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버 큐리어스한 세상 주류 된 제로 알코올 이코노미

    입력 : 2026.06.16 1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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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그런 적이 있었다.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라는 상사의 말 한마디에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퇴근 후 삼겹살집으로 헤쳐 모였던…. ‘라떼’는 말이야, 그랬다. 선배가 따라주는 술은 주량이 어찌 되든 두주불사(斗酒不辭)가 정답이자 일상이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대학 시절엔 좀 더 대담했다. 선후배 상견례 현장에는 으레 사발식이 기다리고 있었고, 얼굴만 한 대접에 담긴 술이 두어 순배 돌고 나면 서너 명은 골목 구석에서 게워내기 바빴다. 그랬지, 그런 적이 있었더랬다. 지금은 어떨까. 과연 그런 적이 있기는 했던 걸까. 영화나 소설에서 지어낸 얘기인가 싶을 만큼 주류 트렌드가 달라졌다. 이른바 ‘소버 큐리어스’한 세상이다. 소버(Sober)하고 큐리어스(Curious)한 세상이라니, 이건 또 뭘까. ‘맑은 정신’이란 뜻의 소버와 ‘호기심 많은’이란 큐리어스의 합성어다.

    그러니까 직역하면 ‘술 취하지 않는 호기심’쯤 되려나. 그런데 이 단어, 실제로 책에 먼저 쓰였다. 2018년 영국 작가 루비 워링턴이 술에 대한 대중의 인식 변화를 조명한 <소버 큐리어스>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술을 외면하는 문화는 웰니스 혁명의 연장선에 있다”며 “삶에 대한 태도 변화는 술이 우리 몸에 미칠 수 있는 해로운 영향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발전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니까 이 트렌드, 금주나 절주와는 결이 다르다. 금주가 건강상의 이유나 자신의 의지로 술을 끊는 행위라면, 소버 큐리어스는 ‘나는 왜 술을 마시는가’ ‘술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먼저 묻는다. 그 성찰의 끝에 알코올 도수 0%의 무알코올, 도수 1% 미만의 논알코올, 극도로 낮은 저알코올 음료로 음주 문화를 재정의하는 움직임이다. 한국에선 1995년생 이후 출생한 Z세대를 중심으로 이 트렌드가 빠르게 확산 중이다.

    아르바이트 중개 플랫폼 알바천국이 1995년 이후 출생한 91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보면 ‘음주를 전혀 하지 않거나 거의 즐기지 않는다’는 응답이 55.1%나 됐다. Z세대의 절반 이상이 사실상 비음주자인 셈이다. 글로벌 데이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8월 갤럽 조사에서 ‘하루 1~2잔의 음주도 건강에 해롭다’고 여기는 미국인이 과반(53%)을 넘어섰다. ‘현재 술을 마신다’고 답한 비율은 역대 최저치인 54%로 급락했는데, 특히 18~34세의 금주가 두드러졌다. ‘술을 마신다’고 답한 비율은 지난 2023년 59%에서 지난해 50%까지 떨어졌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엔시솔루션스의 설문조사에선 Z세대의 65%가 ‘적극적으로 음주를 줄이려고 노력중’이라고 답했다. 설문에 참여한 밀레니얼(57%), X세대(49%), 베이비붐 세대(39%)보다 비중이 높았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주류업계가 Z세대의 금욕주의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흐름은 비단 한국과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데이터에 따르면 2011년 이후 다수 회원국에서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감소했다.

    그러니 취하기 위해 마시던 시대는 저물었다. 2026년 현재 대한민국 소비시장의 가장 뜨거운 화두는 어쩌면 ‘당연한 절제’다. 술잔을 비우는 대신 정신을 맑게 채우려는 세대가 주류 지도를 완전히 새롭게 그리고 있다. 의도적으로 음주를 멀리하며 웰니스를 추구하는 소비 트렌드는 주류업계를 넘어 미쉐린 레스토랑과 5성급 호텔의 파인 다이닝 코드까지 뒤흔들고 있다.

