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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은 에피소드의 보고
입력 : 2019.09.26 14:2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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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하다는 것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
지인 초청으로 오산의 프라자CC에서 골프를 할 일이 있었다. 후배 한 명과 골프장에 도착하자마자 깜짝 놀랐다. 초청자 쪽 3명과 우리 두 명 포함해 골프멤버가 5명이 돼버렸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가다듬고 생각하니 담 주 골프약속에 내가 한 명 동반해야 하는 것을 이번 주로 착각했다. 5인 플레이 여건도 아니었다.
누가 빠질 것인가. 당연히 실수한 우리측에서 빠지겠다고 했지만 이왕 초청했으니 자신들이 극구 양보하겠다며 그 중 한 명이 백을 쌌다.
돌아가는 뒷모습에 맘이 저렸다. 대형 사고를 쳤으니 골프가 잘 되겠는가. 그 날 이후 동반자를 대동할 때는 반드시 문자로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잠을 설치고 새벽에 일어나 바리바리 백을 싸서 차를 몰고 골프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프런트 직원 왈 “예약자 이름이 없어요.” “엥, 웬 일?” 당황한 나머지 예약자에게 전화하니 자신은 이미 도착했단다.
바로 멘붕 상태. 직원 “이 골프장 맞습니까?” “레이크힐스 아닙니까?” “레이크사이드입니다”. 부랴부랴 경기과에서 백을 찾아 도착하니 동반자들은 2번째 홀 퍼팅 중이었다.
일주일 동안 설레며 기다린 골프가 몸이 풀리기도 전에 끝나고 말았다. 뉴서울, 남서울, 서서울, 동서울(캐슬렉스) 골프장도 이름이 비슷해 골퍼들이 간혹 착각하기도 한다.
한 친구는 인천의 잭니클라우스CC에서 회장 주최로 외부인과의 골프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회사 사장을 자기 차로 픽업해서 가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옷 공장이었다고 한다.
네비게이션에 '잭니클라우스'를 찍고 갔는데 엉뚱한 데에 도착한 것이다. 네비게이션이 무슨 죄? 풀 네임을 입력하지 않아 벌어진 불상사!
정신 없이 달려가 시간은 겨우 맞췄지만 이미 도착한 회장과 임원들 얼굴이 굳어 있었다. 현장에서 인사발령 나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감마저 들었다고 한다.
골프를 하면서 이런 모멸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어느 정도 구력이 쌓인 후 초보를 데리고 나갔다.
워낙 초보라 필드에서 기본적이고 간단한 스윙과 매너에 대해 팁을 주었다. 그런데 이 친구 예사롭지 않았다. 라운드 횟수가 쌓이면서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어느 순간 엎치락뒤치락 실력이 비슷해졌다.
어느 날 나에게 '스윙이 어쩌고 저쩌고' '리듬이 어쩌고'하며 레슨을 하는 게 아닌가. 갑자기 머릿속이 띵하고 어지러워졌다. 스윙마저 무너졌다.
골프를 가르친 초보가 어느 순간 나를 추월하고 레슨까지 할 때의 심정 나만 이런가.
골프 초창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쓴 웃음이 나온다. 주말마다 골프를 하니 아내의 심정이 좋을 리 없었다. 묘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항상 우승했다며 쌀, 과일 등을 사오거나 돈을 주는 것.
내 실력을 알 길 없는 아내는 그렇게 넘어가곤 했는데 실은 비상금을 털어 사비로 지불한 것이다. 아내는 나를 거의 골프 천재로 생각한 것 같은데 실은 백돌이에서 헤매고 있을 때였다.
골프에 몰입한 나머지 일시적 치매(?)에 빠지기도 한다. 그린에서 상대방 퍼팅을 위해 뽑아든 깃대를 종료 후 홀 밖으로 들고 나간 적도 있다. 손에 공을 들고 있으면서 캐디에게 공을 달라고도 한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골프를 했는데 그린에 공을 올려놓고 마크를 한 후 공을 아내에게 전했다. 순간 캐디로 착각한 것. 아내도 영문을 모르고 그냥 공을 받는 게 아닌가.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곤 골프만 하다 죽고 싶다는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 어느 날 라운드를 끝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샤워실 탕에 들어갔는데 아는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안경을 위로 올리고 선배가 인사를 건넸다. “예???” 상대방이 답례는 않고 매우 황당하다는 표정. 선배는 순간 죄송하다며 쓱 웃었다. 상대방은 그 날 골프 동반자였다.
“감정과 기분이 인지기능에 영향을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흥분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한 가지만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 다른 사소한 것에는 집중을 못하게 됩니다.”
김기현 현정신과의원 원장은 “공을 넣어야 한다는 의지와 생각으로 가득 차면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며 “비유하자면 화면조정을 거쳐 차분히 공간과 시간을 되새기면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설명한다.
앞 팀이 밀려 동반자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전 홀에서 공이 강속도로 날아와 우리 중앙에 그대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마터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났을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지그재그로 코스를 연결해 놓은 골프장들이 있는데 정말 위험하다. 그물망을 설치하든지 해서 사고예방에 만전을 기울여야 한다.
골프약속은 본인사망 외에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농담이 있다. 이 농담이 현실로 나타난 가슴 아픈 일도 있다. 지난해 송년 모임 참석자들이 이듬해 봄날을 골라 골프약속을 잡았다.
그 중 한 사람이 급성 간암 판정을 받고 두 달여 만인 올해 초 세상을 떠났다. 투병 기간 중에 반드시 나아서 라운드를 하자며 약속까지 했는데 안타깝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매너와 인심이 좋은 사람이었다.
양심불량으로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한다. 소위 '알까기'와 관련해 서다. 안개가 짙은 날 파3홀에서 멋지게 샷을 했는데 그린은 물론 근처에도 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주인공. 몰래 다른 공을 꺼내 홀 근처에 떨어뜨린 후 “공 찾았다!!!”. 모두 공을 그린에 올린 후 캐디가 핀을 뽑으려고 하는데 홀 안에 공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홀인원 한 줄도 모르고 알까기를 한 것이다. 홀인원 판정여부를 놓고 티격태격. 난생 처음 홀인원이라며 하도 사정하기에 인정했다. 그 날 입막음으로 그는 예상보다 몇 배의 돈을 써야 했다.
내게도 홀인원과 관련한 사연이 있다. 그 해 10월초 월요일 오전 업무를 보고 회사를 빠져 나와 오후에 서울 인근 골프장에서 골프를 했다. 130야드 언덕을 넘기는 홀에서 골프입문 10년만에 홀인원을 한 게 아닌가.
자랑하고 싶은 맘을 감추기가 힘들다 못해 괴롭기까지 했다. 평일 홀인원을 숨기다가 무려 5년이 지난 후 동료들에게 고백했다. 홀인원을 하고도 말을 못하는 심정. 주일에 홀인원을 한 목사의 처지와 같을까.
하나를 추가한 4락이 있다. 직장 상사가 모는 차 뒷좌석에서 그 날 딴 돈을 세다가 스르르 잠드는 것을 말한다. 5락도 있다. 3만원 딴 줄 알았는데 귀가 후 옷 정리를 하다가 만원이 더 나왔을 때다.
필드에서 클럽을 휘두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시공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지난날을 추억하는 것도 살아가는 재미다. 정치 이야기라면 몰라도 술좌석에서 골프 이야기로 싸웠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9호 (2019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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