 모습이다. 삼성물산은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19·25차’ 통합 재건축 수주를 위해 미국 설계사 SMDP와 협업에 나섰고, 주요 설계진이 직접 현장을 찾아 한강 조망과 배치, 주변 환경을 점검했다. 미국 시카고에 본사를 둔 SMDP는 초고층 건축과 도심형 복합개발 설계에 특화된 글로벌 설계사다. 서울에서 아크로 서울포레스트, 나인원 한남, 디에이치 여의도 퍼스트 등 굵직한 재건축·재개발 작업을 진행한 경험이 있다. 삼성물산과 SMDP는 조합에 반포 최고 높이인 180m 랜드마크 타워와 6개동 배치, 약 5900.6㎡ 규모의 테마광장, 열린 통경축 등을 제시했다.

    포스코이앤씨 역시 신반포19·25차 재건축에서 해외 설계사와의 협업을 통한 랜드마크 설계를 앞세웠다. 포스코이앤씨는 UN스튜디오와 협업해 단지 배치 단계부터 가구 내부 구조에 이르기까지 한강 조망을 중심에 둔 설계도 제시했다. 한강 조망을 극대화하는 스카이라인과 테라스, 커뮤니티 특화 설계가 수주전 핵심 카드가 된 셈이다.

    GS건설은 서초구 서초동 ‘서초진흥’ 재건축에서 네덜란드 설계사무소 MVRDV를 내세워 존재감을 키웠다. 최근에는 MVRDV가 서초진흥 뿐 아니라 개포우성6차 재건축 수주전에도 참여를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강남권 전반으로 글로벌 설계 네트워크를 넓히는 모습이다. GS건설은 MVRDV의 실험적이고 대담한 디자인 역량을 앞세워 단지 외관과 공간 구성을 차별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삼성물산은 대치동 쌍용1차 수주전에 세계적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를 전면에 내세우며 최고 49층, 6개 동, 999가구 규모의 재건축 청사진을 제시했다.

    성수·여의도·목동 등으로 확산
    사진설명

    최근 눈에 띄는 점은 이 같은 경쟁이 성수·여의도·목동 등 서울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성수1지구 시공사로 뽑힌 GS건설은 영국 건축사무소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와 아파트 외관 설계

    와 관련해 협업을 하기로 했다. 2023년에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이끄는 건축사무소다. 화려한 조형 대신 비례와 구조, 도시 맥락을 중시한 건축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독일 베를린의 신박물관 복원 프로젝트와 제임스 사이먼 갤러리, 중국 상하이의 웨스트 번드 미술관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사옥의 설계를 맡았다.

    목동 재건축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목동신시가지3단지는 설계사 선정 과정에서 ‘아르카디스’와 ‘UN스튜디오’가 거론됐다.

    아르카디스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있는 5성급 호텔로 유선형 블록을 쌓아 올린 것 같은 독특한 외관의 ‘아틀란티스 더 로열’ 등을 설계해 이름을 알린 업체이다.

    영등포구 여의도동 대교아파트 재건축조합은 지난해 아예 국제공모를 실시해 헤더윅을 특화 설계 담당 해외 설계사로 선정했다. 국제 공모 프레젠테이션에는 헤더윅이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조합에 따르면 헤더윅 스튜디오는 설계 전 과정에 참여할 예정이다. 컨소시엄 형태의 설계 참여에서 나아가 해외 설계업체가 직접 기획부터 감리까지 전담한다는 얘기다.

    최근엔 조합이 업체 선정 단계에서 해외 업체와의 협업을 공개적으로 권장하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2000여 채 재개발 단지인 성수3지구, 4823채 규모 재건축 단지인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산시영 모두 설계 공모 지침에 ‘해외 건축가와 컨소시엄 시 우대(권장)’ 조항을 기재했다.

