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아한 와인의 힐링 여행지 부르고뉴

    입력 : 2013.06.07 14:2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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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역사의 프랑스 와인 도시 부르고뉴로 가는 길은 그리 매끄럽지 않다. 인천에서 파리까지 10시간 넘는 국제선 비행의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리옹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 리옹 생텍쥐페리 공항에 도착한 뒤에도 다시 차를 타고 북쪽으로 한참 올라가야 한다. 부르고뉴 중심 도시인 본(Beaune)까지 130km/h의 속도로 질주해도 3시간가량 더 가야 한다. 그러나 긴 여행의 피로감은 부르고뉴 남쪽 도시인 마꽁(Macon)에 들어서는 순간 싹 사라지고 만다. 프랑스 현지에서도 유명한 부르고뉴의 맑고 청명한 봄 하늘과 모자이크처럼 이어진 포도밭의 푸른 색채,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진 광경은 몸의 노곤함도, 마음의 번뇌도 다 앗아가 버린다. 전 세계 와인의 0.5%밖에 차지하지 않지만 부르고뉴산 와인이 전 세계에서 가장 멋들어지고, 풍미 있다는 찬사를 듣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굳이 와인애호가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 부르고뉴. 프랑스 남서부에 자리 잡은 부르고뉴는 남동쪽 보르도와 함께 1~2위를 다투는 와인산지다. 일본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유명세를 탔고 세계에서 가장 맛있고 비싸다고 알려진 와인 ‘로마네 콩티’가 바로 부르고뉴산이다. 부르고뉴는 일반적으로 북쪽 샤블리(Chablis)에서 남쪽 보졸레(Beaujolais)까지 230km 길게 이어진 지역을 말한다. 두 지역 사이의 도시들인 꼬뜨드뉘(Cote de Nuits), 꼬뜨드본(Cote de Beaune), 꼬뜨 샬로네즈(Cote de Chalonnaise)를 중심으로 포도밭이 퍼져 있다. 발음도 어려운 생소한 프랑스어 지명에 주눅들 필요는 없다. 그저 ‘언덕’이라는 뜻의 꼬뜨만 기억해둬도 부르고뉴를 곧장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실제 부르고뉴에는 부드러운 경사의 언덕 위 포도밭이 참 많다. 특히 남동쪽을 향해 있는 언덕에서 자란 포도는 일조량이 많아 우아한 맛을 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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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언덕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딱 떠오르는 단어가 ‘모자이크’다. 토질이 달라 각기 다른 빛을 내는 포도밭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정말 모자이크 처리한 듯한 느낌을 준다. 실제 현지에서도 부르고뉴 포도밭을 모자이크 같다는 말을 하는데, 바꿔 말하면 그만큼 다양한 맛의 포도가 나온다는 얘기다. 이런 다양성은 보르도산 와인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쉽다. 보르도는 샤또(직역하면 성(城), 포도원) 중심이다. 무슨 샤또, 무슨 샤또라는 이름으로 큰 포도원들이 포도 재배부터 최종 와인까지 책임진다.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공장에서 와인을 찍어내는 느낌이 없지 않다.

    부르고뉴는 규모에서 보르도의 20%밖에 안 된다. 그나마도 잘게 쪼개져 도메인(Domain)이라 불리는 3800개의 포도밭 농장이 부르고뉴를 촘촘히 메운다. 토양에 따라 3800여 가지 성격을 지닌 포도가 나온다는 점도 놀랍지만, 여기에 온도·습도 등 자연조건(클리마·Clima)까지 감안하면 수만 가지 맛이 나온다.

    이런 복잡한 맛을 잘 조율해 우아한 와인으로 탄생시키는 건 네고시앙(유통상)의 몫이다.

    250개 네고시앙의 철학과 역량에 따라 특색 있는 와인 브랜드가 탄생한다. 110개의 도메인과 접촉하며 수십 개의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네고시앙 장마리에드샴프는 “농장주가 어떻게 포도를 키우느냐에 따라 포도 맛이 확연히 달라진다. 때문에 농장주가 포도를 키우는 방식과 철학을 꾸준하게 살핀 뒤 함께 일할 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3800개나 되는 도메인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통일감을 갖춘 맛을 내는 비결이 있다. 보르도 와인이 여러 품종의 포도를 섞는 것과 달리 부르고뉴 레드와인은 피노누아 단일 품종을 주로 사용한다. 피노누아는 크기가 작은 포도알이 촘촘히 달린 흑보랏빛 포도송이다. 키우기 어렵지만 맛이 다채로워 여성으로 비유된다.

    푸드칼럼니스트 박찬일 셰프는 “초기에는 가벼운 붉은 딸기 향을 내고, 달콤새콤한 과일향이 새침한 어린아이 같다. 숙성되면 원숙한 여인 체취 같은 꽃과 향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래서 ‘와인의 여왕’이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는 소믈리에가 많다. 또 ‘부르고뉴=피노누아’라고 생각하는 일반인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을 내버리면 샤르도네 품종이 섭섭해 할 수 있다. 샤르도네는 피노누아와 함께 부르고뉴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품종으로 화이트와인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피노누아처럼 포도송이는 작지만 길고 탐스러운 황금색 포도다. 최근 레드와인보다 화이트와인이 인기를 얻고 있는 추세라 부르고뉴에서도 화이트와인 품종으로 전환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실제 2010년 데이터를 보면 샤도네이가 전체 재배 품종 중 46%를 차지해 36%의 피노누아를 눌렀다. 부르고뉴의 샤도네이 품종 화이트와인은 당도가 높고 부드러우며 입안에서 맛이 가득 차게 하는 풍미를 준다. 또 과일과 견과류 향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전 세계적으로도 매력적인 와인으로 꼽힌다.

