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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바람 불어 좋은 날 열차 횡단…이베리아 반도
입력 : 2012.12.27 18: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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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년 전 새마을호에 앉은 대학생은 슬쩍 보기에도 불안했다.
손대면 툭하고 터질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선 한손에 거품 가득한 종이컵을 쥐고 있었다. 옆자리 어린 아이가 사이다 캔을 홀짝일 때 청년은 한입에 거품을 털어놓곤 다시 신세한탄을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간혹 창밖 풍경에 눈길을 던졌지만 그 창에 비친 열차 내부는 한없이 답답했다. 흐릿해지는 정신으로 새마을호에 앉아 새로운 마을을 떠올리던 청년에게 열차는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마흔 … 갈팡질팡이나 흐릿한 정신과는 거리가 먼 나이, 파리 드골 공항에 내려선 남자는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섰다. 리스본에서 스페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까지 열차로 이동할 예정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주변 풍경이 살아난다고 했던가. 낯선 공항 풍경이 하나 둘 눈 안에 자리한다. 놓치고 흘려보내던 모든 걸 꽉 움켜쥐고 싶어 시선을 멀리 던졌다. 마음은 이미 이베리아 반도에 섰다.
(위에서 부터)트램 기행, 포르투갈 전통주 진자를 파는 상점, 코메르시우 광장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호텔 앞에 서자 가이드가 던진 첫마디다. 유럽의 여타 도시에 비해 국내에 소개된 스토리가 적은 이곳은 그래서 더 호기심을 자극한다. 환영한다는 말이 상투적으로 들리지 않는 건 짐작하건대 수많은 한국인이 리스본을 찾아주길 바라는 포르투갈의 진심 아닐까. 대항해시대를 연 바스코 다 가마와 마젤란의 당당한 기세가 6세기가 지난 지금 한풀 꺾였다고 생각하니 묘한 격세지감이 생경하다. 깊어진 불황에 ‘믿을 건 관광산업뿐’이라는 유럽인들의 바람도 다르지 않다. 리스본의 중심가는 1755년 대지진(불길이 6일간이나 이어지며 당시 인구의 80%가 희생됐다)을 겪은 후 재건축이 진행됐다. 폼발 후작이 건설한 재건도시가 바이샤 지구다. 서쪽의 바이로 알투 지구, 동쪽의 알파마 구시가지, 벨렘 지구 등이 리스본에 담겨 있다. 손으로 빚은 타일이 촘촘한 거리는 마드리드보다 덜 웅장하고 파리보다 덜 화려하다. 그럼에도 쉬 눈을 뗄 수 없는 건 왠지 모를 푸근함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샹젤리제라는 리베르다데 거리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가 아닌 카페를 즐긴 후 호시우-레스타우라도레스 광장을 따라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향하다 보면 거리 곳곳에서 군밤장수를 만날 수 있다. 서울의 그것과 흡사한 이곳의 군밤은 조개탄에 구워내 소금으로 간을 한다. 그 덕분에 거리 곳곳에 연기가 피어오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이 매캐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다. 오히려 명물이다.
점심시간 무렵, 호시우 광장에서 만난 한 중년 사내는 손에 작은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진자(GINJINHA)라고 소개한 그건 우리로 치면 막걸리나 소주쯤 되려나. 거리 곳곳에 ‘GINJINHA’ 간판을 내건 상점에서 수많은 이들이 1.1유로를 내고 잔술을 집어 든다. 사내는 버찌로 만든 이 과실주를 홀짝이며 점심시간을 보내는 게 또 하나의 낙이라고 소개했다.
(위)바르셀로나의 상징으로 자리한 건축가 안토니아 가우디의 카사밀라, (아래) 스페인 마드리드 시내
“야간열차가 현저히 줄고 있어요. 느긋하게 유럽을 여행하고 싶다면 서두르셔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우선 저가항공사의 공략이 거셉니다. 비행기로 2시간 반이지만 열차론 하룻밤을 꼬박 가야 하니(웃음). 그렇다고 비행기와 비교해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에요. 열차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바로 다음날 투어에 나설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장점이에요. 비행기 삯에 호텔 숙박비를 합친 금액보다 훨씬 싸거든요.”
열차에서 밤을 보내고 마드리드 시내로 들어섰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목적지를 정한 후 조우한 가이드 나탈리아는 스페인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며 그럼에도 경기불황의 여파를 비껴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의 말끝에 야간열차의 운명이 떠올랐다.
“스페인의 오늘은 최근 30~40년간 실업률이 가장 높은 시기예요. 제 주변에도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는 친구들이 부지기수거든요. 예전엔 학회나 회의 등이 많아서 그곳에서 팁을 받아 생활하곤 했는데, 지금은 컨벤션 사업 자체가 정체돼 있어 그런 수입이 전무합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요(웃음). 스페인은 어려운 때일수록 선조들의 영광이 깃든 관광산업이 힘을 냈으니 다시 일어서야죠.”
·루지타니아(Lusitania)-포르투갈에서 스페인, 프랑스로 여행할 수 있는 수드-엑스프레소(Sud-Expresso)와 루지타니아 콤보이오(Lusitania Comboio) 호텔 야간열차 등 국제 구간을 운행한다. 리스본 산타 아폴로니아에서 마드리드의 차마르틴 역까지 8시간 40분이 소요된다. 원하는 구간을 선택해 티켓 구입이 가능하며, 일정기간 동안 해당 국가의 국철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유레일 1개국 패스 또는 2개국 패스를 선택해 여행할 수도 있다
· 스페인 아베(AVE)-아베(AVE)는 ‘Alta Velocidad Espanola’의 약자로 스페인 초고속이란 의미다. 최고 시속 300km로 스페인의 모든 주요 도시를 운행한다.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까지 2시간 38분이 소요된다.
[이베리아 반도=안재형 기자 포토그래퍼 최동훈 취재협조 레일유럽(www.raileurope.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8호(2013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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