    주택 분야에서 해외 설계 도입은 주로 공공에서 활용하던 수단이었다. 대다수 아파트 단지가 남향 판상형 구조로 외관이 ‘성냥갑’ 같다는 비판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이다. 2010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주도한 서울 강남구 보금자리주택 개발이 대표 사례다. 당시 2개 블록에서 국제 설계공모가 진행돼 각각 일본, 네덜란드 건축가 설계안이 당선됐다. 준공된 아파트는 이웃과의 소통을 추구하기 위해 현관문을 통유리로 설계하거나 유럽식 중정(건물의 중앙에 설치해 채광·환기·공간 확장에 활용하는 공간)을 도입하는 등 기존 아파트 문법을 깨뜨려 주목받았다. 또 테이트모던 미술관 설계로 유명한 헤르초그 앤드 드 뫼롱이 참여한 ‘더 피크 도산’ 등 일부 초고가 빌라 시장에서만 해외 설계를 찾아볼 수 있었다.

    최근 재건축·재개발 수주전에 해외 건축가들이 거론되는 이유도 예술과 창의성을 담은 특별한 단지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조합원들의 기대가 반영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여의도동 대교아파트 측은 헤더윅 스튜디오에 단지 설계를 맡기며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대표 주거 공간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지자체 인허가를 원활하게 받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는 해석도 내놓는다. 지자체장이 선호하는 건축가 또는 해외 순방 때 만난 설계사 등과 협업한 설계안을 제시하면 각종 인허가를 받을 때 실무진에서 문제 삼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렸다는 것이다.

    건설사들도 이런 조합원들의 기대감을 수주 마케팅 포인트로 적극 활용하면서 협업 범위는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단지 설계뿐만 아니라 조경, 외관, 구조 계산 등 특정 분야에서도 해외 업체를 끌어들이는 사례가 많이 늘어났다.

    국내 설계사 대비 2배 비용
    헤더윅 스튜디오는 현대건설과 함께 압구정2구역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뉴욕의 ‘베슬(Vessel)’을 설계한 토머스 헤더윅. <사진 연합뉴스>
    헤더윅 스튜디오는 현대건설과 함께 압구정2구역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뉴욕의 ‘베슬(Vessel)’을 설계한 토머스 헤더윅. <사진 연합뉴스>

    하지만 동시에 해외 설계업체 섭외가 설계 비용만 늘리고 실속은 갖추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먼저 지출 비용이 늘어난다는 비판이 가장 많다. 건설업계에 따르면 해외 건축가에게 설계 업무를 맡기는 비용은 국내 설계사 대비 2배 이상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설계 단계마다 비용을 내야 하는 것도 문제다. 설계사끼리 경쟁할 때는 대개 전체적인 구상을 담은 기본설계면 충분하다. 하지만 인허가·시공을 위해서는 이보다 상세한 도면을 작성해야 해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착공 이후 현장 상황에 맞게 도면을 수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초기 개념설계는 해외 업체에서 맡지만 설계 변경은 국내 회사가 맡는 경우가 많다.

    해외 설계를 도입하더라도 실제 내부 공간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지적도 많다. 해외 업체는 외관 설계만 맡고 내부 평면은 국내 회사가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래미안 원베일리의 경우 삼성물산이 해외 설계사와 협업하겠다고 공약했지만, 해외 업체의 평면 구성안이 조합 선호와 맞지 않아 최종적으로 채택되진 않았다. 한 국내 건축가는 “초고층·초호화 빌딩만 주로 설계했던 유명 설계업체들의 ‘이름 값’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일 뿐 실속이 있는지는 고려해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심지어 해외 업체가 국내 설계사의 실제 기여도 대비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한다는 하소연까지 제기된다.

    한 대형 설계사 임원은 “해외 건축가들은 중국 부동산 시장이 무너진 이후 한국을 주요 시장으로 판단하고 작품 전시회도 적극적으로 열고 있다”면서도 “당선 이후에는 본인의 이름값 덕분이라며 설계 변경 업무에 참여하지 않고, 경쟁에서 떨어졌는데 실비를 청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른 대형 설계사 임원은 “지자체장 등 설계사 선정 권한을 가진 이들이 지나치게 해외 건축가를 선호해 국내 시장이 글로벌 ‘호구’가 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고 밝혔다.

    구조적인 문제라는 평가도 있다. 국내 건축 시장은 대기업 건설사가 주도하는 아파트 위주로 시장이 짜여있다. 이 때문에 개별 건축가가 독창성과 심미성 등을 키우고 보여줄 기회가 적고, 새로운 디자인과 설계가 필요할 때는 해외 건축가를 찾는 악순환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건축업계 관계자는 “국내 건축 시장의 다양성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해외 건축가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풍조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손동우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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