    팬데믹 이후 가치 변화, 제로의 습격

    올 1월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2024 국민건강통계’를 살펴보면 19∼29세 가운데 아예 술을 마시지 않거나, 마시더라도 월 1회 이하라는 응답 비율이 56.0%로 절반이 넘었다. 관련 조사가 시작된 2005년(37.9%) 이후 최고치다. 코로나19가 유행한 2020년 51.7%로 처음 과반을 기록한 뒤 팬데믹이 완전히 종료된 2024년에 오히려 더 높아졌다. 팬데믹 기간 동안 사회적 거리두기 등 방역 조치로 인한 라이프스타일 변화가 일시적인 게 아니라는 방증이다. ‘월 1회 이하’ 음주율은 30대 47.6%, 40대 44.4%, 50대 52.8% 등이었다. 60대(62.9%)와 70세 이상(78.2%) 등 고령층을 제외하면 19∼29세 젊은 층(56.0%)이 가장 낮았다. 술 마시는 이들이 없으니 술자리가 줄어드는건 당연한 일. 국세청이 발표한 ‘2025년 12월 100대 생활업종 통계’에 따르면 간이주점 사업자 수가 전년 동월 대비 10.4%나 감소했다.

    술 먹는 이도 술자리도 줄고 있으니 주류 소비량도 감소 추세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2025 주류 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 달에 1회 이상 주류를 소비한 이들의 월평균 음주 빈도는 8.8일로 전년(9.0일) 대비 0.2일 줄었다. 같은 기간 하루 평균 음주량도 6.7잔에서 6.6잔으로 감소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관련 기업의 실적도 같은 방향이다. 일례로 롯데칠성음료의 지난해 4분기 주류 사업 매출(1773억원)은 전년 대비 7.8% 감소했고, 영업손실은 28억원을 기록하며 적자로 전환됐다. 통상 4분기는 송년회 등 각종 연말 모임이 몰리는 대목이다. 바로 그 시기에 적자가 났다. 소주는 전년 대비 4.3% 감소했고, 맥주와 스피리츠는 각각 31.1%, 32.7%나 급감했다. 유일하게 성장한 품목은 캔 하이볼 등 RTD(즉석음용) 제품(20% 증가)이었다. 주류업계가 논알코올 제품에 주목하는 이유다. 실제로 글로벌 논알코올 음료 시장은 매년 두 자릿수 이상의 경이로운 성장률을 기록하며 영토를 넓히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국내 무알코올·논알코올 맥주 시장은 2023년 644억원에서 오는 2027년 946억원으로 46.9% 성장할 전망이다. 그 동안 주류업계를 묶고 있던 법적 규제가 풀린 것도 성장 배경의 한 축이 됐다. 2024년 5월 말 ‘주류 면허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이 공포되며 일반음식점에서도 무알코올·논알코올 맥주 유통이 가능해진 것. 개정안 시행 전에는 알코올 도수 1% 이상의 주류만 일반음식점에서 판매할 수 있었다.

    국내 수입 논알코올은 ‘하이네켄 0.0’과 ‘버드와이저 제로’, 일본 시장을 평정하고 넘어온 ‘산토리 올프리’ 등이 눈에 띈다. 과거엔 “맛이 밍밍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면 최근에는 브랜드마다 특수 공법을 통해 알코올만 정교하게 추출해내며 일반 맥주와 거의 똑같은 풍미를 자랑하고 있다. 맥주 본연의 홉 향과 청량감은 남기되 칼로리와 알코올은 걷어낸 이 제품들은 운동 직후에도 즐길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 음료로 자리하며 빠르게 일상에 침투했다.

    논알코올 라인업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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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주류 시장을 이끌고 있는 하이트진로와 롯데칠성음료, 오비맥주의 움직임도 다르지 않다. 주류 시장의 구조적인 침체 앞에 ‘양으로 버는 시대는 끝났다’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이들 주류 3사도 논알코올 라인업을 핵심 성장 전략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하이트진로는 무알코올 맥주 개념이 생소했던 2012년 국내 최초로 ‘하이트제로 0.00’을 출시하며 선구자가 됐다. 이 선점효과는 10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견고하다. 닐슨아이큐 코리아에 따르면 2024년 하이트제로 0.00의 시장점유율은 36.8%로 업계 1위다. 지난해 판매액은 약 208억원으로 전년(171억원) 대비 21.8% 증가했다. 하이트진로는 라인업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포멜로(자몽계열 열대과일) 풍미를 더한 하이트제로 0.00 확장 제품에 이어 알코올 도수 0.7%의 비알코올 맥주 ‘하이트제로 0.7%’를 출시해 무알코올과 저알코올 시장을 동시에 공략하고 있다. ‘하이트 논알콜릭’ 상표권도 출원하며 브랜드 확장 의지를 내비쳤다.

