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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⑤ 내 집의 강남스타일
입력 : 2012.12.27 11: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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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아 이 친구가 진짜 서울내기구나’ 싶었다. 광화문 앞에 실개천이 흐르던 날들을 기억하다니. 그런 사람이 있다니.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서울생활을 시작한 남자들이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시점은 언제일까. 서울에서 직장을 잡고, 아내를 맞아 결혼을 하고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을 샀을 때가 아닐까. 고향의 부모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울에 사는 아들이 들뜬 목소리의 전화로 집을 샀다는 연락을 해 왔을 때, 그때 비로소 자신의 아들도 서울 놈이 되어 버렸구나 실감하는 게 아닐까. 그 이름도 이상한 외래어의 아파트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면서.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한다는 것. 그것은 한 남자가 첫 직장을 가질 때, 결혼을 할 때, 첫 아이를 낳을 때나 맛볼 수 있는 생애 몇 번의 감격 가운데 하나다. 나에게도 집을 살 때의 감격은 다른 감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쁨으로 남아 있다. 그런 감격과 기쁨 속에 강남에 집을 사면서 시작한 강남생활이 올해로 서른다섯 해를 넘기고 있다.
미분양 아파트가 넘치고 ‘집 가진 거지(House Poor)’가 비명을 질러대는 요즈음과는 달리, 말 그대로 그때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었다. 맨땅에 말뚝도 박지 않고 아파트를 분양해도 치열한 경쟁으로 당첨이 어렵던 시절, 잠실의 한 아파트에 분양대금을 완납하던 날 나는 ‘돈을 다 낸 내 아파트’를 보러 택시를 타고 갔다. 아파트는 아직 공사 중으로 겨우 시멘트를 들어부은 골조가 완성된 상태였다. 앙상하게 뼈대만이 서 있는 아파트에 내 집이 들어설 11층까지를 나는 한달음에 뛰어올라 갔었다. ‘이런 게 사는 건가 보다’ 생각하며 시멘트 바닥 거실에 서서 한강을 내려다보던 그때의 기분은 어쩐지 좀 더러웠다. ‘휴지처럼 내 삶이 구겨지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아파트 생활 속에서 첫 아이, 딸을 낳았다. 아파트 복도 쪽으로 난 창으로는 여의도와 워커힐의 불빛이 함께 바라보이는 한밤의 정취가 있었다고는 해도, 아파트 그것도 고층에서의 삶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낮에도 글을 써야 하는지라 창문에는 전부 두꺼운 커튼을 치고 스탠드를 켜야 했고, 소음을 피해 문이란 문은 꽁꽁 닫아걸고 살았다. 그 아파트에서 겨우 8개월을 버티다가… 아예 먼 제주로 내려가 버렸다. 3년의 제주생활은 아파트였지만 그래도 살만했다. 무엇보다도 5층짜리 낮은 아파트 인데다가 창문 앞에는 바로 귤 농장이 펼쳐지는 한가로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실 창으로는 하루 종일 색깔을 달리하며 2백호쯤 되는 유화처럼 한라산이 걸려 있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자리를 잡은 곳은 테헤란로 가까이 강남의 역삼동이었다. 밭에서 옥수수대가 너울거리고 잘 손질한 파밭이 모판처럼 늘어선 곳에 집을 사고, 그 ‘땅집’에서 17년을 살았다. 해가 가면서 남아 있던 동네 빈터에 하나 둘 집이 들어섰다. 워낙 큰 집들이 들어서는지라 내가 고무신을 신고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니 방범대원이 달려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주택가가 되었다.
늦가을이면 마당을 파고 김칫독을 묻고, 마당에 100그루가 넘는 세 자리 숫자의 장미를 길러보고 싶어 했던 곳도 그곳이었다. 8개월 만에 외국에서 돌아오는 내 발소리를 먼 골목 끝에서 알아듣고 용솟음치듯 짖어대던 강아지 몽실이와 함께 한 곳도 거기였다.