    이쯤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등급 얘기를 해야겠다. 부르고뉴 와인등급은 AOC를 붙여 분류해서 나누는데 크게 4단계다. 가장 낮은 리저널 아펠라시옹(Regional Appellations)부터 빌리지 아펠라시옹(Village Appellations), 프리미에크루(Premiers Crus)를 거쳐 최상급 그랑크뤼(Grands Crus)까지다. 프리미에만 해도 전체 와인의 10%밖에 없다. 그랑크뤼는 1.4%에 불과하다. 이 등급은 밭에 따라 정해지고 거의 바뀌지 않는다. 최고급을 찾겠다며 그랑크뤼만 고집하진 말길 바란다. 그랑크뤼는 일단 값이 비싸다. 그러나 취향에 따라 아래 등급에서도 얼마든지 맛있는 와인이 넘쳐난다. 좋은 와인은 등급이 아닌 가장 먼저 비워지는 와인이라는 속담도 있으니까. 등급 얘기가 나온 김에 그 유명한 로마네 콩티 얘기를 해야겠다. 부르고뉴의 상징처럼 떠오른 와인이 300년 역사의 로마네 콩티다. 로마네 마을의 석회질 포도밭에서 유기농으로 재배된 50년 이상 된 피노누아 포도를 150년 이상 된 나무로 만든 오크통에서 숙성해 만든다. 연간 생산량이 6000병을 넘지 않는다. 기자가 찾은 로마네 콩티 밭은 언덕 중턱에 자리 잡은 여러 포도밭 중 하나에 불과해 보였다. ‘관광객은 허가 없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써 붙인 작은 표지판이 없었더라면 유명세를 짐작도 못하고 그저 스쳐 지나갈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와인 값은 상상을 초월한다. 2007 빈티지는 4000병이 생산됐는데 한국에 29병이 들어왔다. 지난해 경매에 나온 한 병의 가격은 1120만원이었다. 2011년 홍콩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는 2005년산 로마네 콩티 12병 세트 한 상자가 181만5000홍콩달러(약 2억750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한 와인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벨벳, 고혹, 미스터리라고 한다. 비단 같은 질감은 벨벳 같고, 장미꽃 같은 식물 향은 고혹적이며, 향과 맛이 도저히 몇 가지인지 모르겠다고 해 미스터리라고 했다. 부르고뉴를 방문한 지 둘째 날, 본 시내 현지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다 우연히 옆 테이블에 앉은 오베르 드 빌렌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DRC) 사장을 봤다. 와인 유통상들과의 저녁자리인 듯했다. 세계 최고의 와인 생산자라지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의 경영자는 아니라고 한다. 부르고뉴 스타일이 이런 소탈함이 아닌가도 싶다.

    부르고뉴와인협회(BIVB)는 오노트래블(Oeno Travel, 오노는 모든 것을 포도주로 바꿀 수 있는 그리스의 신 아니우스를 의미)이라는 이름으로 와인투어를 키워가는 중이다.

    본에서 와인중개업을 하는 양서은 오노필 대표는 “과거 소믈리에 등 와인종사자들이 주로 부르고뉴를 방문했지만 최근 현지에서 와인을 즐기고 싶어 하는 애호가 투어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도메인 ‘드빌라드’는 와인 애호가 투어에 관심을 쏟는 대표적인 와이너리(양조장)다. 자체적으로 샤또 드 샤미레 등 3개 이상의 와인을 내며 애호가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에머리 드빌라드 대표는 “건물 3면이 유리로 된 집을 지어 포도밭을 보면서 와인을 마시거나 포도밭을 천천히 거닐고 사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부르고뉴 여행 중 만난 인상적인 와인은 샤또 드 뽀마르, 베브앙발, 조셉 뷔리에였다. 샤또 드 뽀마르 2005는 2010년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와인 중 하나였다. 피노누아 품종의 풍미를 섬세하게 담아냈다고 평가받는다.

    베브앙발(크레망드부르고뉴)은 스파클링 와인으로 피노누아와 샤도네이는 물론, 알리고떼와 가메까지 섞어 만들었다. 값이 2~3만원대로 저렴해 식전주로 좋다.

    샤도네이 품종의 조셉 뷔리에의 뿌이퓌세 화이트와인은 푸른색 맑은 황금빛에 헤이즐넛과 아몬드 향이 강하다. 뿌이퓌세는 프랑스 남부 마꼬네 지역에서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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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인에 문외한인 이들에게도 부르고뉴 여행이 매력이 있을까. 부르고뉴는 딱 시골이다. 전 세계 골목골목에 퍼져 있는 스타벅스도 하나 없다. 세계 최대 패스트푸드점 맥도날드나 프랑스 대표 할인점 까르푸는 도시 진입로에 딱 하나씩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연환경만큼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다.

    한국인 입맛에도 꽤 잘 맞는 부르고뉴 전통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과 함께 미각을 만족시키기에 부르고뉴만 한 곳도 없다. 실제 ‘식도락’을 목적으로 부르고뉴를 찾는 프랑스인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현지인들은 전한다.

    부르고뉴 취재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 파리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짬을 내 개선문을 들렀다. 북적이는 지하철 인파와 싸우며 역 밖으로 나오자 보이는 풍경은 셀 수 없이 많은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 저마다 개선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을 뿐이었다. 포도밭, 푸른 하늘, 넉넉한 농부 인심이 어우러진 ‘힐링’ 휴식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영혼 없는 관광지’라는 문구가 딱 떠올랐다. 부르고뉴를 떠난 지 불과 3시간 만에 다시 부르고뉴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프랑스A 부르고뉴=명순영 매경이코노미 기자 / 사진 : 김춘호 / 취재 협조 : 부르고뉴와인협회(BIVB), 소펙사]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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