    한때 논알코올 맥주와 거리를 두던 오비맥주는 지난해 8월 알코올·당류·칼로리·글루텐을 모두 제거한 ‘4무(無)’ 콘셉트의 ‘카스 올제로’를 출시하며 입장을 선회했다. 현재 오비맥주 논알코올 포트폴리오는 ‘카스 0.0’ ‘카스 레몬 스퀴즈 0.0’ ‘카스 올제로’ 3종이다. 공격적인 마케팅도 눈길을 끈다. 전국 5만5000여 개 식당에 카스 0.0을 입점시켰고, 이태원 루프톱에서 논알코올 음악 파티 ‘얼리 버드’를 오전 7시부터 11시까지 진행하며 Z세대의 모닝 레이브 트렌드를 정조준했다. 롯데칠성음료는 무알코올 제품 ‘클라우드 클리어 제로’를 단종하고 2025년 1월 무·논알코올 맥주 브랜드를 일원화한 ‘클라우드 논알콜릭’을 출시하며 브랜드 효율화를 꾀했다. 소주 부문에선 2022년 출시한 제로 슈거 소주 ‘새로’를 중심으로 저도수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첫 출시 당시 알코올 도수16도였던 새로는 올 1월 15.7도로 재단장했고, ‘새로 살구’ ‘새로 다래’(12도) 등 과일 저도주 라인업을 확충했다.

    미쉐린 스타와 특급호텔이 선택한 소버 다이닝

    국내서 미쉐린 스타를 획득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과 특급호텔 레스토랑도 소버 큐리어스한 라이프스타일에 동참하고 있다. 이전에 이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논알코올 음료가 탄산수나 주스였다면 지금은 술 마시지 않는 자산가를 위해 ‘논알코올 페어링’ 코스를 도입하고 있다. 이들이 선보이는 논알코올 음료는 단순한 시판 주스가 아니다. 셰프와 소믈리에가 협업해 요리의 산미, 지방, 향에 맞춰 직접 블렌딩한 ‘하우스 메이드 칵테일’이나 ‘발효 티(Tea)’가 주를 이루고 있다. 한식 파인 다이닝 ‘권숙수’는 프리미엄 논알코올 브랜드인 ‘효하우스’와 손잡고 논알코올 스파클링 티 페어링 코스를 선보이고 있다. 황차, 백차, 우롱차 등 6대 다류에 와인 공법을 접목해 만든 대체 와인을 한식 파인 다이닝 코스에 매칭한다. 한국 로컬 식재료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는 ‘에빗’은 논알코올 주스 페어링으로 명성이 높다. 소믈리에와 셰프가 직접 개똥쑥, 솔잎, 발효 콤부차 등을 활용해 요리마다 1:1로 매칭되는 논알코올 음료를 직접 양조해 내놓는다. 주류 페어링 못지않은 정성과 스토리가 담겨 있어 술을 좋아하는 고객들도 호기심에 논알코올 코스를 선택한다는 후문이다. 안성재 셰프의 ‘모수’도 최고급 논알코올 와인 라인업과 티 페어링 서비스를 선보이는 대표적인 소버 다이닝 공간이다.

    5성급 특급호텔 중에는 조선 팰리스 서울 강남의 최상층에 위치한 레스토랑 ‘이타닉 가든’이 프리미엄 무알코올 음료 페어링을 제공한다. 호텔의 시그니처 공간인 ‘1914바’에선 알코올 스피릿을 걷어내고 자연 재료의 에센셜과 시트러스 믹스를 활용한 하이엔드 목테일(Mocktail, 논알코올 칵테일) 메뉴를 즐길 수 있다. 롯데월드타워 81층에 자리한 한식당 ‘비채나’에선 전통차와 발효 음료를 활용한 반상과 구이 요리에 어울리는 무알코올 페어링을 내고 있다. 초고층 전망을 자랑하는 ‘바 81’에서도 프랑스 등지에서 직수입한 고가의 프리미엄 논알코올 스파클링 와인을 잔 단위로 판매하고 있다.

    [안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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