아들을 거기서 낳아 고등학교 2학년까지 키우는 동안 주변이 변하기 시작했다. 단독주택이 헐리고 하나 둘 5층짜리 다가구가 들어서는가 싶더니, 앞집이 치솟고 옆집이 치솟으며 성벽처럼 내 집을 둘러싸는 게 아닌가. 이건 사람 살 곳이 아니다 비명을 지르며 이사를 나오면서, ‘싸게 팔면 집은 팔린다’는 말을 진리로 간직했다.
거기 살며 때때로 집터에 대한 망상에 빠질 때가 있었다. 집 혹은 집터에는 분명히 그 터마다 이상한 징크스가 있다는 것이었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이상했던 17년간의 연역적 결과가 그랬다. 이웃집들의 운명이었다. 골목길과 담을 사이에 두고 네 집이 동서남북으로 붙어 살았는데, 그 집에 사는 가족의 운명은 집 주인이 바뀌어도 신기할 정도로 똑같이 반복되었다.
앞집은 내가 사는 동안 두 번 다 사업을 하던 아들이 집을 날리는 바람에 이사를 가야 했다. 아들 부부와 손자들이 찾아와 휴일이면 왁자지껄한 단란함은 사업이 잘 나가는 시절이었다. 그것이 언젠가부터 뜸해지면서 점차 집안이 조용한 정적에 빠지다가, 어느 날 “아들이 말아먹었다”는 소문 몇 가지를 부스러기로 떨어뜨리고 홀연히 이사를 가 버렸다. 그 다음에 집을 이어받아 이사를 오는 집도 똑같았다. 처음에는 가족들로 북적대다 점차 조용해지다가 아들이 말아먹었다는 소문 속에 사라져가기는.
다른 두 집도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바통터치 하듯이 이사를 가고 온 적이 없이 은행경매가 거듭되면서, 건축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 경매로 넘어간 집에는 다시 건축업을 하는 사람이 와 살았다. 갈비집을 하다가 망한 사람이 나가고 나면 보쌈집을 하는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 이웃집의 역사가 그랬다. 그 후 일본과 미국에서 보낸 몇 년의 외국 생활을 거치면서 강남의 방배동과 청담동 그리고 신사동을 오가며 살고 있다. 그렇게 서른다섯 해가 지나갔다. 집이 들어선 환경의 열악함은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인간의 삶을 격조도 품위도 없이 만드는 이것은 무엇인가. 아니다, 이건 아니다. 요즈음 강남에서 살며 내가 내뱉는 신음소리다.
일방통행인 골목을 거슬러 올라오다 오히려 경적을 울려대는 수입승용차의 횡포며 남의 집 빈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예배 보러 가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강남 대형교회 신도들의 주차행태도 모욕을 뒤집어쓰듯이 겪어야 하는 일들이다. 게다가 하수시설의 총체적 부실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강남을 뒤덮고 있는 시궁창 냄새는 또 어찌할 것인가.
서울 강북에 방학동(放鶴洞)이란 곳이 있다. 방학동의 ‘방학’이란 학을 풀어놓고 기른다는 뜻으로 중국 북송(北宋)시대의 시인 린부(林逋)에게서 유래한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린부는 300그루의 매화를 아내로 삼고 두 마리의 학을 자식으로 기르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린부는 그 학을 풀어놓고 길렀는데, 손님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호수에서 낚시를 하던 그에게 학이 날아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고 한다.
한자에 어두운 내가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린부의 시에 ‘북쪽 산도 푸르고, 남쪽 산도 푸르네(吴山青. 越山青)’ ‘네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내 눈에도 눈물이 흐르네(君淚盈. 妾淚盈)’하는 시가 있었다. 그때 이 시를 보며, 단순함이란 이렇게 오래된 아름다움이었던가 생각했었다.
서기 1000년대의 사람이 학을 기르며 그렇게 살다가 갔다. 누구는 천년 전에 그렇게 살다가 갔는데… 강남 한구석에서 매연과 시궁창 냄새와 무절제의 난잡함이 불러오는 우울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격조도 품위도 없는 나날. 강남을 떠나서 이제 다시 집을 마련해야 할 곳, 늙음을 기대고 몸을 쉴 곳은 어디일까.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8호(2013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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